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백산 야생화, 천년의 이야기
강 병 로
산사의 풍경소리에 문득 깨어난 세상.
그 세상에 어둠처럼 긴 세월이 이어졌습니다.
아픈 상처도 켜켜이 쌓였습니다.
덧난 상처는 아물 줄 몰랐지요.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또 오고,
그러면서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사람도 세상도 아니었습니다.
땅속에서 오롯이 솟아 저 홀로 맑게 피어난 꽃이었습니다.
바람으로 일어서 물과 구름으로 흐르던
함백산은 아픈 상처로 신음하던 기슭의 사람들에게 위안이고 벗이었습니다.
헐벗은 세상에 모든 것을 내어 주고도 푸른 얼굴로 꼿꼿이 버틴산.
그 산 함백산에 꽃과 나무와 들풀이 자랍니다.
눈발을 뚫고 피어난 복수초는
이 곳 사람들에게 인내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얼레지의 깊은 뿌리는 아들, 딸에 대한 질긴 모성입니다.
바람으로 피어난 바람꽃과 고드름을 먹고 자란 돌양지꽃,
저홀로 맵시를 뽐내는 앵초도 함백산이 피웠습니다.
별무리에 뒤질세라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달맞이꽃과 물봉선,
동자꽃, 각시취도 함백산의 자랑입니다.
온 산기슭을 하얗게 수놓는 구릿대와 쑥부쟁이,
구절초도 눈길을 끕니다.
산속의 병정 투구꽃은 8월의 무사입니다.
용담은 멋진 가을의 선비이지요.
산비장이는 붉은 입술로 하늘을 유혹합니다.
함백산의 들꽃이 다시 세상을 엽니다.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 세상말입니다.
탄광마을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정말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래서 형님으로 모시는 강원도민일보 강병로님이 정선지역 주재기자로 근무하실 때 쓰신 글입니다. 산과 야생화를 유난히도 좋아하셨기에 함백산과 고한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셨지요. 이런 주재기자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요.^^
오늘은 야생화가 아니라 저희 지역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볼까 합니다.
저희 동네는 1950년대 까지만해도 200여 가구 남짓한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근대화, 산업화 바람이 몰아치면서 준비되지 않은채 세상속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정선, 태백 지역일대에 검은 진주라 불리던 '석탄'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석탄산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골짜기 골짜기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지역인구는 순식간에 6만여명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탄광마을 고한과 사북이 그렇게 형성되게 된 것이지요.
대부분의 탄광지역들이 그렇듯 제가 나고 자랐던 고한과 사북의 정주환경은 특히나 열악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연과 환경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석탄을 빠른시간내에 많이 캐내는게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여기저기 쌓아 놓은 석탄덤위가 산을 이루며, 검은 먼지가 마을을 안개처럼 덮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마을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어렸을때는 빨리 커서 이곳을 벗어 나야겠다는 생각만 했으니까요.^^
주민의 정주환경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광부들의 노동환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석탄은 탄질도 나쁠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지하 깊숙히 매장되어 있었는데 정부가 석탄생산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근로자의 안전은 뒷전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7~80년대 전국에 산재한 광산에서는 매몰사고 등으로 매년 200여명의 광부들이 어두운 막장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석탄이 폐에 쌓여 서서히 죽어가는 불치병인 '진폐증'에 걸려 슬프고 힘든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의 기억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80년 사북사태'는 이같은 열악한 환경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저희 마을 사람들의 눈물겨운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광부들의 애절한 목소리가 신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되어 버렸던 사북사태는 지금은 정부에 의해 '사북민주화항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간혹 저희 지역의 역사를 다른 분들에게 소개하다 보면 저 스스로 너무 어둡고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백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야생화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보물처럼 생각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탄광이 모두 폐광한 이후 시작한 '고한 함백산 야생화축제'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주민들의 작지만 아름다운 노래소리입니다.
오늘은 저희 마을에 대한 소개를 여기까지 하구요. 다음 2부에서는 강원랜드가 들어서게 되는 이야기를 해 드릴께요.
올해 함백산야생화축제 준비하느라 애써 방을 만들어 주신 버들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하기만 한데요. 축제가 끝나는데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댓글 위에서 두번째 사진 박심리 올라가는 문화관 지나가는 길 맞지요?
포장도 안된길에 연탄가루 소복히 쌓이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탄죽이 되어 그길을 지나지 않으면
내가사는 박심리에 올라가지 못했죠. 지금 보이는 그 길을 지나 4Km는 더 가파른길을 올라가야 했지요.
우린 박심리에서 걸어서 학교를 그렇게...
그렇게 열악한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는데, 난 지금도 철길을보면 그 힘들고 아팠던 시절이 생각나
고개를 돌리곤 했답니다. 사북사태가 일어 났을때는 김진용후배님이 아주 어렸는데, 이렇게 역사를 손바닥보듯 설명하시니 새롭습니다. 우리네 가족이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사북사태는 참 무거운 울아부지의 어깨가 생각나지요.
갱 앞에서 촬영한 생생한 사진은 울아부지를 보는것 같군요.에서 겨울이면 얼어붙은 밥한덩이로 끼니를 때우고 그렇게 고르지못한 산소공급과 가셨습니다.
울아부지
연탄먼지로 폐는 엉망이 되셔서 시간이 흘러도 배출되지않고 결국 진폐로 점점
위에서 세번째 사진은 그당시 얼마나 탄광촌이 활발하였는가를 사택이 여실히 보여주는군요.
판자처럼 만들어진 저 집들이 사람사는곳이었고, 그곳에는 살아있는 아이들의 소리, 꿈많은 소년소녀들이 많이 살았더랬죠...
지금의 우리나라 근대사 그중에 대한민국 근대사중 산업현대화의 여러 촉석중 필요했던
에너지원의 하나가 석탄이라 할수있엇죠 물론 지금도 석탄은 매우 중요한 위치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탄이 일반 국민들의 생활에서 멀어젓다는것 뿐이지 지금도 우리산업 깊속이 지리 매김하고 있고
더 큰 위치에서 국민과 국가의 건강함에 일익을 담당하죠 ?
다만 위의글 처럼 험한 일을 안할려고 하고 생산성에서 미치지못하니깐 석탄도 호주나 카나다 이웃 러시아 ,중국등에서
수입에 의존하지만 사라지는 자원의 보고라 할수있는 우리석탄의 내력을 일반인들 에게서 멀어지는게 현실이죠 ...
저는 가끔 글을 만듭니다.
박심리에서 내가 어릴적 보았던 그 아픈 추억을...
울언니 무지 싫어하지요. 아픈거는 꺼 내지 말라구, 청승맞다구...
어쩜 그 아픈추억을 다시 꺼내서 씻으면 덜 아프지 않을까 란 생각에...
후배님이 오셔서 이렇게 들춰내주시니 좀 시원하네요...역사속에 묻혀버린 우리들의 아픈 추억들....
힘겨운 노력으로 도약적 발전한 다른 여러 산업과 마찬가지로 우리 석탄 산업도 또다른 꿈의 미래가 그려 질줄 믿습니다 !
맞아요. 중갈래라고 하는데죠. 선배님 눈썰미도 좋으세요.^^
사북사태를 어렴푸시 기억하고 있어요. 지역사는 나중에 배웠구요. 역사를 모르면 동네를 부끄러워하게 되죠. 아이들이 동네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는건 어른들이 잘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희 동네에 카지노가 들어 오면서 많이 각박해지고 있는데요. 카지노 딜러보다는 얼굴에 탄때 묻은 아버지의 얼굴이 더 자랑스럽다는걸 알게 해야합니다.
김진용님 어른은 어른인데
어떤시간이 가장 촬영하기에 적절한지
위의글을 보니 나보다 더 마음이 깊은 생각이 깊은 어른인것 같이 느껴져요...
이번 야생화축제에 승용차는 만항까지 못가지요
차량을 어느공간에 세워두고 트래킹하는건지 아님 셔틀버스가 준비돼 있는지
궁굼합니다. 그리고 만항 야생화 촬영하려면 하루
알려주면 고맙겠어요...
슬픔과 아픔이 녹아있는 탄광
지금도 탄광속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