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상운(柳尙運):인조14년(1636)∼숙종33년(1707)
할아버지는 해남현감 유속(柳洬)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유성오(柳誠吾)이며 어머니는 판서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字)는 유구(悠久)이며 호는 약재(約齋)․누실(陋室)이다. 아버지의 생부(生父)는 상의원 판관 유준(柳浚)이다.
현종1년(166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이듬해 승정원주서로 있다가 1669년 정언을 거쳐 1672년 충청도의 수해를 조사하는 어사로 갔다와서 수해가 심한 8개 고을의 군포(軍布) 등을 감면하여 줄 것을 건의하여 실현하였다. 이어 지평을 지내고 1673년 수찬․장령 1674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으며 숙종5년(1679) 한성부 우윤을 역임하고 문신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부총관으로 승진하였고 숙종6년(1680) 도승지․대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경신대출척때1) 허견(許堅)의 추대로 역모에 가담한 복선군을 탄핵하였다.
1)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이 조부 허잠(許潛)의 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를 열었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숙종은 궁중의 물건을 임의로 가져갔다고 노하여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다음달 허적의 아들 허견(許堅)의 역모 고변이 들어왔다. 인조의 손자 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허견․복창군․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나쁜 아들을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1683년 사은사의 부사(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나서 병조․호조참판 등을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초상을 그리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이른바 생사당이다. 숙종11년(1685)부제학․수어사 등으로 있으면서 숙종의 장인인 김석주가 노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정사를 전횡하려 하자 이에 반대해 여러 번 탄핵하는 소(疏)를 올려 기세를 꺾고자 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 1688년 이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숙종20년(1694)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에 대한 좋지 않은 글귀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되자 그를 처형하자는 노론의 주장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장희재를 처형하면 그 혐의가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에게 까지 미쳐 앞으로의 혼란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남구만과 합세해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노론의 지탄을 받아 한 때 삭탈관직 되어 성 밖에서 대죄(待罪)하기도 하였다.
그 뒤 우참찬을 지내고 1695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으며 1698년 노론의 배척을 받아 곤경에 처한 소론의 영수 최석정을 변호하다가 한 때 삭탈관직 되었다. 숙종25년(1699)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을 일삼는다는 노론의 탄핵으로 판중추부사로 물러나고 1701년 무고의 옥사로 투옥된 장희재의 종 업동(業同)을 죽이지 않고 유배 정도로 수습하고자 했으나 사건이 더욱 확대되어 장희빈이 연좌되었다.
세자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아 남구만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직산에 유배되었다가 1704년 석방되어 돌아와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복귀하였다.
조정에서는 강직하고 명석하며 과감한 행동이 있었고, 집에서는 청백(淸白)하였다. 국면(局面)이 여러 차례 바뀌어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았으나, 일을 맡아서는 용감하게 결정하여 지론(持論)이 구차스럽지 아니하였으며 성품이 너무 간솔하고 남을 따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에 있었지만, 집안사람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았고 자신이 사망한 뒤에는 상자 속에 남은 옷가지가 없었으니, 이 또한 남보다 뛰어나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 글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아직도 여러 곳에 금석 문자가 남아 있다. 나주의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전고대방에만 수록되어 있음.
[출처] ● 유상운(柳尙運):인조14년(1636)∼숙종33년(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