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노우호목사님)

작성자:조아작성시간:2010.04.07 조회수: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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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노우호목사님)
주님의 이름 안에서 문안 드립니다.
작금에 최 00 님께서 저에 대하여 율법주의자라고 글을 올리신 곳이 있어서
몇 말씀 해명차 이 곳을 찾아 왔습니다.
그 동안 최 00 님께서는 저에게 한 마디의 질문도 해 보시지 않으셨고
저를 율법주의자로 매도를 하셨는데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율법 폐기론자도 아닙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는 최 야곱 님도 같을 것이라 믿고 또 같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만약 최 야곱 님께서 율법 폐기론을 주장하시겠다면
이 길고 긴 글을 다 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 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으신다면 다소 힘이 드실지 모르지만 꼭 끝까지 읽어 보시고
또 율법론에 대하여 다른 싸이트에서 혹은 포털 싸이트에서 검색들을 해 보시면
여러 곳에서 율법 폐기론자 혹은 율법주의자들에 관한 글들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율법주의자란 용어에 대하여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저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구약시대에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율법이 주어진 시점
율법은 본래 구원받기 위한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백성답게 하는 법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하라"함과 같습니다.
셋째, 율법의 대상
본래 구약 레위기의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만 맺은 언약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율법이전 즉 아브라함과 같이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보다 더 앞서서 시작되었습니다.
넷째, 율법의 효능
누구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지킬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지켜서 온갖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고
지키지 않으면 온갖 저주를 받게 하신 법이었습니다.
다섯째, 율법의 시효
윤리적인 율법은 인류 역사 종말까지 가는 율법이 있습니다.
윤리(倫理)법와 도덕(道德)법은 더 강화 되었습니다.
그 강화된 도덕 법이 바로 산상보훈이었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은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법은 폐하지 않는 율법입니다.
만약 윤리와 도덕을 폐하셨다면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율법은 전환되거나 완성도를 높여서 승화 되었습니다.
어떤 율법은 완전히 폐기 되어도 상관 없는 율법도 있습니다. 수혼법이나 토지제도 등입니다.
제사법이 변하였기 때문에 제사에 관한 것과 그 시대적인 관례 등이 폐하여졌습니다.
동물로 드리던 제사는 모형이었습니다.
(히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여기서 변역한다는 말은 메타데시스 인데 이는 폐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환(change)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제사는 폐했지만
제사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몸을 드리는 것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려질 희생의 모형(模型)으로 드려지던 제사는 실상(實像)이 옴으로 폐해진 것입니다.
여섯째, 율법의 시효에 대한 오해
율법이 요한의 때까지인 줄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얼치기 복음주의자들과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치입니다.
일곱째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대개 이 구절 때문에 오해가 되기는 하는데 항상 병행구절을 찾아 보시고
어떤 구절 즉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 구절들은 난제로 남겨 두게 됩니다.
그러나 병행구절이 있거나 모순되는 구절이 나올 때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전후 문맥이나 성경이 기록된 원래의 목적하게 다시 해석하게 됩니다.
(마 11:13) 모든 선지자(先知者)와 및 율법(律法)의 예언(豫言)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 5:17) 내가 율법(律法)이나 선지자(先知者)나 폐(廢)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完全)케 하려 함이로라
위에서처럼 누가복음만 보시면 마치 세례 요한 이후에는
율법도 선지자도 필요 없는 것 같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豫言)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결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성실하게 율법에 대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律法)의 마침이 되신다는 말씀도 오해(誤解)가 있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성경(인터넷 상에서 헬라서 폰트가 먹히지 않아서 우리발음으로 씁니다)
롬 10장 4절 [텔로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네 판티 토오 피스튜온티]
개역 성경은(의역을 하였습니다.)
롬 10장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를 제대로 직역해 보면
롬 10장 4절 [율법의 마침은 그리스도이며 모든 믿는 사람의 의를 위함이라]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몽학 선생이 되어서
마침내 그 목표가 되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까지 들어가야 온전한 율법을 볼 수도 있고 율법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 계시된 그 수준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까지 들어 가서 완성(完成)된 율법(律法)으로만 진정한 성화(聖化)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리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의 성화도 완전치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의 완성은 부활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구원(救援)이나 사죄(赦罪)의 은총(恩寵)이란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의 [ 마침 ]이란 폐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였다 혹은 완성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주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도 아니요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폐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은 완성하여 주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며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여 주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서 그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칭의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성화시키려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 행함이란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령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성화되어 가는 영혼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삶으로서 결코 구약의 율법 이하의 삶이 아니라
그 보다 월씬 뛰어난 윤리 즉 산상보훈과 같은 최고의 율법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마 5: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러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제가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 아래에서 율법을 스스로 지켜서 의롭게 되어 보겠다고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는 유대인들은 마침내 구원에도 이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칭의=Justification)은
아시는 대로 우리의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율법하고는 정말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삶 즉 성화(Sanstification)는
구약의 율법은 물론 그 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산상보훈까지 목표를 정하고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 있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서 우리의 성화는 결코 진행되지 않습니다.
구원파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단이라 지탄을 받게 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면 율법주의자가 되어도 안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면 율법폐기론자 역시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 즉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율법 외에 한 의의 길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거룩한 삶의 원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約束)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율법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희귀하여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학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들이어서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절대적인 것이고 신학적인 해석이나 어떤 학자의 견해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어떤 학자들의 말이라도 분별없이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소홀히 하거나 등한시 해 왔던
율법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도
율법이 주어진 동기와 목적, 더 나아가 율법의 기능과 유익을
거의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 말씀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은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꾸준하게 예언(豫言)되어 왔던 그 예언(豫言)들이 성취(成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율법(律法)과 관계 된 것을 성취(成就)하신 것이 아니라
예언(豫言)들이 성취(成就)된 것이요, 구약 즉 옛 언약(言約)에 내포(內包)된
약속(約束)들을 성취(成就)하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셨으니까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예 말이 되지도 않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율법(律法)을 완성(完成)하셨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誤解)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律法)을 완성(完成)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 예수님께서 율법(律法)을 완성(完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律法)을 지킬 필요(必要)가 없다"는 말은 그릇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完成)하신 것은
예수님 혼자 지키시고 폐하시려고 완성(完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율법은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 율법을 지켜서 성화(聖化) 되기를 바라셔서 완성(完成)하신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율법을 보면 그 수준이 낮은 수준입니다.
그 이유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으로는
그 정도 수준의 율법도 지키지 못할 것이 뻔 하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이란 대체로 수준이 낮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낮은 수준과
미흡한 부분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려서 완성(完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율법(律法)을 완성(完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설교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 ?
<<율법(律法)을 완성(完成)하신 목적>>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폐하시기 위하여 완성하셨을까요 ?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그 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신약 시대에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는 말을
멋대로 해석하여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은 폐하여졌다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성령을 받으면 다 되는 것 이요
아예 신약 성경도 기록하게 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라 나를 사랑하는 자라"
(출 20: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 5: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수 22:5)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느 1: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단 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 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막 12: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요일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이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지키라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누구를 위하여 완성하셨을까요?
유대인들만을 위하여 완성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완성하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보는 안목이 열리신 분들에게는 율법이야말로
이 땅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참으로 복된 길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사실 기독교(基督敎)가 아니라
기복교(祈福敎)처럼 되어 어딜 가든지 그저 오나 가나 그저 복받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많은 복들은 레위기에 기록된
여호와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지킬 때에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교통법규가 완성되었다면 성실히 교통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통사고를 줄여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소중한 시간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교통법규가 완성되었으니까
이제는 교통법규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
자 먼저 예수님의 말씀부터 들어 봅시다 !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을 보완하여 완성시킨 것은 폐하기 위하여 완성하셨을까요 !?
폐하게 될 율법이라면 아예 완성할 것도 없이 폐하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일까요 ?
종교개혁자들 시대부터 율법 무용론자들은 처음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스스로 오해에 휘말려 착각하게 된 것은
바울의 서신들을 오해하게 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간 후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후에 지키라고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율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처음부 구원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구원받는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원리로써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란 구원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그 구원 받은 감격으로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그렇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 율법이 주어졌던 시점이 애굽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애굽에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주어졌다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율법을 주시면서
"만약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리라!"하신 것이 아니고
그냥 유월절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그 양의 고기를 먹고 모세가 전한 말씀을 믿음으로
그냥 값없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애굽에서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면 거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고 가르치는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단지 죄를 깨닫게 하였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결과론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율법을 주셨던 원인과 목적 !
즉 먼저 그 율법을 주셨던 처음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셨던 처음의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 율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둘 째, 율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셋 째, 율법의 목적은 삶을 얻고 복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넷 째, 율법의 목적은 이방인을 선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율법의 목적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습니다.
여섯째,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일곱째,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경을 제대로 읽으면 그냥 훤히 보이는 내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최소한 7년마다 한번씩 성경을 통독하면서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 하시는 말씀을 소홀히 하여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했고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삶을 얻고 복을 얻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선교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교당하고 말았습니다.
생명과 평강은 고사하고 고통과 사망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독사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그렇게 된 율법은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어리석으며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였던 것이고 따라서 스스로 큰 죄인됨을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할 때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들을 부르셨으니
오히려 그 율법이 죄인들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꼭 그러한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거룩한 사람들은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지켰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 즉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의인으로 부르시는 것이
잘 못된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 배반하여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으로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율법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복을 받을 욕심에서라도 율법을 지키려 했을 것이고
반대로 저주 받을 것이 두러워서라도 율법을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복 받을 것을 믿으면서 지킬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으로 믿어
두렵고 떨림으로 율법을 지키려 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
율법을 지켜봤자 복 주실 것 같지도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저주같은 것은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불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원리는 그 때나 지금이마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느냐 하면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전혀 사람의 행위에 달린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에는 성실히 율법을 가르쳐서 배우게 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둘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 우리가 건강하게 위생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 ! 다시 생각해 봅시다 ! 율법의 목적이 위의 세 가지라면 어떻게 이를 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더 보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율법을 더 강화하고 더 완성도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또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율법은 그냥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 했습니다.
이는 루터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주장에 만족하지 않은 칼빈은 말하기를
율법은 성도를 성화시키는 채찍으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더 자세하게 보면 잘 못된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단지 죄를 깨닫게 한다고만 가르치는 사람들은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율법을 결과론적으로만 보시지 말고 목적론적으로 보시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01.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素性)케 한다.
02. 율법은 확실하여 사람은 지혜(知慧)롭게 한다.
03. 율법은 사람에게 진리(眞理)를 배우게 한다.
04. 율법은 사람에게 신앙(信仰)을 가지게 한다.
05. 율법은 사람에게 소망(所望)을 가지게 한다.
06.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07.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聖化) 한다.
08. 율법은 사람을 복(福)되게 한다.
09. 율법은 삶을 풍성(豊盛)하게 하고 충만(充滿)하게 한다.
10. 율법은 질서(秩序)를 가져온다.
11. 율법은 사람들을 건강(健康)하게 한다.
12. 율법은 공평(公平)하게 하고 정직(政直)하게 한다.
13.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겸허(謙虛)하게 한다.
14.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명철하게 한다.
15.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恩惠)를 알게 한다.
16. 율법은 사람의 길은 인도(引導)하여 준다.
17.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時代)에 앞서게 한다.
18.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실(誠實)하게 한다.
19.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를 찬양하게 한다.
20. 율법은 사람을 경건하게 하고 경외(敬畏)하게 한다.
2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性稟)을 배우게 한다.
22. 율법은 사람을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한다.
23. 율법은 신령한 것이요 선(善)한 것이다.
24. 율법은 죄인들의 죄(罪)를 깨닫게 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救援)받은 후(後)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의 수준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던 수준의 불완전(不完全)한 율법이 아니라
거기에 예수님의 교훈(校訓) 즉 더 보완(補完) 하셔서 완성(完成)시키신 완전(完全)한
율법을 가르치고 지켜서 우리의 삶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穩全)하심같이
성도들의 삶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바램이고 교훈이고 명령입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者)를 사랑하면
무슨 상(賞)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兄弟)에게만 문안(問安)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異邦人)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穩全)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穩全)하라
그러나 구약의 여러 율법서 중에서 폐지(廢止)하신 율법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바르게 이해(理解)를 못하고 있습니다.
폐해진 율법과 폐하지 않은 율법은 간단하게 구별(區別)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형으로 지키던 율법은 실상이 오게 되면 폐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동물들 즉 양이나 소나 염소로써 드리던 제사는 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형으로 드리던 것인데 실상으로써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후에는 영원히 폐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에 행하던 싸인 즉 할례의 경우는 마음의 할례 즉 세례가 온 후 폐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례가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고 이를 두고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외 유대지방의 문화 안에서 임시로 주어졌던 관습법들 중에
수혼법이라든지 토지법 등 기타 몇 가지는 폐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폐(廢)하지 않는 율법이 있습니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적인 율법(律法)은 모형(模型)이 아니라
실제적(實際的) 삶의 윤리(倫理)이기 때문에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물 규정(規定)이나 위생법(衛生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은 모형으로 먹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건강과 위생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율법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모든 날 동안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 유대교 신자들과 몰몬교 신자들과 안식교 신자들이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시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총회는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인 것과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을 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물 규정이 기본과 모든 윤리의 기초가 성윤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행전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신 말씀은
실제로 그런 부정한 동물들을 잡아 먹으라고 한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즉 로마인이나 기타 이방인들을 부정한 짐승들(고이)로
간주하고 같이 식사도 할 수 없고 또 상종도 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베드로 사도에게 이방인들 집 즉 고넬료 집에
모여 있었던 이방인들 모임에 거리낌이 없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뜻으로 말씀하셨고
또 베드로도 이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 들었으며 그들이 혐오스러워하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이런 것 정도는 바르게 인식하고 난 후에야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그러한 환상을 본 후에 보신탕집에 갔겠습니까
아니면 삼겹살이나 순대를 먹으로 갔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시하거나 폐하신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벗어난 탈무드나 미쉬나 게마라 토셒타 학가다 등
과잉해석되어 율법의 정신을 크게 훼손한 유대교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하셨고 지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설픈 학자들이 율법무용론자처럼 가르쳐 온 것은
구약도 신약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 못 가르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크게 혼란스러워할 것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그만큼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배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몇 차례 더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行)하는 자(者)는
그 집을 반석(磐石) 위에 지은 지혜(智慧)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磐石)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行)치 아니하는 자(者)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윤리적인 기초가 안된 인격이 목회를 한답시고 떠들어 대다가는 언제가는
그러한 신앙과 인격은 한심하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얼치기 복음주의자들이 세운 유럽교회가 저렇게 쉽게 무너지게 된 것도
그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운운 하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여 어설픈 진화론에게 젊은 영혼들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성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나아가던
저 유럽의 교회들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산상보훈이란 불신자를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 즉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생활이 산상보훈을 지키지 않으면 윤리적인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고 레위기에 있는 음식물 규정을 무시한 결과는
오늘날 성도들의 건강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함으로 거룩해 진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오해들>>
하나님께서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하신 음식(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을 앞에 놓고
아무리 기도해도 절대로 거룩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두고 바울이 기도함으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신 말씀은
우상의 제단 앞에 제물로 드려졌다가 신전에서 다 먹지 못하고 남아서
시장에 내어다 파는 음식을 두고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이 아예 성경에서 처음부터 먹지 말라고 명시하신 것을 두고
기도만 하면 거룩하게 된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기도함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음식들이
성경이 금하고 있는 개고나 돼지고기 혹은
메기나 뱀장어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레위기11장나 신명기를 보시면 먹을 수 있는 동물이라도
어떤 특정부위나 특정한 요소는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장이나 콩팥 근방에 있는 지방이나 피와 기름 같은 것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가 신약에서는 먹으라고 했다가 하는
갈팡질팡하는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담을 비롯한 처음 인간들에게 규정된 음식에서는
육식은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채소와 곡식들과 과일들이 주식으로 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육식이 허락된 것은 온 땅이 1년 동안 물에 잠겨서 모든 식물들
다시 말하지만 채소와 곡식들과 과일들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기는 하셨지만 그 때도 피를 먹거나 흘리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하셨습니다.(창 9:4-6)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되 가려서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동물성 음식을 폐한 것이 아닙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 할 것이 한 말씀과는 다릅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고 말씀하신 분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에서 떠난 사람이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는 말씀은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의 교훈도 아닙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어떤 사람도 아니고 혼인을 금하라고 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모세를 시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몸에 어떤 음식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학자들이라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설계하신 분이 제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음식을 가려서 먹으면 우리의 피가 맑아지고 성품이 온유해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도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은지 아니면 아무 것이나 다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은지를 ........!
구약 시대에 우리 몸에 해롭던 것은 지금도 해롭고 앞으로도 해롭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에는 덜 해롭던 것이 지금과 앞으로는 더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에서 먹을 수 있다고 하셨던 것들 중에서도
지금의 사육 환경을 생각할 때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음식과 그릇을 바꾸고 몸의 상태가 좋아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목사님께서도 틀림 없이 생각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과 통닭용 육계(肉鷄) 사육자들과
횟감으로 팔려 나갈 활어를 양식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료(飼料)에
얼마나 많은 항생제(抗生劑)가 투여(投與)되고 있는지를 알고 나시면
아마도 저보다 더 열심히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란 본래 주어진 목적이 죄 사함 받고 영생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삶을 얻고 복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신 5:33)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리고 구원 받기 전(前)에 구원을 받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은 후(後)에 즉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에게
구원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삶(聖化)을 위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복음의 초기에 율법주의자들 내지는 할례당이 주장하는 것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초대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약시대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맞지 않는 이론이었습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1.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말고
2. 하나님의 말씀에서 빼지도 말고
3.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지 말고
4. 성경을 과잉확대 해석하지 말고
5.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바르게 빠르게 전하여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66권 중에 단 한 권이라도 가르치지 않고 무시하는 목사들은
확실(確實)하게 불성실(不誠實)한 사람들도 간주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명(使命)을 받은 사람이라면 제 멋대로 어떤 책을
무시(無視)하거나 생략(省略)할 수 있는 권리(權利)도 권한(權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달콤한 말씀만 뽑아서 설교하고 있는 목사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반열에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어 말 장난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작태가 늘 그래 왔던 것입니다.
신약이나 구약이나 성경 어디에도 피를 먹을 수 있다고 허락하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피와 목매어 죽은 동물의 고기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하고 있다면
율법 중에 최고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는 그 인격의 윤리적인 측면에서 건전한 것이지만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음식물 규정과 위생법을 지키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 혹은 신학자들이
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유대교 신자들과 안식일 교회 신자들 그리고
몰몬교 신자들의 삶은 확실히 세상 사람들보다 거룩하고 경건합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활은 어디서도 경건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경건(敬虔)의 모양(模樣)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能力)이 없다고 책망(責望)을 하셨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경건의 모양(模樣)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율법이 모형으로 제정된 율법이었다면 실상이 오면 당연히 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형적인 율법이 아니라 실제로 행할 것을 규정한 율법은
폐하신다는 말씀도 없었고 폐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 글을 수 차례 더 읽어 보시고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에스라 성경강좌에 직접 참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어설프게 목사가 된 사람들이
얼치기 같은 어중재비 복음주의자들은 그저 구원과 상관이 없는 법들은
예사로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개혁주의란 마구자비로 뜯어 고치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니라
성경대로 회복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은 처음부터 이단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저의 글이 길어졌지만 사실은 제가 한국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면 족히 70 시간 이상이 필요합니다.
한 주간의 시간을 내실 수 있다면 신학대학에서 7년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더 바르게 배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제가 일당을 계산하여 변상할 용의가 있습니다.
에스라 성경강좌에는 초등학생에서 신학대학 교수 학장들까지
목사 전도사 선교사 등 온갖 교단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연간 4000 명 ~5000명이 수료합니다.
교역자들이 대체로 700명~ 800명 수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료하신 목회자들(목사 전도사 신학생 선교사 등)만
13,000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몰상식 하거나 편협한 사람들이 돌아가서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말을 두어 번 들어 본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양심이 있는 목회자들은 피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
신학교에서 보낸 숱한 시간들과 노력들, 그리고 막대한 학비가
억울한 정도로 통탄해 마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면을 통한 논쟁이나, TV. 토론이나 어떤 토론이라도
또는 어떤 상대라도 기꺼이 응할 마음이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논쟁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나 바울이 율법 전체를 폐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딤전 1:8)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지금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의사들도 동물성 지방질과
콜레스테롤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을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사들도 고혈압 환자들에게 오징어와 낙지를 삼가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데다가 자동차 때문에 걷지도 않는 세대,
여름이라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에어컨을 가동하는 환경에서
우리 몸 속에 동물성지방질이 과다하여 고지혈증, 지방간으로 간경화로 쓰러지는
기독교 신자자 얼마나 많은지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
이렇게 된 것은 본인들의 책임일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우리들 즉
목회자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음식물 규정이야말로 음식물 복음(福音)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물 규정은 우리를 정죄(定罪)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병이 걸리지 않고 약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신
복되고 즐거운 법이라는 것을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작금에 아이들이 아무 것이나 먹어서 ADHD. 같은 주의력 결핍증 내지 행동 항진증으로
기초 학력이 구축되지 않으면 마침내 그 아이의 일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놓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환경호르몬(내분비 교란물질)이 들어 있는 음식이나 그릇이나 주거환경도
지도할 줄 모르는 목사들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0대 20대 청소년들의 정자(精子) 수가 현저(峴底)하게 감소(減少)하여
40대 50대 어른들의 절반(折半)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얼치기 율법 폐기론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들의 귀한 자녀들이
정자 결핍증, 정자 무력증, 정자 기형증으로 말이암아 남성 불임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과 이성(異性)을 보고도 별로 관심이 없고
아예 결혼을 할 생각도 없이 지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목회자들 대부분이 원인도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우맹이요 소경들이 독생자의 피로 사신 교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단들과 사이비 만큼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량미달의 목회자를 양산하는 신학교들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 오를 정도입니다.
그 동안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구체적이고 실생활적인 전인목회에 여지없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언급이 없었다고 해도 목회자들은 미리 내어다 보고
지도를 해 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성경이 기록될 때부터
이러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분별할 줄을 모르고 바르게 해석할 줄을 몰라서
이처럼 참담한 현실을 빚어 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사나 판사의 직책이 중요한 것은 그 분들이 하는 일 자체가
사람의 일생의 생명이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사람들의 일생의 생명과 운명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운명을 다루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나 판검사보다 몇 배나 더 공부를 하시고 성실하게 하시고
정직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소양이나 지식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성실하게 정직하게 성경에 통달하지 못하고도 가르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면 저의 강의를 열린 마음으로
좀도 정직하게 좀더 성실하게 들어 보실 것을 권해 드리는 바입니다.
https://m.cafe.daum.net/lbh-2010/Flc7/4?svc=cafeapp&searchCtx=m7dK8yu74Yz72WetpNTnSZ8hkw.drzW2T44BMmI5JL6suTcYit2-iUs2gXhJrU1AjKu-wFAY1BU3Y2ktxru_.w00
첫댓글 아이고 길어부러 ㅠㅠ
눈 침침해서 읽기 힘들어라,,, 요즘은 성경도 낭독 듣는답니다,,, 에구 건강할 적에 배워야하는디....ㅠ
최야곱님 노우호목사님의 율법 토론이었군요. 2010년이면 저는 플레비언에서 광주중앙교회 사태 다루던 시기인데 ;;
두분 대단히 귀중한 토론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