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의 행복
유옹 송창재
사람은 얼마나 살아야 장생하는 동물에 속한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
학은 천년을 살고 거북이는 만년을 살고 코끼리도 제법 오래 산다지 아마.
그런데 얘들은 참 고고하게 사는 것 같다.
여유롭고 느긋하게 관조하며.
나만의 시각일까?
오래 사는 것이 무엇일까?
사는 것, 더구나 오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우리 복지관에서는 2학기 개관하면서 부터 지난 11월 달 말까지
인간수명의 물리적 연명에 반대하는 사전연명의료 행위에 대한 동의여부에 관하여 서명을 복지관 로비에서 받았다.
거의 석달쯤 한 것같다.
오래 산다는 것에 물리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포함이 될까?
이론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는 아니라고 할른지 모르겠으나 아마 실제적으로는
포함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이니까.
나는 예전부터 존엄사를 주장하여 고독사할 망정 숨을 더 쉬기위한 연명술에는 반대해 왔기 때문에 서슴치 않고 동의를 하였다.
산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닌, 삶이라는 의식적 존재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단편적 현상으로 무엇을 일반화 한다는 것은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일반화를 주장하기 위한 여론조사의 자의성과 조작성에 대한 문제점들과 따라서 공의에 대한 진정성에 많은 신뢰와 해석의 논란과 결과의 신뢰성에 통계의 오류를 포함한 의문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현상에 대하여 추측할 수는 있다.
우리가 삼삼오오 모여서 존엄사, 고독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대부분이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선각의 노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바람이고 남의 일 일때의 열린 사고이지 막상 나의 일 일때는 생각이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 복지관은 노인복지관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행정지원을 하는 사회복지사들을 제외하면 전부 노인들이다.
법적으로는 60세 이상이면 노인이어서 회원으로 가입할 수는 있으나, 아마 이런 노인은 가입하여 점심시간 식당에는 있으나 노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점심시간에는 주차장의 빈 공간이 없어서 주차하기에 쩔쩔매는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리가 텅텅 비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고
프로그램강의 시간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내 노인급에 속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진짜 노인들은 공부하고 젊은 노인들은 밥만먹고 가는 것이다.
싼 값으로 밥먹고 비싼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지관은 값싼 식당일 뿐이고 비싼 레져는 밖에서 연금타는 가진 것 있는 여유있는 사람들끼리 즐기면 될 뿐인 것이다.
이제 점점 노인복지관은
못 가진 노인들의 갈데없는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노인복지관의 이중구조가 사회적 문제가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노인에 대한 연령 규정을 언제부터로 하여야 적당할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여생의 길이에 대하여 당연히 생각하여야만 하는 사람들만이 복지관에 남아 공부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70대 중반쯤이나 되어야만 복지관의 카페에들 모여서 싸구려 커피라도 나누어 마시는 것이고 젊은 노인들은 야외의 카페로 나가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물과 기름인 것이다.
노인들에게도
벌써 나이와 소득에 따른 이중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다가는 삼중구조가 생길 날도 머지 많았다.
60대, 70대, 80대…
이로 인해서 노인복지관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구조의 많은 문제들이 파생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놓고 고담준론들이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가장 큰 이기적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부류들이 무지한 정치집단들이니!
진정한 진보와 보수를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진영의 힘의 논리적 주장들만 하고 있으니 기가막힌 세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명치료에 관한 호응도는 당연히 무관심이고 오히려 오도 가도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상늙은이들 일부분만이 조사 응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늙은이들도 로비에서 매일 앉아 서명을 받는 것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심정적으로 노인이라는 것에 대한 동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막상 평균수명이 어떻고 하면 우스개 소리로 몇년 남았다고 계산들은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동의는 계산으로는 나오지만 나 에게는 남의 일이 되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먹고 살만 하니, 좋은 것 고운 것 찾아서 먹고 노니 오래 살 밖에.
그래도 더 살고 싶은 것이다.
놀면서도 연금을 일할 때보다 더 받으니 황금의 시대를 누려, 자식들이 직장에 다니는데도 용돈을 쓰라고 두어 달 만에 기백씩 주어 황금수저를 만드는 능력있고 존경받는 여유들이 있으니 당연히 더 살고 싶을 수 밖에.
출생율은 떨어지고 평균 수명은 높아가 노인 인구는 갈수록 증가하니 당연히 초고령 사회가 되었고, 노동력은 부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풍족함과 물리적 생명연장 거부의 동의와의 상관관계를 정밀 조사를 해 보면 삶의 질에는 상관없이 아마 반비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참 허망하고
슬픈 현실이지만
많이 가져 풍족하면 오래 살고 싶고, 힘들면 오래 살기 싫다는…
그러면 여유가 없어 복지관에서 공부만 하는 노인들은 연명거부 비율이 높아야 할텐데!
그것도 아닌가 보더라.
이렇게 인간의 욕심은 늙은이가 빨리 죽어야 한다고 한다는 거짓말은 인간 삼대 거짓말이라더니!
이제는 삶의 가치도 돈으로만 환원하여 척도하여야 하고
물리적 연명치료에 대한 반대 서명도 가진 것 없는 늙은이들 만의 영역이니
살아있는 노인들이 많아 초고령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노인이 노는 젊은 자식들에게 술값
용돈을 주어야 하는 세상이 점점 더 현실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과연 무얼 말하며 정녕 사회의 진보이며 발전의 정기능인가?
점점 노인의 가치있는 어른으로의 역할이 없어져 가고 있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의 진보는 아닐 것이고 더더구나 인간 자존의 역기능이 되어가고 있으니 얼마를 더 늙어야 노인임을 자인할 나이가 되고 따라서 명실상부한 어른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십장생들은 과연 행복할까?
고고하게 날고, 걷고, 유영하는 그들은
십장생의 가치를 구가하며 삶의 가치를 관조하며 사는지 자못 궁금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십장생이 될것인가?
그러면 달라질 것인가?
진시황이 그리도 원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