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피난민의 아들에서 한국사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모두 직접 관련해 있었으며 인권변호사에서 마침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문재인 대통령님
6.25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0년 겨울.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했고 눈부신 속도로 진격해서 평양을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한다.
김일성은 강계로 수도를 옮겨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지만 사실상 통일을 눈앞에 두고있었던 상황.
하지만 중공군 30만명이 기습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바뀌고 원균을 능가한 한국군 장교 유재흥의 부대전멸까지 겹치면서 UN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하게된다.(1.4 후퇴)
함경도 지역의 국군과 UN 군은 함흥부근의 흥남부두에 모여 해군의 도움으로 철수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지만 중공군은 이를 포착하고 흥남부두를 포위한다.
하지만 미 공군의 근접폭격과 해군 전함들의 결사적인 화력지원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도시 주변을 포위하는데 그치고 부두에 집결한 국군과 UN군 10 만명은 철수를 시작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군을 따라온 수만명의 피난민이 부두에 발이 묶여버린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공산당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로 다시 공산당 치하로 들어갈경우 반역으로 대부분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 10군단의 한국인 고문이자 군의관이었던 현봉학은 군단장을 설득했고 군단장은 해군 함정 13척을 동원해서 9만명에 가까운 피난민을 수송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모든 철수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부두앞에 정원 47 명의 미국 국적의 유조선 메레디스호가 남는다.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현봉학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모든 화물을 버리고 부두로 다가가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한다.
↑ 철수가 완료된 후 미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부두.
정원 47 명의 유조선에 피난민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올라타기 시작했고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자신의 짐을 바다로 던지고 다른사람의 손을 잡아 올려준다.
정원 47명의 화물선에 그렇게 올라탄 피난민의 수는 14,000 여명. 메레디스 호의 탈출 직후 미군은 흥남부두를 폭파한다.
영하 30도의 한겨울에 정원을 3백배가 넘게 초과한 혹독한 상황에서 거제도까지의 3일간의 항해에도
단 한사람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5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3일간의 항해끝에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메레디스호는 거제도에 도착했고 모든 피난민을 안전하게 내려주고 다시 항해를 떠난다.
메레디스 호는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해낸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당시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1960년에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 10년전 지구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흘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했다고 나는 믿는다. "
P.S 이렇게 흥남에서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끝까지 협력을 거부했던 공무원 출신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1953 년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재인이라고 짓기로 한다.
어릴때 문재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문재인 대통령 초등졸업사진 (미국 메릴랜드 시골 한인마트 주인 소장품)
「여기 메릴랜드 시골 한국마트에서
주인 남자분이 문재인대통령이 자기 친구라고
졸업사진 보여주셨어요.
너무 놀랍고 좋았어요.
그 분왈 "재인이는 아주 인간성이 좋고 아주 사람이 천재였어"... 라고 하셨어요.
그 학교에 김무성도 있었는데 "갸는 집이 친일파에 그 아버지도 행동이 개차반이였고 애들한테도 약간 왕따"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만 부산 최고 명문이라는 경남중 & 경남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진 않았다.
경남고 시절
문과 1등과 내놓라하는 문제아일만큼 사고를 많이 쳤다.
책벌레이기도 한 그는 학교 도서관의 대부분의 책을 섭렵했고 꽃을 좋아한 감성있는 학생이었다.
경희대 시절 학생운동
1972년 서울대에 들어갈거라고 기대했지만 방황을 시작하고 재수하여 경희대 법대에 수석입학하고 4년 장학금 받으며 다녔다.
1974년 경희대의 유신 반대 시위를 직접 기획하였다. 당시 학생회장이 시위를 주도하기로 했지만 학생회장 사전구속으로 자신이 직접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당시 '왜 학생운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화려한 언변은 없었지만 가슴깊이 울리는 연설을 통해서 경희대 시위중 가장많은 대규모 시위(약 4000명가량)의 선두를 이끌었다.
1974년 10월 18일 경희대 법대 도서관에 한 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시위를 주동하게 됐으니까 참여하자”며 고시생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나서서 “우리는 너와 생각이 다르니까 당장 나가라”며 그를 쫓아냈다.
쫓겨난 학생은 지금의 문재인이고 쫓아낸 학생은 뒷날 검찰에 몸담았다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ㄱ씨다.
그러나 문재인을 몰아낸 고시생들이 할 말을 잃은 건 그 다음이었다.
사법시험 1차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학내에서 오직 문재인 혼자 합격한 것이다.
격변기 시절 경희대 학생운동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학생운동중 잡혀서 투옥되고 1975년 8월 입대하였으나 군대도 일반 군대가 아닌 특전사로 가게 됐고 특전사 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선임분대장이 되었다.
하지만 특전여단으로 차출후 학생운동 이력때문에 매일같이 취조와 밤샘 괴롭힘당하고 그 다음날 또 혹독한 훈련을 받는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와중에 다른 특전사 대원들을 제치고 두번이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았다.
또한 전시사항에도 특수작전에 실제로 투입됐고 또다른 준전시 사항에서 64명 최정예특전사를 보냈는데 그중 한명에 문재인이 포함됐다.
“19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당시 유엔군과 한국군 초소 앞에 북한쪽 관측을 방해하는 울창한 미루나무가 있어, 군사상의 이유로 미군과 한국군(카투사)들이 그것을 제거하려는 작업을 벌이던 중, 갑자기 북괴군 병사들이 습격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찍어 죽이는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격렬하게 분노했고, 바로 한미연합사령관을 소환하고 ‘데프콘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했다”고 설명했다.
↑ 사진속에 문재인님(추정)이...
이어 “장난이 아님을 깨달은 북한도 ‘북풍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다.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태! 이와 함께 미국은 ‘Operation Paul Bunyan(폴 번얀 작전)’을 수립했다”며 “이것은 벌목작업 부대를 다시 현장에 투입해, 만일 북한군이 재공격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보복을 한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는 “데프콘2와 북풍1호가 발령된 가운데, 다시 현장에 투입된다는 것은 솔직히 목숨을 건 일이었다”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특전사에서 가장 우수한 64명의 결사대(죽음을 각오한 부대)를 차출, 유서를 쓰게 하고, 손톱 등을 깎아 유품으로 남기게 했는데 이 64명의 특전사 결사대 중에 한 명이 바로 당시 특전사에서도 최고의 ‘특급전사’로 불리던 ‘문재인’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미루나무 절단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사색이 된 미군들이 벌벌 떨며 제대로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왜냐하면 어림잡아 200명은 넘어 보이는 북괴군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너머에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이 떨려 전기톱의 톱날이 계속해서 부러졌다. 평상시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비무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무기는 전기톱 등이 전부였고, 그래서 북괴군도 미군들을 죽일 때 총이 아닌 도끼를 사용한 것이었다”며 “상당한 시간이 지나 작업은 겨우 끝났고, 미군들은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현장을 뜨고 싶어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군 특전사들이 일시에 몸에서 (분해해 챙겨온) M16과 수류탄, 크레모어를 꺼내들고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고 급박한 현장을 전했다.
이어 “문재인을 비롯한 특전사 결사대는 평소 유엔군 제3번 초소를 배후에서 위협하던 북괴군의 제5번, 제6번, 제7번, 제8번 초소를 총과 수류탄, 크레모어를 가지고 완전히 초토화했다. 캠프 키티호크 상황실은 일시에 공포 분위기로 변했다. 이게 바로 제2차 한국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격을 맞은 북괴군들은 반격은 커녕, 모습을 감추었고, 문재인을 비롯한 특전사 결사대는 작전 완수를 확인한 후, 겁에 질린 미군들을 데리고 유유히 현장에서 철수했다. 이후 다행히 북괴군의 군사적인 도발은 없었고, 북한의 김일성이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로 유감 성명을 발표하며 이것으로 종결되었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연수원 동기 현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1980년에 경희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연수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나 학생운동 이력때문에 판사, 검사로의 길이 막히자 변호사가 되었다.
왼쪽부터 문재인 변호사, 김석준 교수, 손정연 회장, 신석규 의장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촬영한 독일 기자의 광주 민주화 운동 영상을 부산에서도 상영했는데 그 첫 영상회를 주도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였다.
또한 518 유공자 자격이 되면서도 수상을 거부했다.
1987년 2월 7일 부산에서 노무현, 문재인은 박종철열사 추모제를 주도했고 같은 해 6월 민주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었는데,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변호사였고 상임집행위원은 문재인 변호사였다.
권양숙 여사님과 문재인 변호사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으로 노동자들을 돕다가 구속된 노무현변호사
그 당시 노무현변호사 구속 진상조사위원장이
문재인 변호사였다.
문재인은 부산에 등록된 변호사들을 모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며 변호인단을 꾸렸다. 당시 부산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노무현 변호사는 석방되었다.
대우조선 노사분규와 고 이석규 열사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 23일만에 출소한 노무현 변호사와 출소를 환영하는 국민운동부산본부 관계자들이 '만세승리 노무현 변호사 석방을', '민족민주승리의 연장', '국민운동부산본부' 등이 적힌 플래카드 들고 관계자들이 환영하고 있다.
한겨레 신문 창간 발기인 대회
문재인은 당시로선 큰 돈인 2억원을 개인 신용대출 받아서 한겨레 주식 사주고 한겨레 부산지국장까지 수행했다.
1988. 12. 10. 국민일보 창간호
"노동현장의 人權유린 참을수없어..."
참다운 근로자의 동반자 자청 정의실현 앞장
인권변호사 文在寅씨
60개 民主노조 탄생의 산파역
'경제성장주역들 生存허덕 가슴아파'
국내 최대 공단지역인 부산 경남지방엔 3만 5천여개 공장(등록업체)이 산재해있다. 이 크고작은 공장은 근로자 1백30만명과 그 가족들의 삶의 젖줄이다. 따라서 이곳에선 이 근로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문제들이 끝없이 분출된다.
文在寅변호사 (35). 그는 최근 3년간 근로자들의 숱한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일에 파묻혀 지내왔다.
부산 부민 2동 10의19 부산고법 신축건물옆에 위치한 작은 건물 3층. 이곳에 文변호사는 86년 1월 盧武鉉변호사(42)와 함께 노동법률상담소를 개설했다. 이 상담소엔 지난 3년간 부산 경남지역 노동자들의 방문이 거의 매일 줄을 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담중 소송건수만도 3백여건이 넘었고 이중 70%가 승소했다. 이같은 소송건수는 이지역 다른 변호사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건수다.
방문객들은 업종과 공장수 만큼 천태만상이었고 호소내용도 부당해고, 산업재해, 각종 수당미지급, 기타 근로기준법위반등으로 다양했다.
文변호사는 상대방의 형편에 따라 무료 또는 인지대등 최소비용으로 변론을 도맡았다.
그가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5년초부터 표면화하기 시작한 민주노조결성시도와 이로인한 대량해고-노사충돌-구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몇몇 사건과 접하면서였다.
노동관련 사안은 개개의 사건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으로 산업현장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발생했다.
文변호사는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동인권변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재판때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는 최후진술을 할때는
짧고 투박하지만 진실성이 배어나온다고 한다.
文변호사의 노동인권운동은 87년 7, 8월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해 큰획을 긋는다.
부산을 비롯, 울산 마산 창원등지의 각 사업장마다 노동조합 결성방법을 모르는 노동자들이 자문을 구하고자 상담소로 몰려들었다.
이 상담소 실무자들은 당시 하루 1백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쇄도했으며 文변호사의 지원으로 60여개의 사업장에 노조가 설립됐다고 설명했다.
文변호사는 노동인권 변론중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시국과 관련한 현대엔진 현대정공 기아기공분규등을 꼽는다.
이들 노동관련 사건과 빈번히 접하면서 그는
노동자들이야말로 구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제성장의 주축이면서도 생존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시국사범 대사면에서도 시국관련 노동자들이 제외되고 있다고 文변호사는 지적했다.
노사분규때 근로자들이 회사측이 동원한 구사대등과의 충돌과정에서 폭력행위로 처벌되곤 하는 현상 때문이다.
이들은 교도소에서도 시국사범으로 다뤄 가족면회등에서 제한을 받고있고 사면 · 복권때엔 일반사범으로 취급, 제외되는 2중의 피해를 입고있다는 것이다.
文변호사는 틈츰이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국사범들의 변론도 맡아왔다.
최근엔 25명의 동료 · 선배변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지역 변호사모임」을 발족시켰다. 이 모임의 대표간사인 趙○○변호사(47)는 文변호사에 대해 『실천력과 용기를 겸비한 청년을대표하는변호사』라고평가했다.
『5共비리 척결후 국가적 ○○과제는 「분배의 정의」 실현입니다.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거싱야말로 튼튼한 민주사회가 정착되는 길입니다』
文변호사는 80년 경희대법대 재학중 시위로 구속됐고 옥중에서 사법시험 합격소식을 들은 ○○○ 갖고 있다. 이 전력때문에 文변호사는 판 · 감사에 입용되지 못해 ○○년 변호사개업을 해야했다.
<釜山=金時亨기자>
1990년 1월 24일에 촬영된 당시 변호사 사무실
문재인은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한때 부산 부민동 법원 앞에서 복집(남경복국)을 경영했던 이정이씨(63).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그를 항상 ‘어머니’라 부른다. 복집 2, 3층을 변호사 사무실로 이용했던 문수석은 식사는 물론 술을 먹을 때도 수시로 이 집에 드나들었다.
8월10일 이씨는 문수석에 대한 잔영을 이렇게 떠올렸다.
“다른 변호사들이 수시로 판사와 검사를 데리고 복국을 먹으러 왔지만 ‘문변(문수석)’은 한 번도 검사 판사들과 밥을 먹지 않았다.” (주간동아)
2003년 2월 25일 문재인 민정 수석 비서관으로 임명
노무현은 당선된 후 문재인에게 "당신이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겨 아니냐"며 민정 수석직을 강권했고 결국 문재인은 "민정 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시라."는 말을 당부하며 2003년 1월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과 양말만 싸서 부산에서 상경한다.
문재인은 이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청와대에 왜 왔느냐?"라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노무현 대통령 혼자서 외로울까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
노무현대통령이 탄핵당했을시 노무현대통령측 변호사였다.
↑ 2008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날 마지막으로 청와대 관저를 나서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문재인 비서실장
탄핵 기각 후 2004년 5월 문재인은 시민 사회 수석에 임명되고 2005년 1월에는 민정 수석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2006년 5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부산 시장에 출마하라는 당의 압박이 거세졌고 결국 문재인은 또 민정 수석직을 그만두게 된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워낙 어려웠다."
도저히 노무현의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문재인은 2007년 3월 다시 복귀하여 마지막 비서실장을 임기끝까지 노무현의 곁을 지킨다.
2009년 5월 23일
문재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 국민앞에 서게 된다.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내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던 날이다....."
2016년 11월 30일 상지대 학생들과 시국 관련 대화중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매우 침착하게 언론에 발표하신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심정이 어떠셨나요?"
"많은 분들이 제가 그 당시에 아주 침착하게 냉정을 잃지 않고 발표를 했다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사실 그 순간 정말 눈 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사실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알릴까 안간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의 사망 직후 문재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첫날에는 가슴이 찢어지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 모든 일을 함께 했다. 나는 돈 버는 일을 전폐했지만 그는 사무실 운영을 도맡아 하면서 매월 내게 생활비를 주었다.
부산에서 선거를 치를때마다 힘을 다했고 대통령 선거때는 부산 선대 본부장을 맡아 주었다.민정 수석과 비서실장으로 대통령 임기내내 나를 도와 주었다.
헌법 재판소의 탄핵 심리와 퇴임 후 검찰 수사때도 내 곁에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그와 함께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 노무현 자선전 '운명'중에서
군함도
군함도 관련 소송 당시 문재인은 원고측 대리인중 한명으로 2002년 3월 ~ 2006년 11월까지 재판에 직접 관여하였다. 문재인이 손해배상 소송의 물꼬를 튼 덕분에 6명의 피해자들외에도 일제 강제 근로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다.
미쓰비시는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했으며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2000년에 시작된 이 소송은 미쓰비시가 한국임에게 배상해야한다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2018년인 지금까지도 사과나 보상이 없다.
「 일본 기업이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상황에서 당시 배상 책임을 물었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이국언 공동대표)
"(노무현)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문재인의 '운명'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면 문재인을 향한 간절한 민심은 문재인이 확고한 결심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6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지 두 달만에 민주 통합당 대선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문재인의 권력 의지를 강력히 뒤흔든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늘 어디서나 꼿꼿하고 신사적인 모습만 보이던 문재인이 무너져 내렸다. '노무현의 죽음에도 눈시울만 불거질뿐 잘 견디고 심지어는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정적 이명박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세월호의 참상을 보고 부모님이 죽은 듯이 울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행진
무능한 정부
잇따른 실책
분노한 여론
문재인은 사건이 터지자
팽목항에 가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유민아빠를 살리기 위해 10일간의 단식을 하기도 하고 청와대 앞에서 비를 맞으며 특별법 제정 촉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속을 끓어오르는데 그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달라진 그의 행보
그리고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선거에 나선다. 그리고 그의 연설에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독해지겠다."
"흩어진 48%를 다시 모으겠다. 거기서 한 길을 나서야겠다. 다시는 1~2%가 모자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누가 총선 승리를 이끌 적임자입니까?
누가 정권 교체를 가져올 최고의 적임자입니까?
여야를 통틀어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저, 문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대표직은 분영히 독배였다.
당내의 권력을 틀어지게 되지만 총선을 승리시키지 못하며 당대포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정치 생명을 건 도박이었다.
"당을 살리지 못한다면, 총선을 승리하지 못하다면 제가 어떻게 대선 후보가 되겠습니까. 사즉생,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당선
지난 총,대선, 지방 선거 모두 패배. 계파 갈등에서 비롯된 내부적인 당 파열 그리고 당장 내년에 있을 총선거. 가까스로 대표는 되었으나 당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문재인은 말 그대로 당의 혁신을 위해, 내년 총선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대선 승리를 위해 본인의 모든 정치 인생을 걸고 뛰어든 것이다.
대표 당선 이후 문재인은 대선 행보을 시작했다. 노무현의 유산을 받은 고고한 선비가 아닌 문재인 스스로 서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는 노무현의 그늘에 있던 그가 노무현의 길을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20대 총선에서 문재인은 전국 방방곡곡을 넘나드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며 후보 단일화와 지원 유세를 도와 총선 승리에 기여했고 또한 문재인발 영입 인사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당 내 본인 입지를 공고히 한다.
그리고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엔 역시나 전국 순방을 돌며 각종 집회 시위, 연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국민과 소통하며 관심을 환기시키고 민심을 끌어오는데 일조했다.
4년전 문재인은 야당의 대선 후보였지만 여전히 정치가 두렵다고 말했다. (2012년 1월 9일 방영 힐링캠프중)
그때의 문재인에겐 정치란 노무현이 건넨 '운명'이라는 독배를 받아들고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4년뒤 지금의 문재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다시 한번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감히 그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2016년 11월 23일 강연중)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문재인을 보고 너무 유약하다고, 권력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대통령 서거후 일련의 사건들은 문재인을 각성시켰고 문재인은 그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절실하게 권력 의지를 희구하게 되었다.
"끝내 피하고 싶었던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시대 정신때문에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국민의 마음속에서 찾을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엄격한, 진실로 겸허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김정숙 여사님 인터뷰중
"제 이상형은 원래 예술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살아보니 부부가 함께 결혼해서 인생을 만들어 나가려면, 이상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변치 않는 신뢰와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어요."
"그런 점에서 남편 (문재인은) 가족들을 실망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남편이 월급을 갖다주면서 그러더라고요. '나는 앞으로 인권변호사.노동변호사를 할 것이다. 다른 변호사처럼 높은 수임료를 원하지 말고 이 봉급으로 살도록 해라.' 하지만 그게 적은 돈은 아니었기 때문에 '좋아요'하고 살았죠. 다른 변호사들보다 돈을 못 번다고 해서 제가 주눅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세상이 참 재미있었거든요. 대학 때도 산전수전 다 겪고 결혼 했는데 그 이후로 변호사가 돼서도 늘 역사의 파도 끝에서 살았어요. ... 만약 다른 사람하고 살라고 하면 전 지금도 제 남편을 택할겁니다."
아내가 본 ‘정치인 문재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김정숙 “늘 똑같은 사람이에요. 원칙을 중시하고, 소신과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죠. 스스로 생각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편이 중시하는 명예죠. 누구보다 정치를 잘할 거라 믿어요. 4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봐온 바로는, 이 사람 ‘진국’이거든요.”
대한민국 제 19 대 대통령 문재인.
"생일 축하드립니다."
첫댓글 소라방에서 특전사 검색해서 보는데 이니 진짜 너무 대단하고 멋지고 존경스러워서 끌올했긔💙💙💙
우리 대통령님 너무 존경합니다!! 어쩜 탄생부터 위인전이긔. ㅜㅜ
대통령님을 위해서 이번선거는 꼭 이겨야되긔ㅠ
매번 읽어도 감동이긔 ㅠㅠ 진짜 존경스럽긔. 이거 업뎃 안되냐긔 ㅠ 한국정당정치 시스템 개혁한것도 포함해야되고요. 대통령으로서 이룬 업적들도 같이 더하자긔 ㅠㅠ
제가 뽑고 그 시대에
살아서 영광일 뿐이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끝까지지지하긔💙
역사에 함께 살았다는것 만으로도 영광이긔 ㅠ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ㅠㅠ 퇴임후에는 나라의 큰 어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긔 ㅠㅠ
이니 ㅠㅠ 대단하시긔 ㅠㅠ
위인이 이끄는 나라를 함께 하고 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평생 충성입니다 💙💎💙
사랑합니다💙💙💙
ㅠㅠㅠㅠㅠ
이니 끝까지 지지하긔ㅠㅠ
어떻게 사람이 한평생 한결같을 수 있을까싶긔ㅠㅠㅠㅠ 대단하시긔
존경합니다 대통령님
이 글을 처음봤을때 그 소름 잊지못하긔
우리나라 굵직한 역사의 순간마다 등장하시는게...
진짜 위인이시긔
이니 끝까지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눈물 주르륵 나긔...마음 편한 날은 있었을까요.항상 응원합니다
대통령님 사랑해요 끝까지 지켜드릴거에요
대통령님 늘 존경하고 감사합니다ㅠㅠㅠ💙
대통령님 끝까지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끝까지 지지합니다
아 눈물이 나긔 ㅠㅠㅠ 너무너무 죄송스럽고 감사하고,, 끝까지 지지하겠습니다 건강 또 건강하세요.
ㅠㅠㅠㅠㅠ또보러왔긔ㅠㅠㅠㅠㅠㅠㅠ눈물나긔ㅠㅠㅠㅠ
또 보러왔긔ㅠㅠ 그립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