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이…./사순 제 5주일 나해
사순 제5주일(나해)
저희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이….
필자는 지난 3월 14일 신자들과 함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원 희망의 성지 순례를 청양다락골 최양업 신부 탄생지와 솔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지를 각각 다녀왔다. 원주에서 버스 6대, 제천에서 버스4대에 사제들과 신자들이 각각 탑승, 순례를 했으니 매머드급 순례였다. 특히 이날은 최양업 신부님 후손인 최기식,김영진 원로사제와 신현만 신부와 함께 했으나 더욱 의미가 깊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피의 순교자였다면 최 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 언급되는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는 어쩌면 두 분의 신부님들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는데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최양업 신부가 부제품을 받기 전 소팔가자에서 1844년 5월 19일 스승인 로그레즈와 신부님께 보낸 두번 째 편지를 보면 그가 성직자가 되기 전부터 얼마나 당시 조선 교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을 잘 헤아릴 수 있다.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 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부모의 순교 소식을 들음)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는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엄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강원도, 경기도 부평, 안양시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1836년 2월 6일 경기도에서 살고 있던 15살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다. 이후 마카오 파발꾼이 신학생들을 데리고 마카오까지 갔다. 1837년 6월 7일, 6개월이 넘는 고생 끝에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시련이 곧 닥쳐왔다. 마카오 민란으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다.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른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4년 12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과 병오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되었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다. 최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 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 이라고 썼다. 최 신부가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했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 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40살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년 6개월 만이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성지에 안장됐다.
실로 그의 생애야말로 땅에 떨어진 밀알로써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요한 12,20-33)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그가 성대하게 입성을 했던 예루살렘에 와 계신다. 유다의 큰 명절에 거기에 와 있던 몇몇 그리스인들은 아마도 그들이 본 사실에 감동되어 필립보에게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상의한 뒤 예수님께 이 말을 전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직접적인 응답을 주시지 않고 오늘 성경에 있는 말씀을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요한 12,24-26)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 곧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비트 미들러의 "장미(The Rose)" (봄이 오면 햇빛을 받으며 장미로 피어날 씨앗을 품고 지독한 눈에 덮인 겨울을 생각하세요.)라는 감미로운 노래 가사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될 때 우리는 새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 2독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을 것”이다(히브리 5,7). 우리는 오늘 사순 제 5주일을 보내면서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 해주리라.”(예레 31,34) 라고 하시며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예레 31,33)이라고 하신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바쳐 썩는 밀알이 되도록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다. 그리하여 남은 사순절을 잘 보내고 주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