82. 천외천부, 부활 서막은 암흑가에서
한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유승우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유승우는 그의 집 2층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가 수련 중이던 유승우를 불러 올린 것이다.
유승우와 함께 수련중이던 세 사람처럼 김석준과 인연이 깊어 그가 한에게 소개한 사람이다. 한도 유승우와 예전에 인연이 있었다. 유승우는 그가 조영구를 핍박하는 석준 파 조직원들을 단신으로 검거할 때 당시 그곳에서 그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검거된 사람들 중 삼분의 이가 일심에서 풀려났다. 유승우도 그때 풀려났는데 그것은 죽은 이종하의 덕이었다.
한은 조폭을 싫어했지만 김석준을 믿었고 유승우를 비롯한 네 명은 그의 믿음을 아직까지는 배신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한을 바라보는 유승우의 두 눈에는 존경과 두려움이 혼합된 외경의 빛이 가득했다.
한은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너를 부른 것은 잠시 수련을 쉬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유승우의 얼굴에 아쉬움의 기색이 스쳤다. 그가 수련을 쉬어야 될 일이라고 해봤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뿐이다.
석준 형님께 일이 생긴 겁니까?
그렇다.
한은 유승우의 심정을 이해했다.
무술을 수련한 자들은 누구나 고수를 꿈꾼다. 그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수련을 중단하라니 아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의 무심학[ 가라앉아 있던 준 깊숙한 곳에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유승우와 이석기, 민승일, 장경님 이들 네 사람은 그가 받아들인 최초의 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기명제자(記名弟子, 사승 관계를 맺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라 무기명제자(無記名, 무예를 배우지만 사승 관계를 맺지 않은 관계)들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그가 무예를 전수한 사람들이라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경우는 김석준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너희들 중 네 성취가 가장 낫다. 나가서 김석준을 도와라. 석준이가 하던 일 중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은 네가 맡게 된다. 석준이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김중식 선생을 돕는 일은 네가 해야 해.
알겠습니다.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유승우는 묻지 않았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도 어느 정도는 한의 분위기에 적응이 된 것이다.
나가서 일을 하는 시간이 길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두 달 이내에 네가 다시 도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마.
한의 음성에 정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 유승우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알겠습니다. 사범님.
유승우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사범이란 명칭은 유승우를 비롯한 네 사람이 한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어려워해서 한이 그렇게 부르도록 한 것이었다.
무예를 전수하면서 그가 이들에게 형님 소리를 듣는 것은 이상했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장이니 이들이 그를 사범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소리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려가 봐라.
예.
1층으로 내려가는 유승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사형이 말한 두 번째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온 듯하군. 사형의 생각이 옳았다.
뒤에 적을 남겨 두고 움직일 수는 없어. 일본지회를 무너뜨려야 한다.
팔짱을 끼고 창밖의 거리를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 이제는 고인이 된 오제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강원도에 있는 국정원의 안가에서 오제문은 그에게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해야 하는 하나는 이수진과 수세보원기였고, 제거해야 하는 한 가지는 대한호국회의 일본지회였다.
대한호국회의 지회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 설립되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회가 일본지회였다. 그 다음이 한국지회였고, 다른 나라의 지회들은 일본과 한국의 지회들처럼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지회의 무력이 타 지회보다 강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지회는 천외천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 세워졌다. 호국회에게 한(韓)이라는 민족은 영원한 천적의 고향이었다. 그들의 나라에 지회를 세우는 데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지회는 여타 아시아 국가에 세워진 지회보다 지부가 두 배는 많았고 무력 책임자, 즉 호국무단원들의 수도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많았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호국회의 지회가 세워진 지 이미 삼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들은 자체적으로 무예를 전승시켰다. 천부와 호국회의 쟁패 과정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그들의 무력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강해졌다.
호국회가 일본지회에 대한 통제의 어려움을 느끼고 그들의 힘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일본지회의 힘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 것이다.
날이 추워지면서 골목길은 인적이 끊기다시피 했다.
골목길을 걷던 검은 롱코트를 입은 노인이 고개를 들더니 한이 서있는 이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두 눈이 우연처럼 한과 마주쳤다. 훤칠한 키에 혈색이 좋은 노인이었는데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에 귀밑머리가 칠흑처럼 검어서 인상적이었다.
젊었을 적 아가씨들의 마음 꽤나 흔들어 놓았을 호남형의 노인은 한을 보며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난데없는 노인의 미소를 본 한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무언가 그의 뇌리를
두드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호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은 신형을 돌렸다. 노인에 대한 생각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잠시였지만 평화로웠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움직여야 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골목길에 점점이 보이던 휴지 조각들이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 아이를 보고 왔다.
노인은 찻잔을 입에서 떼어낸 후 툭 던지듯 말했다.
웃으며 노인을 보고 있던 이수진의 눈이 커졌다.
만나보셨어요?
아니다. 지나가며 얼굴만 보았다. 생각보다 무식하게 생겼더구나.
무식이요? 호호호 호호!
노인의 말에 이수진은 고개를 젖히고 길게 웃었다.
그녀는 가끔 임한의 외모가 너무 무뚝뚝해 보인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무식하게 보인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은현진인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이수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내 말이 틀렸느냐? 아니에요. 다시 생각하니까 조금 무식하게 보이긴 하네요. 할아버지.
그렇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 사람에게 전해 드릴까요?
예끼 이놈! 싸움 붙일 일 있느냐! 난 늙어서 그렇게 젊은 녀석과 싸울 수 없다. 보니까 별로 노인을 공경할 것 같지도 않은 놈이던데 이 할애비가 젊은 놈한테 맞는 것을 보고 싶으냐?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할 리가 있겠어요, 할아버지?
이수진이 밝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은현진인을 어찌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태기산에서 호국회의 장로들을 상대하는 임한의 능력을 직접 본 그녀였지만 그라 해도 은현진인을 상대할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은현진인이 꽃이 있는 풍경을 찾아온 것은 삼십 분 전이었다. 그녀는 바로 가게의 셔터를 내리고 안에서 은현진인에게 그동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보고가 끝나자 은현진인은 그녀에게 이곳에 오기 전 임한을 보고 왔다는 뜻밖의 말을 한 것이다.
이수진이 어느 정도 웃음을 진정한 기색이자 은현진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과 기품이었다. 검혼이 정말 좋은 후계자를 두었어.
순간적이지만 그런 후계자을 두고 간 검혼이 부러웠다.
담담한 어조였다.
할아버지에겐 이 진이가 있잖아요.
진인을 바라보는 이수진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녀석, 그래서 순간적인 생각이었다고 했지 않느냐.
진인은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다시 움직일 듯하더구나.
임 형사님이요? 그런 연락은 없었는데요? 내 느낌이다.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 녀석의 눈은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어.
이 수진의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대한호국회의 한국지회가 붕괴된 지금 국내에서 임한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움직인다면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진인을 향했다.
그가 양 회주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 할애비도 모른다.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진인의 말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딱 부러졌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이수진도 잘 알고 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 너도 호국회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거라.
언제나 명심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이수진의 눈 밑에 그늘이 졌다.
검혼이 그 아이를 선택했을 때부터 그 아이의 삶은 호국회를 상대하도록 결정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연이 부딪침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 그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된 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행동은 보면 자신에게 지워진 숙명을 인정한 듯하구나.
이수진은 임한이 사형이라는 천외천부의 생존자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진인에게 바로 전해주었다.
그는 강인한 사람이에요. 비록 그 사람이 양 회주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나도 그러길 바란다.
싱긋 웃으며 말한 진인의 얼굴에 장난스런 빛이 떠올랐다.
휴우, 지금 그 녀석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코가 석자야.
진인의 분위기에 동화된 이수진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코를 눌러 드릴까요, 할아버지? 됐다, 이 녀석아. 그 녀석 걱정할 때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더니 할애비가 하는 일이 풀리지 않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구나.
할아버지도.
이수진은 밝은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진인의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녀가 따라준 차를 마시는 진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깊어져 있었다.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이준하와 이세영 부자와 그 녀석과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녀석을 보러가긴 했지만 그 녀석이 그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움직일 리가 없다. 결국 그 녀석도 그 물건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인데.
은현진인의 생각은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김석준은?
기계를 모두 들어낸 공장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빈 공간의 중앙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이사님은 바쁘셔서 오지 못했소.
유승우는 자신의 앞에선 삼십 대 중반의 사내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사님? 그 자식 많이 컸네.
김상만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삼십 대 후반의 그는 평택 지역 최대 폭력 조직, 상만 파를 이끌고 있는 자였다.
상만 파는 이제는 사라진 사대 조직 중 동무 파 계열로 분리되는 조직으로 평택과 송탄 지역을 석권하고 있었고, 정조직원의 수가 100여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진 조직이었다.
그가 상만 파를 만들었을 때 김 석준은 이마에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풋내기였었다.
게다가 오늘 그가 나온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김석준이 직접 오지도 않고 부하를 보낸 것은 그를 무시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김석준이 직접 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너 같은 꼬마가 와! 그동안 수원 주변 도시의 군소 조직 몇 개를 쓰러뜨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자그만 성공에 김석준의 간이 배밖에 나왔구나. 평택은 우리 땅이다. 이곳은 네 놈 같은 꼬마 녀석이 넘볼 곳이 아니야.
190은 되어 보이는 키에 체중도 130킬로그램을 간단하게 넘을 듯한 거구의 사내였다. 목소리도 굵어서 그가 소리를 치자 공장 안이 우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유승우의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굳은 안색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넷. 유승우까지 합쳐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수는 스물다섯이 넘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온 사내들과는 달리 유승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2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거구의 사내를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유승우는 보기 드문 미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외모라 다른 자리에서였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테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상대에게 그의 미소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사내들의 시선이 험악해질 때 유승우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김상만 씨, 이사님의 제의는 거절입니까?
씨? 이런 호로 자식이! 감히 누구와 맞먹으려 드는 거냐!
거구의 사내, 상만 파의 행동 대장 이재상의 두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길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의 두 눈이 유승우를 노려보았다.
이재상을 바라보는 유승우의 눈에 어렸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어차피 김상만이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김상만은 대륙상사가 장악한 수원과 안양, 안산과 용인, 시흥 지역에서 불과 한 달 반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부하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대륙상사가 처음 그 지역에 진출했을 때 그 지역의 조직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대륙상사가 어떤 회사인지 아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들이 대륙상사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는 그들의 기반이 절반 이상 붕괴된 후였다.
대륙상사는 막대한 자금으로 그 지역의 인력 공급 망과 주류업계를 먼저 장악했고, 보호비 명목으로 조폭에게 돈을 갈취당하는 업소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심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유흥업소들을 인수했다.
그 모든 것이 보름도 되지 않는 동안 일어났다. 전격적이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륙상사를 경영하는 김중식의 경영 능력과 인맥은 탁월했다.
믿기 어려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진출한 지역의 노른자위를 장악했다.
대륙상사의 이런 사업 활동은 필연적으로 그 지역 조직의 도전을 받았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조직은 없다.
거센 도전이었지만 지금까지 대륙상사는 건재했다. 그리고 대륙상사에 도전했던 조직들 중 지금까지 유지되는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그 지역 암흑가의 거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해야 했고 조직에 속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대륙상사에 흡수되었다.
대륙상사가 평택에 진출한 지 이틀 만에 그 흔적이 포착된 것은 김상만에게
행운이었다.
평택에서 작업에 착수했던 직원 두 명이 인사불성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은 김석준은 곧 김상만에게 연락했다. 누구 짓인지 조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 석준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오늘이 만남은 평택에 진출하려는 대륙상사와 이미 팽택을 장악하고 있는 상만 파의 협상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김상만은 대륙상사와 협상을 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륙상사가 장악한 지역의 조직들은 해체되었고 그 조직원들은 모두 월급쟁이가 되었다. 무법(無法)은 허용되지 않았다. 적절한 대우를 약속하고는 있었지만 어떤 조직보다도 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곳이 대륙상사였다.
평택에서 밤의 황제 소리를 들으며 십여 년 가까운 세월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온 김상만이 그런 대륙상사에 협조할 리가 없는 것이다.
유승우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공장 안을 훑어보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재상 씨. 난 대륙상사의 과장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적절한 장소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당신들이 이곳을 고집했기에 군말 없이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상대는 김 상만씨지 당신 같은 졸자가 아닙니다.
말을 맺는 유승우는 두 눈이 밤 짐승처럼 번뜩였다. 심사가 뒤틀린 것은 김상만 일파만은 아니었다. 유승우가 호로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도 평정을 유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 수양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수련이 필요했다.
김 석준과 한이 그를 선택한 것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선택을 받을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상만과 이재상은 유승우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불과 한 달 반 전 까지만 해도 유승우는 그저 이름 없는 건달에 불과했었기에.
이런 개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내뱉는구나.
유승우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가슴속에 살기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기를 외부로 발산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한에게 무예를 전수 받으면서 했던 첫 번째 약속이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한에게 배운 것을 함부로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유승우는 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 한은 초인과 같은 능력을 갖고도 거의 은자(隱者)처럼 숨어 사는 사람이었고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감추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신앙처럼 숭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유승우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던 살기가 누그러졌다.
말로 해결하고 싶지만 그럴 단계는 지난 것 같군요.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재상은 유승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살갗을 찌르는 무엇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살기를 기세로 변화시켜 상대의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러한 경지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흐흐흐.
이재상은 음침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파이팅 자세를 잡는 그를 보며 유승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상의 목과 오른쪽 옆구리, 허벅지 아랫부분의 허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재상은 복싱을 비롯한 여러 무술을 섭렵했고 수많은 실전을 겪은 자였다. 예전의 유승우였다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승우에게 이재상은 너무 쉬운 상대였다.
이재상이 눈을 번뜩이며 그와의 거리를 좁히자 유승우도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는 한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싸울 일이 있다면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싸워라. 지나치게 간단하고 파괴적인 타격은 오히려 상대와 지켜보는 사람들을 승복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두려움을 주기위해서는 네 동작의 의미를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싸움은 귀신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해하지 못하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하면 싸움은 길어진다.
유승우에게 접근하던 이재상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직선으로 다가오던 그는 어깨를 슬쩍 흔드는가 싶더니 유승우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풋워크였다.
슈욱!
묵직하게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주먹이 유승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이재상의 주먹은 날카로웠다.
그 주먹을 바라보는 유승우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왼발 끝이 땅을 찍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빙글 돌았다. 그의 얼굴과 뒤통수가 겹쳐서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재상은 빤히 보이는 유승우의 잘생긴 얼굴이 갑자기 시커먼 뒤통수로 변하자 깜짝 놀랐다.
싸움 중에 등을 보이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이번에는 유승우의 머리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허리를 숙여 이재상의 주먹을 흘린 유승우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반회전시켰다. 두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유승우의 몸이 가파른 아치를 그렸다. 몸을 돌린 그의 두 눈에 그를 놓친 이재상의 경악한 얼굴이 들어왔다.
유승우는 용수철처럼 허리를 퉁겼다. 그의 두 발이 먼지를 쓸어올리며 돌개바람처럼 솟아올랐다.
무엇인가가 턱 아래에서 희끗거리는 것을 느낀 이재상이 고개를 젖히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유승우에 비한다면 굼벵이처럼 느렸다.
유승우의 두 발이 이재상의 턱을 강타했다.
쿵!
컥!
괴상한 비명 소리와 함께 이재상의 몸이 허공으로 일 미터 정도를 떠올랐다가 뒤로 나뒹굴었다.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두 다리를 허공에서 회전시킨 후 공중제비를 한 번 돌며 일어서 유승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재상과의 싸움은 한에게 무예를 배운 후 최초의 실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의 마음속을 기쁨으로 채우고도 남았다.
김상만과 상만파 행동 대원들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이재상은 상만파 최고의 파이터였다. 그런데 그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젊은이에게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이 초가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상만파에서 단신으로 저 젊은 사내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유승우의 웃음기가 어린 두 눈이 김상만을 향했다.
계속 해보실 생각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김상만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김석준이나 그놈이 보낸 너나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기고만장하구나!
말을 하는 그의 입에서 으드득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유승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한 걸음 전진하던 유승우는 뒤를 따라붙는 사내들을 손짓으로 저지했다. 그것은 그 혼자서 상만파를 상대하겠다는 의미여서 김상만은 속으로 열불이 났다.
미친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김상만의 욕설은 거칠었다. 하지만 험한 욕설에도 불고하고 유승우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재상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그에게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는 김상만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텅 빈 공장 안에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후일 그의 두 주먹이 움직이면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사패자(四覇者)의 일인으로 불리게 된 패권(覇券) 유승우의 폭풍 같은 전진이 시작된 것이다.
느긋하게 등을 벽에 기댄 채로 김석준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한을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뼈만 남은 오리 두 마리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원 인근 광교산 자락에 있는 농장이었다. 농장의 주인은 김석준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여서 보안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승우는?
한은 김석준을 응시하며 물었다.
흐흐흐, 네 녀석을 가르쳤는데 어련하겠냐. 평택의 김상만이 은퇴했다.
승우는 아직 감정 조절을 잘 못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냇가에서 노는 아이를 보는 부모 같구나. 염려하지 마라. 모자란 점이 많긴 하지만 어리석은 녀석은 아니다. 그런데 너, 무슨 고민이 있냐?
그는 한의 이마에 그려진 내 천 자를 보며 물었다. 그를 만나면 그나마 감정 표현을 어느 정도 하는 한이지만 저렇게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조금 답답한 일이 있다.
한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고민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는 그의 음성은 조금 어색해 하는 기색이 있었다.
뭔데? 내가 도울 수 없는 거냐?
네 할 일을 해주는 것이 나를 돕는 거다.
하여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정말 정 떨어지는 놈이다. 너는.
사내놈과 정붙일 생각 없다.
너란 놈과 친구가 된 것이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 가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김석준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물론 농담이다.
그를 바라보는 한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말 못할 것은 없어. 네가 날 도울 수 없는 일이어서 말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일본에 가야 할 것 같아.
한의 말에 김 석준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일본지회 때문이냐? 그들이 만난 것은 한 시간 전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국으로 들어온 야쿠자에 대해 상의했다. 그 때문에 김석준은 일본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을 저렇게 그냥 둘 수는 없다.
그렇긴 하다만
김석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지 않을까? 네가 이 땅을 떠나면 저들은 그냥 있지 않을 텐데 나와 승우를 비롯한 다섯 명과 그 수세보원기라는 조직이 있다고는 하지만 네가 말한 그 장로라는 자들 몇 명이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면 우리만으로 그들을 막기는 어렵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이다.
밀입국하려고?
그래.
졸지에 밀항자 하나 나오겠군.
김 석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이 따라 웃자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내가 일본으로 가는 것은 비밀이다. 한국지회가 무너진 이상 은밀하게 움직이는 내 행적을 그들이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수진 씨로부터 들은 정보대로라면 원로원의 장로들도 몇 남지 않았다. 정보가 차단된 이곳으로 무턱대고 들어올 자들이 아니야.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진짜 문제?
내가 일본지회의 위치나 그들의 조직 구성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한의 말을 들은 김 석준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일본에 가겠다는 거냐?
이곳에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맨땅에 헤딩이 얼마나 아픈 것인 줄 모르는군.
김석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할 수밖에 없다면 해야 한다. 계속 이곳을 방어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수성만으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 우리도 힘을 키우고 있지만 그들이라고 놀고 있지는 않을 거다. 아니, 이를 악물고 전력을 보강하고 있겠지. 나와 쌓인 원한이 적지 않으니까. 그
렇긴 하다만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한 일본에 가는 건 너무 위험해. 나는 반대다.
김석준은 강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한은 싱긋 웃으며 김석준의 어깨를 쳤다.
지금 당장 가겠다는 것은 아냐. 그리고 일본지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아직 풀어야할 의문도 하나 남아 있고.
풀어야 할 의문은 또 뭐야?
그런 게 있다. 나중에 말해주마.
잘났다!
김석준은 다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어놓은 코트를 걸쳤다. 한도 바쁘지만 그도 바빴다. 대륙상사의 일은 늘어만 가고 있는데 한이 그에게 또 하나의 일거리를 던져준 것이다.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한이 김석준의 뒤를 따랐다.
밖은 어두웠다. 그들이 만났을 때는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었는데 한 시간 만에 해가 진 것이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추운 걸.
말을 하는 김석준의 입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닷새만 더 지나면 12월이다.
한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년에는 좀 한가해졌으면 좋겠다.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던 김석준이 고개를 들어 괴괴한 적막에 잠긴 광교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준의 바람은 그의 바람이기도 했다.
먼저 가겠다.
김석준은 한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 어깨를 어루만지듯 그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손을 뗀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이 농장을 떠난 것은 김 석준이 떠난 직후였다.
농장은 그들의 방문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