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142] 모더니스트 정진국, 르코르뷔지에를 사숙(私淑)하다(中)
매일경제 2022.09.02
[효효 아키텍트-142] 지난달 정년 퇴임한 정진국 건축가는 자신의 모교이자 많은 제자를 길러낸 한양대와는 작품으로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박화영 음악관(2021~2024 예정)은 한양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한 기부자의 이름을 땄다.
박화영 음악관 투시원근도 / 사진제공 = 정진국 건축가
어디에 건물을 지을 것인지부터 고민이 되었다. 서울캠퍼스에서 가용 면적을 확보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한양 둘레 길과 음악 대학이 만나는 장소가 음악관 용지로 결정됐다. 설계는 두 가지 구축 질서를 개념화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는 음악대학의 입구, 정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주변 건물들을 포용하도록 수평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구축 질서는 수직과 수평, 주변과 중심, 고밀도와 저밀도와의 관계 등의 조화를 통해 조형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 모더니즘
19세기 1차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는 미술공예운동을 주창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의 주체이자 소비자인 인간이 소외되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일상적 노동의 즐거움은 과거에 인민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억압에 대해 그들을 위로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중산계급의 물질적 번영을 위해 그러한 즐거움, 즉 예술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너무나도 큰 희생이었습니다. (166쪽) / 이상 <모리스 예술론>, 박홍규 옮김 페테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는 근대 미술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동시대 인물이다. 기업의 이미지와 생산 제품을 통합하는 CI(Corporate Identity) 개념을 확립하는 등 기능주의 디자인의 서막을 열었으며 1914년부터는 건축가로서 활동하였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지 않았다.
1911년, 스물네 살의 르코르뷔지에는 친구와 함께 5월부터 10월까지 보헤미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를 여행한다. 그 여정에서 느낀 인상을 기록하였다. 숱한 데생을 하면서 사물을 보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 여행 후 54년이 흐르고 다시 사후 1년이 지난 1966년 '동방여행(Le Voyage d'Orient)'으로 출간되었다.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500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고 1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는 장식미술 운동인 아르누보(새로운 예술·Art Nouvaux)가 일어난다. 독일에서는 1919년 바우하우스(BAUHAUS)가 설립됐으나 그 이념과 교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모더니즘은 보다 많은 제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풍요롭게 하였으나 그 폐해도 있었다. 이미 19세기에 윌리엄 모리스는 이를 경고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ous, 1883∼1969)가 설립한 이래 건축·염직·그래픽·산업디자인·타이포그래피·연극·무용 등을 통합해 실험했고, 이를 시각종합체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조형은 합리성에 기초한 기능적이고 기하학적이며 순수한 형태였다. 장식을 배제, 일상용품이나 이미지의 디자인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바우하우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 민주화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나치에 의해 폐교되었다. 근대적 아방가르드들의 지향점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나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정진국은 건축이론가로서, 르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이 미국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얘기한다.
193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현대건축 : 국제전시회(Modern Architecture: International Exhibition)'가 열린다. 기획자는 당시 미술관장인 앨프리드 H 바와 헨리 러셀 히치콕(Henry Russel Hitchcock·1903~1987), 그리고 당시 23세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1906~2005)이었다. 전시회는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유럽에서 건너온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로에, 그리고 르코르뷔지에에 중점을 두었다.
전시회와 함께 히치콕·필립 존슨의 공저 '국제양식 : 1922년 이후의 건축(International Style: Architecture Since 1922)'이 출간되어 새로운 건축의 규범, 즉 볼륨, 규칙성, 부가장식의 제거 등을 주장했다. 유럽의 근대건축 양식의 형태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은 순식간에 근대건축과 동일시되었다. 이렇게 축소된 양식적 근대성은 미국 사회에 빠르게 수용되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국가적 위상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파급되었다.
◆ 건축은 디자인이 아니다
정진국은, "미국인들에게는 '국제 양식'이 모더니즘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이후 건축을 디자인의 한 영역으로 취급, 건축을 '빌딩 디자인( Building Design)'으로 보는 등 유럽의 근대주의를 왜곡시켰다고 비판한다. 유럽의 시각, 본질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디자인이 진보적이고 발전적'이라는 사고도 잘못되었다고 본다. 유럽에서의 3대 예술은 여전히 회화, 건축, 조각이다. 건축이 예술 영역이라는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르코르뷔지에의 사유> 표지 / 사진 제공 = 정진국 건축가
<장소와 공간에 관심을 두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건설자(constricteur)로서의 노력이다. 건설자는 분명히 축조예술을 위해 양손, 즉 공학자의 왼손과 건축가의 오른손 사이를 부지런한 대화를 통해서 친근하게 연결시키는 새로운 직업이다.> (르코르뷔지에의 사유 p 35/ 정진국 번역)
건축적 다색채 사부아 저택 모형(1990년 제작) / 사진 제공 = 정진국 건축가
정진국은 이 문장을 주석을 통해 말하고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한 번도 건축을 디자인의 영역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 중 하나는 중력이며, 따라서 형태보다 구조를 더 앞에 위치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이십세기 근대건축가들도 건축은 축조 예술이며 무엇보다 건설(construction) 또는 구축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건축가 정진국의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갤러리 '소금항아리'(2010)는 건물의 정면 방향이 남쪽이지만 언덕으로 막혀서 자연광의 혜택이 적다고 판단했다. 건물이 지어진 후 배면 방향의 북쪽은 더욱 어두워지게 된다.
갤러리는 최대한 개방적이되 빛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감지하도록 개념화했다. 공간의 질은 지속 가능 여부가 결정하기에 건물을 관통하는 공간적 장치로써 부정 요인을 제거했다. 남쪽의 빛이 북쪽에서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소금항아리 / 사진 제공 = 정진국 건축가
1933년 마르세유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기선에서 열린 네 번째 근대건축국제회의(CIAM) 의결사항으로 채택된 <아테네 헌장>은 현대 도시계획의 원칙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우하우스 핵심 구성원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의 미술과 건축은 미국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디자인이라는 말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0~1960년대에 걸친 새로운 생활양식의 디자인 운동 시기를 '미드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이라고 한다.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1910~1961) 등 건축가들도 여기에 속한다. 페테 베렌스 세대와 마찬가지로 회화, 건축, 가구 디자인 등이 버무려졌다.
정진국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더니즘의 발상지는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사실이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미국 내 모더니즘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1856 ~1924)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명제로 대표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는 설리번의 시카고 사무실에서 일했다.
1970년대 초 뉴욕에 기반을 둔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 1934~ ), 피터 아이젠먼(Peter Eisenman·1932년~)등은 '파이브 아키텍트(Five Architects)'라는 책 출판 후 '뉴욕 5'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다섯 명은 초기에는 모던건축의 색깔을 띠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서로 다른 방향을 찾았다.
리처드 마이어는 시종일관 백색건축을 하면서 르코르뷔지에의 적통임을 자임했다. 리처드 마이어는 르코르뷔지에의 최적 조화 개념에 더해 자신만의 추상 픽처레스크(pictureque·'그림 같은', '독립적 볼륨들의 비대칭적 구성') 건축으로 전환시켰다.
미국에서 등장한 '단순한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는 명제의 필립 존슨과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1925~2018)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르코르뷔지에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House is a machine for living)'는 명제의 모더니즘에 반응·대립하는 개념이다.
정진국이 건축 공부를 시작한 1970년대 중반 한국은 미국에서 건너온 포스트모더니즘이 막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부정에서 시작한다. 이 흐름은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한 건축학도에게는 모더니즘의 유산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듯했다. 모더니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겼다.
1970년대 한양대학 공과대학은 건축공학과와 건축학과를 두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건축의장학과가 있었다. 의장(意匠), 도안(圖案) 등 일본에서 건너온 용어와 사고가 학계와 업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장(意匠)과 도안은 '디자인'을 뜻하기도 했다. 정진국은 당시 대학들은 건축학과에 정체성이 없었다 말한다.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되었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김훈 소설 '하얼빈' 작가의 말 중에서>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