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張氏(안동장씨)
▣ 由 來
始 祖(시 조) : 張貞弼(장정필)
始祖(시조) 張貞弼(장정필,888~?, 諡號(시호)는 忠軒(충간)]은 中國(중국) 浙江省(절강성)紹興府(소흥부)에서 大司馬將軍(대사마장군)인 張沅(장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되던 892年(新羅 眞聖女王4年)아버지가 나라 政治(정치)가 紊亂(문란)하자 이를 避(피)해 新羅(신라)에 亡命(망명)할 때에 따라 들어와서 江陵(강릉)에 살다가 慶北(경북) 路田(노전)으로 移舍(이사)하여 定着(정착)하였다.
그 後(후) 18歲(18세)때에 中國(중국)으로 派遣(파견)하는 正朝使(정조사)를 따라 다시 中國(중국)에 들어가 24歲(24세)때에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였으나 벼슬을 辭讓(사양)하고 入山(입산)하여 弟子(제자)를 가르쳤다.
文章(문장)과 德行(덕행)이 뛰어나 名聲(명성)이 天子(천자)에게까지 알려져서 한때 벼슬이 吏部尙書(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慶北(경북) 仁同(인동) 路田(노전)에서 弟子(제자)들에게 學文(학문)을 가르쳤다.
930年(敬順王4年)에 金宣平(김선평), 權行(권행)과 함께 鄕兵(향병)을 모아 高麗(고려) 太祖(태조)를 도와 高廠郡(고창군)(安東)에서 甄萱(견훤)을 討伐(토번)하여 甁山大捷(병산대첩)의 戰功(전공)을 세운 三太師(삼태사)中(중)의 한 사람이다.
그 功(공)으로 三重大匡輔史壁上功臣太師(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에 오르고 高廠君(고창군)(安東)에 封(봉)해져서 後孫(후손)들이 本貫(본관)을 安東(안동)으로 하였다.
- 慶北(경북)安東(안동)盧山書院(노산서원)과 安東市(안동시)北門洞(북문동) 三太師墓(삼태사묘)에서 祭享(제향)한다
▣ 人物
張思吉(장사길) : 義州(의주)의 土豪(토호)로서 1390年(高麗 恭讓王2)密直副使(밀직부사)로 李成桂(이성계)의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에 功(공)을 세워 回軍功臣(회군공신)이 되었고,朝鮮(조선)開國(개국)에도 功(공)을 세워 開國功臣(개국공신) 1等(1등)으로 中樞院知事(중추원지사)에 올랐다.
張哲(장철) : 張思吉(장사길)의 아들. 高麗末期(고려말기)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1388年(禑王14) 아버지와 함께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에 功(공)을 세웠고 僉節制使(첨절제사), 永興府使(영흥부사)等(등)을 지냈다.
그 밖에 學者(학자)로는 張興孝(장흥효), 張世良(장세량)等(등)이 있으며, 洪景來(홍경래)의 亂(란)때 크게 功(공)을 세운 張夢說(장몽열), 張洛賢(장낙현) 父子(부자)도 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張正植(장정식) (1865 乙丑生) : 文科 高宗22年(1885) 式年試 丙科
張世良(장세량) (1627 丁卯生) : 文科 孝宗2年(1651) 式年試 丙科
張仲仁(장중인) (1594 甲午生) : 文科 仁祖13年(1635) 增廣試 丙科
張齊翰(장제한) (1862 壬戌生) : 文科 高宗25年(1888) 式年試 丙科
張景男(장경남) (1862 壬戌生) : 武科 孝宗2年(1651) 別試 丙科
張成吉(장성길) (1608 戊申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張乃賢(장내현) (1573 癸酉生) : 武科 光海君4年(1612) 式年試 甲科
張潚(장숙) (1624 甲子生) : 武科 孝宗2年(1651) 別試 丙科
張核(장핵) (1535 乙未生) : 武科 宣祖16年(1583) 別試 丙科
張麟壽(장인수) 1547 丁未生) : 武科 宣祖16年(1583) 別試 丙科
等 모두 51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4名, 武科 10名, 司馬試 20名, 譯科 16名, 醫科 1名)
▣ 行列字(항렬자)
31世 재(載)
32世 선(善)
33世 태(泰)
34世 주(柱)
35世 훈(勳)
36世 현(玹)
37世 용(鎔)
38世 수(洙)
39世 래(來)
40世 엽(燁)
41世 효(孝)
42世 철(鐵)
43世 영(永)
44世 상(相)
45世 환(煥)
46世 기(基)
47世 호(鎬)
48世 -
49世 -
50世 -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安東
安東(안도)은 慶尙北道(경상북도) 北東部(북동부)에 位置(위치)한 地名(지명)으로 古代(고대)에는 昌寧國(창녕국)인 小國(소국)이었다.
新羅(신라)가 이곳에 進出(진출)하여 古陀倻國(고타야국)으로 불렀고, 757年(景德王16)에 高敞郡(고창군)으로 改稱(개칭)하고, 直嶺縣(직령현)·日谿縣(일계현)·高邱縣(고구현)을 領縣(영현)으로 管轄(관할)하였다.
940年(高麗太祖23)에 安東府(안동부)로 昇格(승격)되었다가 後(후)에 靈駕郡(영가군)으로 降等(강등)되었고, 995年(成宗14)行政區域(행정구역)改編(개편)때 吉州(길주)로 昇格(승격)되었다.
그 뒤 몇 次例(차례)의 變化(변화)를 거쳐 1030年(顯宗21)에 安東府(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年(明宗27)에 都護府(도호부)로 改稱(개칭)되었고, 1204年(神宗7)에 大都護府(대도호부)로, 1308年(忠宣王卽位)에 福州牧(복주목)으로 繼續(계속)昇格(승격)되었으나,
1310年(忠宣王2)에 福州(복주)로 降等(강등)되었다.1356年(恭愍王5)에 다시 牧(목)으로 昇格(승격)되었으며, 1361年에 다시 安東大都護府(안동대도호부)로 昇格(승격)되었다.
1383年(禑王9)에는 安東都(안동도)로 改編(개편)하였다가 1388年에 府使(부사)로 還元(환원)하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도 安東大都護府(안동대도호부)로서 慶州(경주)와 함께 慶尙左道(경상좌도)의 大邑(대읍)으로 政治(정치)·行政(행정)·文化(문화)의 中心地(중심지)役轄(역할)을 하였다.
石陵(석릉)·古寧(고령)·花山(화산)·綾羅(능라)·地平(지평)·一界(일계)·古藏(고장) 等(등)의 別號(별호)가 있었다.
1895年(高宗32) 地方制度改正(지방행정제도개정)으로 安東府(안동부) 安東郡(안동군), 1896年에 慶尙北道(경상북도)安東郡(안동군)이 되었다.
1931年 邑面制(읍면제)를 實施(실시)함에 따라 安東郡(안동군) 府內面(부내면)이 安東邑(안동읍)으로 昇格(승격)되었으며, 1963年에 安東邑(안동읍)이 新安東市(신안동시)로 昇格(승격)되었다가 곧 安東市(안동시)로 改稱(개칭)하였다.
1995年 安東郡(안동군)이 安東市(안동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安東張氏(안동장씨)는
1985年에는 摠 15,086家口 64,814名,
2000年에는 摠 25,552家口 83,961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출처] 安東張氏(안동장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