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과 왕험성 이해하기
중국정사 <사기><조선열전> 주석, 왕검성과 왕 험 성 이해하기
고조선의 왕도였던 도읍의 명칭을 놓고 왕검성과 왕험성을 구분하지 못하여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단군을 호칭할 때 단군왕검이라 하였으니 왕검성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고,
오히려 왕험성이라는 지명이 틀릴 듯 싶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검이나 왕 험 이 같은 뜻이 아니냐고 물어오면 시기와 장소가 다른 점을 설명해야 됩니다.
왕검성은 연 나라의 진 개 장군에게 패퇴하기 전, 요동군의 험독현(요동만에 있던 수몰 추정지역)에 있던
구 왕도를 말하는 것이고,
왕 험 성은 위만이 정권을 인수하여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는 역시 물이 험한 곳에 세운 위만조선의
왕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 왕이 물러난 구 왕검성이 최초의 왕도는 아니고, 오히려 나중에 세운 왕 험 성이 최초의 선인
왕검의 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왕도가 몇 번인가 옮겨졌다고 봐야 합니다.
이 글의 말미에 달린 위만조선의 왕 험 성 위치가 대동강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서영수 교수의 결론은 그가 앞에 설명한 글들과는 너무나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아 수긍하기가 어렵습
니다.
평양의 대동강에 무슨 험한 물 흐름이 있어 험독이라고 불렸을까요.
왕험성은 패수 이동, 진고 공지 이남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동쪽으로 천 여리나 떨어진 북한의 대동강
평양이라고 한다면 수긍이 되는 얘기입니까?
서 영수교수는 진고 공지와 만번한을 천산 이서, 요하 이동으로 주장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패수가 평양
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 영수 교수의 만 번 한에 관한 글입니다.
전략… 《사기》와 《위 략》의 고조선 관계를 종합해 보면, 연은 장군 진 개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동호와
조선을 치고 2천리의 땅을 개척하여 상 곡, 어 양, 우 북 평, 요서, 요동의 5군을 설치하였으며, 조선과는
만 번 한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이를 《사기》 조 선전 기사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만 번 한은 장 새, 즉 요동 고새 밖의 자연계 선을 의미
하며, 《한서》 지 리 지의 요동군의 속 현인 문현과 번 한 현에 해당한다.
문현이 요동의 천산 산맥 서남쪽의 지명인 것으로 보아 번한 현도 이와 관련된 지명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천산(千 山)에 이르는 서쪽 땅 1천리(연이 동호로부터 획득한 땅 1천리
를 제외한 지역)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 선인 천산 산맥(千 山 山脈)
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동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면서 연의 요동진출지역이 이와 같이 모호하게 기술된 것은 사실상 연대
에는 아직 요동의 군현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기》 조선전의 사료(A) 부분에서 연이 복속시켰다는 조선은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이로부터 거꾸로 추정하면 BC 3세기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대체로 서쪽으로 대능하 유역
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고조선의 위치와 강 역에서 인용끝.
그러나 만약에 천산이서에 설치한 진고 공지의 위치를 자연계선인 천산을 넘어 100 여리를 월선 하였었던
지점으로 동진 배치하여 평양의 북쪽으로 간주한다면 압록강의 북쪽방면까지 진나라가 진출하였었다는
해괴한 이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천산을 기준한 동서의
100여리라고 하면 천산주변을 말하는것이지 압록강근처까지 접근할 수 는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주석을 보시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한 서 영수 교수의 견해입니다.
이 글은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1) 30쪽의 16) 왕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 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왕검으로 표기)의 위치에 대하여 <사기 집 해>
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창려유 험독현야)' 라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고,
<사기 색은>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 험 독 현 조선왕 구도)라는 응 소의 주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 험독의 주에는 '조선왕 만도야' 의 수험 고 왈 험독 (朝 鮮 王 滿都也
依水險 故 曰 險瀆)' 이라는 응소의 견해와 ' 왕험성 재 낙랑 군 패수지동 차 자시 험독야' (王險城在
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라는 신찬의 해석이 부기 되어 있다.
왕험성의 위치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한 사군의 위치
비정 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왕 험 성의 위치는 현 평양으로, 또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위치는 한 반도 북부로 이해되어 왔다. (정약용, <<여 유 당 전서>><강
역 고> 조 선고)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 현인 험독을 조선계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인 검독(儉 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왕 험 성에 비정하여 고 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 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현 蓋平(개평)지방으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 83~96)
그러나 왕 험 성은 패수 이동, 진고 공지 이남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 조 선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 현이 왕검성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사기 색은>에서 왕험성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 <사기 집 해>에서 서광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요동의 험독으로 비정 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조선의 이동설에 의하면 험독은 고 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 조선의 도읍
은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 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기>>의 왕 험 성은 진 고 공지 이남에 있는 것이 분명
하므로 고 조선이 요동의 험독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 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서 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 역>) (인용 끝)
서 영수교수의 위 글중에서 다음에 제시하는 문단은 재검토가 요구되는 글입니다.
요점은 왕 험성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관계가 될 수 없는 요동군 험독현에 있던 조선왕의 구도인 왕검성을
설명한것이 잘못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한 <사기> <집해>와 <사기> <색은> 에서 '昌黎有險
瀆縣也(창려유 험독현야)' 라는 서광의 말과,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 험 독 현 조선왕 구도)라는
응 소의 주를 인용한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석을 잘못 인용 한것이 오히려 왕험성을
인식시키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요지입니다.
그렇다면 서교수의 글중에서 또 하나의 잘못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 현이 왕검성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은 "따라서 요동군 험 독현이 왕험성이 될 수 없는것이며"라고 수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위만의 왕 험성의 위치는 신찬의 주석대로 [' 왕 험 성 재, 낙랑 군 패 수지동, 차 자시 험 독 야'
(王險城在 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라고 해석해야 되는데,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북한에 있는 평양 주변을 흐르는 큰
물은 대동강 뿐인데 대동강의 동쪽에 한나라와 약 일년 이상을 대치
하며 버틸 수 있는 강력한 방어력을 갗춘 왕험성이 있었다니, 이 와같은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론은
당연 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서 영수교수의 요동에 있던 험독이 북한의 평양으로 이동되었다는 왕험성 이동설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사진설명 추가 : 용머리를 세워 왼쪽은 발해 , 오른쪽은 황해로 표시하였다는 설명은 위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듣고 상상만 하던 왕험성을 지키고 있던 험독이라는 물이 이 곳이라는 설명은 드리지못했
습니다.바다를 건너 처음 보이는 오른쪽의 산이 남장산도 입니다.
그리고
왼쪽으로 많은 건물들이 늘어선 희미하게 보이는 도심이 장도입니다.
등주 봉래에서 장도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7Km 이지만 배가 닿는 선착창까지는 약 12Km가 됩니다.
이 곳은 지금도 물결이 세어서 (마치 울돌목 처럼) 오늘날 성능좋은 여객선으로 건너는데도 약 45분이
걸립니다.
성읍의 지형과 구 왕검성의 위치
<사기> 의 주석에 등장하는 요동군 험독현의 구 왕검성은 어디쯤일까요. 사서를 통하여 해설만 있을 뿐 그 위치는
잡힌게 없었습니다. 험한 물을 방패삼아 성읍을 이루었던 왕검성이 있을만 한 곳을 찾아봅니다. 우선 아래지도에서 영원 . 금주 . 의주 . 광령등의 위치를 찾아보시고, 그 주변으로 감싸고 있는 Y자 형태의 강물 흐름을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역활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번에는 첫번째 지도의 1번으로 표시된 원의 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지도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 곳에는 지형상으로 성읍이 있어야 될 곳인데 성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 니다. 그런데 위 지도의 원의 왼쪽에 있는 작은 Y자의 위치안에 있던 성의 이름을 아래지도의 바다에 있는 각화도라는 섬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각화도라는 섬에는 영원성이 있었다가 뒷날 물길로 변했다는 기록이 달려 있습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는것처럼 처음에는 이 각화도도 섬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영원성, 그리고 요나라가 송과 고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이용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각화도와 발해해협에 있는 황성도와의 접근을 볼수 있고 고구려가 처음 요동군을 남겨놓은체 요서쪽 으로 진출하여 열개의 성을 쌓았다는 수수께끼도 풀릴 수 있을듯 합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궁금한 해자 모양이 남아 있습니다. 위 지도의 1번 안에 있는 큰모양의 Y자 합수입니다. 이 지역은 제법 넓은 지역이어서 구 왕검성이 있었을듯한 위치와 규모인데 명문으로 된 자료를 찾기가 어렵군요. 물이 흐르던 방향으로 보아 소 요수와 대 요수가 합수되던 요동군의 험독현이 혹시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좋은 의견 있으시면 글을 올려 주십시요. 이 곳은 처음 고조선의 진번조선 이었다가 연나라에게 망한뒤로 진나라에게 또 한 나라에게로 넘어가는 비운을 거쳐 공손강의 요동국을 지나고 고구려에게 수복되었다가 선비를 거쳐 거란으로 또 요 나라로 이름이 바뀌는 순서를 밟았습니다. 나라라고 사서가 적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 나라산하에 있던 이 근역의 지명들이 많이 이동된걸 볼 수 있습니다. 요사遼史 권卷37 지志 제第 7,지리지地理志 1 百 一 十 四 里 。 南 控 黃 龍, 北 帶 潢 水 , 冷 陘 屏 右 , 遼 河 塹 左 。 高 原 多 榆 柳 , 下 隰 饒 蒲 葦 。 當 元 魏 時 , 有 地 數 百 里 。 至 唐 , 大 賀 氏 蠶 食 扶 餘 、 室 韋 、 奚 、 靺 鞨 之 區 , 地 方 二 千 餘 里 。 貞 觀 三 年 ,以 其 地 置 玄 州 。 尋 置 松 漠 都 督 府 요택 내에 거주했으며, 1,130 리를 가면 유관이 있고, 이곳에서 또 714 리를 가면 유주다.(북경) 사방 2 천리였다. 당 정관 3 년에 이 땅에 현주를 설치하고, (찾아) 송막 도독부를 설치했다. (尋置)가 무슨뜻인지가 궁금합니다. 필자주 창려지도 읽기
산넘고 물건너 삼한땅으로 가는 길 |
수많은 열국들이 세워지고 거의 구멍가계 단위의 나라들이 난립 하였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사정을 상상 하기는 어려 웠던 게 사실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대로 상상할라 치면 엄청나게 넓은 땅이 필요 했을 것 같은데, 현지의 땅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백 여리단위로 분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 땅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이동 되었을 것으로 믿어 왔던 통설들은 이제 그
경로를 변경해야 될 시기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진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기치를 올 렸 을 때 요동반도의 서쪽에 있던 개주(진, 번한)의 백성들이 마한의 지주인 대장군 탁(卓)의 뒤를 따라 넘어오던 길이 있었습니다. 요동반도의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오는 길을 바닷길로 왔 을 줄 알았었는데 위험하고 먼 바닷길을 버리고 개마대산을 넘어오는 아주 가까운 길 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살수에는 고조선시대부터 조선소가 있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왜 조선소가 여기에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순서는 뒤로 미루고 우선 그 길을 먼저 소개 올립니다. 이 길은 고조선 이후의 열국들을 탄생시킨 삼한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고기 북부여기 상> 2세 단군 모 수리 재위 35년
정미원년(B,C 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
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 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 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 제께서 상장 연타 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 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단 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 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 랑 왕 최 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 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 처람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 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 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 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 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
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
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戊申二年帝遣上將延 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
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十五
年帝崩太子高奚斯立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國
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다시 개주현으로 돌아가서, 이곳을 알고보면 고조선시대부터의 수수께끼들이 무척이나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한단고기>의 북부여기 상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비사성의 전 이름은 해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성이었고,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부여의 4세 고우루간에 있었던 전쟁 얘기입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B,C 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토록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 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걸려도 이기지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병력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왔다.] 하략
[四世檀君 高于婁(一云解于婁) 在位三十四年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
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甲子四年帝遣將攻
海城三月而不克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하략
이상의 글을 통해서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내륙의 발판인 개주를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되었고, 반대로
부여왕은 우거의 진출에 위험을 느낀 남어지 수시로 우 거의 내륙 진출을 막기 위하여 전쟁을 벌렸던 사실
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될것은 개주에서 멀지않은 곳에 살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개주에서 동으로 건안성을 지나면 봉황성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길의 중간쯤에서 요동반도의 남쪽인
요해로 흐르는 벽류하를 만나게되고, 이 물길을 따라가면 봉황성
으로 빠지지않코 피구라는 항구로 빠져 요해로 통하는 길이 됩니다.
이 강이 살수로 추정되는 곳이므로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수나라의 별동군 30만명이 무엇때문에 이 길을 택하였다가 을지문덕 장군의 밥이 되었을까요.
이 외에도 궁금한것들은 많습니다.
변한의 치소로 추정 되던 탕지보가 가까운곳에 있던 사실이 확인되었고, 고조선이 천제를 올리던 고인돌
제사터로 추정되는, 요동에서 제일 크다고하는 석붕산 고인돌도 개주에 있습니다.
이곳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세력을 펼치자 많은 유민들은 개주의 해성을 출발하여 요해의 장산군도로 또는
한반도로 출발 하던곳도 이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 곳을 많은 나라들이 군사요충지로 삼았던
기록들을 볼 수 있고, 지명을 진한(辰韓)또는 진주(辰州)로
하였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장산군도에서 새로운 터를 잡았던 세력들이 거의
이 곳에서 출발하여 왔다는 추정도 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산국의 제철 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부여의 대장군 탁도 이곳에서
출발한것으로 추정이 되고.
이곳이 변한과도 연관이 있을뿐 아니라 주변의 제철 광산들과 연계하면 많은 철관계 문제들이 연계되어
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글을 통하여 고조선후기의 열국들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개주에서 출발한 난민 대열이 '탁'을
따라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요해로 이동하던 길을 강조하여 소개 드렸습니다.
그 길목의 주변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살수가 있었다고 소개드린 것은 사서에 기록된 살수의 위치가 중요한
강역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님들께서 보시기에도 생소한 위치가 될것은 당연하고 또 이러한 주장을 무슨 근거로 하고 있는것인
지도
의아 하실줄 압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께서 믿고 계시던, 살수가 청천강 이었다는 설은 이미 북한으로 부터 무너졌습니다.
북한이 주장하고있는 살수는 필자가 주장하는 위치와는 조금 차이가 날 뿐이지만 정확하게 적중은 못하
였고, 상당히 근거리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보도대로 북한이 살수의 위치를 압록강 북쪽으로 결정 하였다면 그 들은 평양이 고조선의
근거지었다고 주장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을줄
압니다.
봉화성과 평양성을 연계시켜보려고 했던 시도 역시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를리가 없습
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얘기들이 모두 살수가 오늘의 '벽류하'라는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는것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보도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살수대첩 현장은 중국 요동성 일대
<조선일보 2001년6월11일(月) NK리포트 41면>
명장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隋)나라 별동대 30여만 대군을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킨
살수대첩. 세계 전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이
전역(戰役)에 대한 북한의 역사기술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살수대첩이 있었던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612년)으로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모두 지금의 압록강 이북, 즉 중국 요령성 일대라는 것이다.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는 현재 평안남북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황해로 흘러드는 청천강이 아니며,
전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이나 압록수도 지금의 평양이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다.
북한 통사인 『조선전사』 제3권(1979년) '고구려사'에 따르면 살수대첩의 살수는 현재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이다.
또한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떠날 때 건넜던 압록수는 소자하 위쪽에 있는 오늘날의 태자하 하류
(일명 오렬수)이며,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평양성도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현재 봉성)이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도 평양 외에 평양의 북쪽(북평양)과 남쪽(남평양)에 각각 부수도(副首都)를 가지고
있었는데 봉황성은 북평양이었고, 봉황성이란 "임금이 있는 성"이라는 뜻이며 고구려 왕이 있던 왕성
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이곳을 평양(수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살수는 평양성과 압록수 사이에 있었고 오골성(현재 수암) 동쪽, 평양성(봉황성)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었고, 수 나라 장수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때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은 대양하의 지류인 소자하뿐이다.
그러나 1971년 평양에서 발간된 『력사사전』 제2권에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되어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 맨위의 재목을 "요동성일대"에서 요령성일대로 수정해야 옳습니다.
요동성과 살수는 거리가 멉니다. 필자주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살수의 기록입니다.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
<삼국사기>상 <고구려본기> 2
대무신 27년조
대무신 27년(서기 44) 추 9월 한 나라의 광무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
으로 군, 현을 삼으니, 살수의 남쪽이 한나라의 영지가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니 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이
전쟁으로 한달뒤 대무신왕이 서거한것으로 추정됨) 필자주.
그렇다면 살수의 남쪽이 어디일까요? 다시 다음 기록으로 살수의 남쪽을찾아
보시겠습니다.
[15卷-高句麗本紀3-大祖大王-04年]
○四年,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대조대왕 4년(서기 56) 7월,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으로 성읍을 삼으니, 경계가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으로 창해에 이른다라는 해석은 지도를 참조하시면 요동반도의 남쪽 해변에서 동으로는
창해
라는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설만으로는 함흥의 동쪽에 있는 동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다음으로 연결되는 남으로는 살수에
이른다는 기록이 함흥의 동 옥저설을 부정합니다.
참고로 이병도박사의 <한국고대사연구> 269쪽에는 삼한도라는 지도가
있는데 옥저의 위치를 함경남도로
비정하고, 북옥저의 위치를 함경북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경남도의 남쪽은 텅텅빈 바다밖에는 없는데 그 곳이 살수라는 설명이 전연히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천여리 라는 기록도 무시하고 지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방향도 옥저와 북옥저가 맞지를 안습니다.
지도상 함경남도와 북도는 동서간이라야 맞는얘기고, 남 북간은 틀린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전반부에 기록된 2,3,4세의 단제라는 말은 B,C 239년에 헤모수에 의하여 세워진 북부여가 조선의 종주권을
이어가기 위하여 B,C 232년 공화정치를 철폐하고 만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서 조선의 천제로 상징되는 단제라는 칭호는 계속됩니다.
이 들이 위만의 내륙으로의 진출을 막기위하여 싸우다가 B,C 108년 한 무제의 침공이시작되자 북부여의
내륙에도 의병들이 동원되는데 이때 강력한 지도자 고두막한이 구테타를 이르켜 4세 단군 고우루를 동부여로
밀어내고 단제에 오르게 됩니다.
이 후 6세단군 고무서가 졸본천에서 즉위 (기원전 59년)하였으나 다음해에(기원전 58년)유언에 따라
고주몽이 대통을 잇게 됩니다.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