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양라면골드'를 추억하며 > 가끔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걸쳐 살았던 한국 사람들에게 ‘라면’은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한국인 제 2의 주식’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스럽게 들리지 않고 ‘가난한 날의 행복’이든 ‘나만의 행복 레시피’든 5천만 인구 거개가 라면에 얽힌 추억을 아니 가진 이가 없을 정도의 음식, 가장 저렴하게 한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가성비 으뜸에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라면 끓이는 냄새’의 원천. “라면 먹고 갈래요?” 하는 매우 한국적인 러브 메시지를 창조했고, “아무렴 내가 라면만 먹고 뛰었겠냐.” 하며 본인이 아무리 부인해도 “라면 먹고 금메달 딴 육상 소녀 임춘애”에게 면발로 된 월계관을 씌운 슈파파워. 언젠가 예비군 훈련 도중 시커먼 남정네들이 몸에 안 맞는 군복 입고 단추 몇 개 풀고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는데 주제가 진중(陣中) 라면으로 흘렀다. 혹한기 훈련 때 반합에 끓여먹은 라면이며, M16에 발가락 걸고 죽으려는 참이었는데 선임하사가 끓여온 라면 맛에 그만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는 고문관에, 불을 구할 데가 없어서 낙엽 태워 라면 끓여먹다가 산불 낼 뻔 하고 인생 종 칠 뻔한 사연 등등이 만두 속 두부와 고기와 당면과 김치처럼 치대지고 비벼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라도 말을 참 찰지게 쓰는 예비군이 나섰다. “그. 나에겐 말이여. 인생 최고으 라면이 인생 최악으 라면이제.” “뭔 소리에요?” “막 자대배치 받았는디 말이여. 허벌나게 구르고 깨지고 몇 대 맞고 점호 끝나고 해골을 눕혔는데 고참이 불러. 창고 뒤로 가잔디 아 또 맞나 싶어서 눈앞이 캄캄했당게. 강께로 왕고들이 버너에다가 라면을 팔팔하니 끓이고 있더라고. 아 그... 회가 동한다는 말이 뱃속에 회충이 움직인다는 말이람서요. 그날 그 으미를 알겄더라고. 아주 배속에서 지진이 나는 거 같었어. 내 그렇게 맛있게 묵은 라면은 이전에도 웂고 이후로도 웂소.” “근데 왜 그게 최악의 라면이에요?” “왜기는! 망할 놈의 고참 작것들이 면발 묵을 때는 숟가락만 주고 국물 묵을 때는 젓가락만 줬당게. 와따메 나 그날 총만 있었으면 그것들 다 쏴불고 라면 다 퍼먹고 죽었을 것이여.” 훌륭한 돈까스든 죽여주는 냉면이든 무슨 아롱사태에 불도장이든 뭐든 저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로망은 존재하고 거기에 대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면 대개 군침이 생성되긴 하지만 라면 얘기할 때의 군침의 공감대는 실로 넓고도 깊어서 다른 음식이 감히 범접하기 어렵다. 전라도 사투리 예비군의 분노에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 전부가 폭풍 공감했다. “아 싸가지없는 새끼들 라면 가지고... ” “어우 나 같았으면 그냥 아구통 날리고 영창 갔어.” “진짜 한맺힌 라면이구만.” 심지어 방위였기에 퇴근 뒤에 끓여 먹으면 그만이었을 나에게조차 절절하게 그 한이 전달되는 게 아닌가. 군용 수저 포크로 면발 토막내서 먹으며 눈물짓는 이등병.... 아이고 확 마. 거기 모여 있던 대여섯 명의 예비군들은 다 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훈련 뒤 구파발 전철역 근처에서 라면을 먹고 헤어지는 것으로 일심단결의 대오를 꾸렸고 그들의 일행들이 두셋씩 따라붙으면서 어영부영 2개 분대 정도가 꾸려져 지금은 흔적도 없을 구파발역의 어느 분식집을 장악하고 치열한 라면 섬멸전을 치렀다. <긴급출동 SOS 24> PD 노릇을 하면서 ‘생활수급자’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무의식중에 ‘생보자’라는 말을 써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있어서 그들에게 이런 저런 공적 지원이 있었는데 그를 줄인 ‘생보자’라는 말이 너무 익숙했던 탓이다. 당시 선생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조회나 종례 때 ‘생보자 손 들어’ 해서 대놓고 인원을 수시로 파악했기 때문에 귀에 틀어박히기도 했을 것이고.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반에 한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잘 기억 안나니 영식이라고 해 두자. 동네 친구는 아니어서 자주 본 친구는 아니었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다. 녀석은 ‘생보자’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집을 나갔나 해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운동도 그저 그랬던, 그렇다고 말썽을 부리지도 않아서 눈에 띄지도 않았던, 그야말로 너무 평범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친구였다. 오히려 그 아버지가 가끔 술을 드시고 학교에 찾아와서 엉엉 울고 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선생님들에 따르면 ‘신세 한탄’을 했다고 하는데 무슨 한탄을 했는지 역시 알 길이 없고. 그런데 어느 날 덜컥 영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소식을 가져온 친구의 멘트는 무척이나 서늘한 것이었다. “영식이 마 고아 대삤다.(돼 버렸다.)” 아이들에게 ‘아빠 엄마가 없다’는 것은 가늠하기 어려운 공포일 것이다. 날 때부터 고아인 사람은 없겠으나 나면서부터 고아인 사람은 많았고 그들을 위한 ‘고아원’은 주변에 꽤 있었다. 그런데 부모가 있다가 사라진 경우는 그 나이 때로는 처음이었다. 영식이는 고아다. 워낙 가난한 집이었고 친척도 없다 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돈과 선물(?) 밝히고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했던, 시장에서 술 처먹고 학부형에게 전화해서 “한 잔 하입시데이.” 했던 진상, 그래서 내가 ‘교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초장에 말려 버렸던 사람이었지만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방에서 시신 썩어들어가던 상황에 개입해 장례를 주관하고 ‘당감동’ (당시 부산의 화장장이 있던 동네)까지 다녀왔었다. 덕분에 뒷자리의 머리 굵은 초딩들에게 ‘선생은 선생이네.’ 하는 욕 비슷한 칭찬을 들었다. 반 아아이들에게 강제적인 ‘불우이웃돕기’를 시행하면서 아이들에게 내리친 호통은 그 진상 선생님이 보여 준 몇 안되는 가르침이었다. “니 옆에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알고, 니 친구가 슬프면 같이 울어 줄 줄 아는 기 사람이다.” 뭐 그 뒤에 ‘그라이까 돈 내라’가 생략됐다고 해도 연설만큼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모금한 돈을 들고였나 다른 목적이었나 몇몇 아이들과 함께 영식이 집에 갔었다. 어린이 회관 소풍 가던 길 어느 골목엔가 있던 실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영식이와 말을 섞어 본 것도 그때가 처음 내지는 두 번째였을 것 같다. 녀석이나 우리나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이제 무슨 일이 닥칠지도 그저 캄캄하기만 했으니까. 그저 힘내라는 말과 고맙다는 말의 반복. 그러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려는데 영식이가 손을 저었다. “야. 뭐 묵고 가라.” 고아가 된 친구 집에 와서 뭘 얻어먹는단 말인가. 일제히 “아이다!” 하면서 고개를 젓는데 영식이가 견결한 말투로 채근해 왔다. “묵고 가라. 내 혼자 묵어야 되는데.” 그 말에는 도리가 없었다. 전부 엉덩방아를 찧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근데 밥이라도 있을까. 미심쩍어하는 눈빛들 앞에서 갑자기 영식이가 맑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에 별식이 있다. 어제 동회(동사무소)에서 갖다 줬다.” 녀석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더니 박스 하나를 번쩍 들고 들어왔다. 그러면서 외침. “골드다 골드. 그냥 라면이 아이다. 삼양라면 골드다.” 주황색 삼양라면보다 두어 배는 비쌌던 특별한(?) 라면이긴 했다. 영식이는 그 골드를 치켜들었고 반 친구들은 처음에는 어색하게 환호했다. 그래봐야 라면인데......플러스 어 나 못먹어 본 건데? 곱하기 ‘일단 한 번 드셔보시라니까요’의 조합. 삼양라면 골드 CF의 핵심은 ‘해물이 많이 들어간다’였다. ‘오징어 조개 홍합 미역.......’하면서 라면에 들어간다는 해물이 줄줄이 나열됐다. 영식이는 골드를 끓이면서 그걸 열 번도 더 읊었다. “여기에 오징어 조개 홍합 미역..... 이 다 들어간다 아이가.” 고아가 된 반 친구 집에 와서 우리들은 외레 녀석의 살림을 엄청나게 축내고 갔다.처음에는 인원 수대로 끓였는데 그게 게눈 감추듯 없어지자 녀석이 더 묵자고 외쳤고 아무도 “댔다. 고마(됐다 이제)”를 부르짖지 않은 것이다. 인당 라면 두 개 씩은 먹고서 띵띵해진 배를 두드리며 영식이 집을 나서는데 영식이가 배웅을 나왔다. 영식아 잘 있어라. 응 잘 가라. 누군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골드!” 그러자 영식이가 활짝 웃으며 (그리 활짝 웃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주먹을 들어올렸다. ‘골드!’ 그 삼양라면골드가 한정판인지 뭔지 모르지만 다시 출시됐다고 한다. 라면이라면 질색을 하는 아내이지만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삼양라면 골드를 한 번 다시 먹어 봐야겠다. 어떻게 끓여도 그날 영식이 집 옹색한 방구석에서 둘러앉아 먹던 그 맛이야 나겠냐마는 40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부활한 맛이라면 그 자체로 ‘역사의 맛’이 아니겠는가. 우리 역사의 맛을 즐겨 봅시다. [김형민 SBS P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