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를 위한 혁명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 왕은 안식일을 존중하고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성직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을 펴서 청교도들로부터 상당한 불만을 샀다.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국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대중 집회를 금지하자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은 신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게 되었다. 1608년에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네덜란드로 떠났지만 그들의 꿈은 여전히 신대륙에 있었다. 마침내 1620년 102명의 분리주의들이 신대륙을 향해서 대서양을 건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한 그들을 일컬어서 사람들은 순례자들(Pilgrims)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순례자들은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을까? 그러지 못했다는 게 결론이다. 순례자들이 처음에 정박하려고 했던 곳은 매사추세츠가 아니라 영국의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를 기리기 위해서 이름을 따온 버지니아였다. 태풍을 만나게 된 메이플라워호는 배를 잘못 조정하는 바람에 원하는 지점을 지나쳐서 그만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순례자들은 처음 닻을 내린 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20년 12월 순례자들 가운데 41명이 메이플라워 계약을 초안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으로서 다수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이탈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신대륙에서의 실험
1630년에는 청교도들이 건설하던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존 윈스롭(John Winthrop)의 주도로 플리머스 정착지를 흡수했다. 그렇게 해서 약 1,500명의 청교도들이 메사추세츠 식민지로 옮겨갔다. 그 이후로 영국에서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자 그것에 반발한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먼저 도착한 청교도들이나 순례자들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든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란 것은 영국의 국교회처럼 자신들의 신앙을 기초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자유였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예정된 성도, 혹은 선택을 받은 자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했다. 그들만이 정식 교인이며 투표권을 가진 완전한 시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인 비신자들은 교회에 출석할 수는 있지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이등 시민이었다. 몇 해 동안 청교도들의 이런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게 사실이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오직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비신자들 사이에서 점차 불만이 높아갔다. 최초의 반항자는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ams, 1603-1683)였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서품을 받았지만 과격한 혁명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영국에서 추방당해서 1631년에 뉴잉글랜드로 건너왔다. 세일럼의 목사로 취임한 로저는 청교도들과 달리 교회와 국가의 통합을 격렬히 공격하면서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를 거듭 제기했다. 아울러서 그는 정부가 모든 교파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은 그의 문제제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저가 원주민들에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원주민들"이고, 백인들이 불법으로 토지를 점유하고 있다고 설교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메사추세츠 공회는 1635년에 로저 윌리엄스의 추방을 결의했다. 당시 그의 딸은 두 살이었고 아내는 임신을 한 상태였으나 그들을 모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 로저는 14주 동안 얼어붙은 동부지역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인디언들은 처음에 순례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로저에게도 호의를 베풀고서 메사추세츠 주 경계 너머의 땅을 제공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이 그곳으로 합류했다. 로저는 그곳에 프로비던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로비던스에서는 어떤 신앙을 갖더라도 전혜 문제될 게 없었다.
164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최초의 로드아일랜드의 총독이 된 로저는 특허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식민지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판단을 따를 수 있다." 로저가 보기에 신앙은 개인의 양심과 관계된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신앙이 다른 퀘이커나 유대인들에게까지 별다른 요구 없이 땅을 제공했다.
두 번째 반항자는 14명의 자녀를 둔 앤 허친슨(Anne Hutchinson)이었다. 허친슨은 자신의 집에서 당국이 금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모든 목사들의 설교가 도마 위에 올랐다. 허친슨은 당시 사람들이 입 밖에 내기를 두려워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진리의 척도인 성서를 통해서 조명하는 성령은 물론이고 성서를 넘어서서 각 사람을 조명하는 성령을 내세웠다.
하나님의 은총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내리기 때문에 각 개인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허친슨은 주장했다. 이것은 모든 권위를 성서에 두고 있는 청교도 교회와 사회를 근본부터 흔드는 발언이었다. 바울의 신학에 근거한 그녀의 주장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미리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있다는 예정론과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이 있다는 거룩한 계약론을 부정했다.
1637년 앤의 주장을 심의하기 위해서 성직자 회의가 열렸다. 허친슨의 발언이 더 발전하게 되면 케이커나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처럼 성직자의 필요성을 배제하게 되고, 그러면 메사추세츠의 신정일치 사회가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정은 앤 허치슨을 추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해산을 앞두고 있던 앤 허친슨과 가족들, 그리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한 겨울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인 프로비던스로 급히 도망쳐야 했다. 로드아일랜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작은 식민지였다. 하지만 그 작은 땅덩이에서 어떤 종교든 편애하지 않는 가장 시민의 정부라는 거대한 사상이 잉태하고 있었다. 이 사상은 나중에 미주 지역 전체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게 된다.
식민지의 마녀 사냥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간단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고향을 등지고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까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정착민 1세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그리스도를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소위 '중도계약'이라고 부르는 고육책이었다. 이전까지 교회는 부모 모두 그리스도인이어야만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하지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줄어들고 그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라도 교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중도계약이었는데, 사회에 대한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청교도들의 두 번째 지배전략이었다.
새로운 시도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청교도들은 이런 상황을 식민지를 파괴하려는 악마적 세력의 책동으로 간주했다. 급기야 그런 불만과 두려움이 일거에 분노로 표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1692년 2월 메사추세츠의 세일럼(Salem)에서 집단적인 히스테리가 발생했다. 어느 날 세일럼 교회를 담임하는 패리스 목사의 딸 엘리자베스가 발작하면서 헛소리를 해댔다. 며칠 뒤에는 엘리자베스의 사촌 애비게일과 또 다른 소녀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는 사탄의 짓으로 결론 내렸다.
사탄이 마녀를 시켜서 해코지한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소녀들을 불러다가 심문했다. 아이들은 여성 몇 명을 마녀로 지목했다. 그들이 체포되었지만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소녀들이 계속 늘어갔다. 덕분에 마녀로 지목되는 여성의 숫자도 그만큼 더 늘었고, 그들을 변호하는 남성들까지 체포되었다. 5월말까지 100여 명이 투옥되었고 세일럼 지역을 벗어나서 메사추세츠까지 확대되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으로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죽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마녀 사냥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서 과부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겪다가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생명과 재산을 빼앗겨야 했다. 세일럼의 마녀 사냥은 청교도들이 새로운 식민지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긍정적인 실험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1696년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회개했고, 1711년에는 식민지 정부가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 희생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유죄기록을 삭제했다. 당시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던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들이 내뱉은 한 마디 때문에 불어 닥친 피바람은 청교도의 이상을 퇴색시켰고, 결국에는 1700년대 초반에 청교도의 뜨거운 신앙이 소멸하면서 영적 공백을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