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셋째 이야기,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46)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처음 장종웅의 과거를 들은 뒤 88년, 89년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이 되면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고, 3당 합당이 이루어지자,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 두 사건이 같은 날 이루어졌다는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1월 22일로 기억하는데 신돌석씨는 지역의 노동자들과 함께 관악산을 타고 서울대로 진입하였다. 서울대에서 꿈에도 그리던 전노협 결성 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보가 샜는지 서울대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결성 대회는 취소되었고, 노동자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산을 타고 신림동, 과천 등지로 흩어졌다. 신돌석씨 일행도 신림동의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3당 합당 소식을 들었다. 노태우가 가운데 서서 어쩌구 저쩌구 떠들고 김영삼과 김종필이 그 옆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김영삼은 어색한지 자꾸 몸을 이리저리 틀었는데, 같이 보던 사람들 중에 군대를 안 갔다 오니 저런다고 말해서 다들 한바탕 웃었다. 사실 김종필이야 어차피 그런 거고 김영삼은 낯간지러운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니 그럴 것이었다.
3당 합당 뉴스를 보면서 술만 들이키던 노동자들에게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서 전노협 결성대회가 성공리에 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에는 핸폰도 없었는데 지금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이리저리 연통하는 것을 마련했던 모양이다. 만세를 외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좋아라 했다. 술집 주인도 우호적인 사람인지 축하한다고 서비스 안주도 내주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서울대 학생들이 데모가 끝난 뒤 자주 찾는 술집이고, 이 지역 빈민운동하는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날 2차를 갔다가 장종웅을 만났다. 그도 전노협 결성 때문에 왔다가 신돌석씨와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술집을 찾은 경우였다. 둘은 너무 반가워서 3차까지 갔다. 거기서 사달이 생겼다. 장종웅이 술이 많이 취해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근방에는 자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신돌석씨와 만났을 때는 술이 좀 오르면 일어나서 나가곤 했었는데 그 뒤로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때는 그 까닭을 몰랐다. 다만 너무 변해버린 그의 행동에 신돌석씨는 망연자실하였다.
장종웅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희은이 불렀던 ’늙은 군인의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것이었다. 그때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은 ‘투사의 노래’로 불렀는데, 그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로 불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로 시작하고,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으로 끝을 맺었다. 같이 갔던 노동자들이나 다른 자리에 있던 노동자들이 함께 불렀다. 그런데 그가 그 노래를 부르고는 갑자기 원래 노래인 ‘늙은 군인의 노래’의 가사로 바꾸어서 불렀다. 갑자기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군가 소리를 쳤다. 어이 형씨 군바리 노래는 왜 불러? 형씨가 군인이야? 그러자 장종웅이 그를 째려 보더니 큰소리로 대거리를 했다. 그래, 나 군인이었다. 그것도 공수부대였다. 어쩔래? 내가 씨팔 성남에서 비행기 타고 부산에 갔어. 거기서 폭동 진압했어. 뭐 잘못 됐냐? 나 시키는 대로 한 거야. 어쩔 거냐? 군인도 노동자야. 배가 고파서 하사관으로 갔고, 거기서 좆뺑이치다가 시키는 대로 한 거지. 나라 지키라고 하고는 내 형제 내 이웃 내 가족을 두들겨 패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군인은 다 죄인이냐? 시켜서 한 건데도 죄인이야?
신돌석씨가 얼른 장종웅을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술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장종웅이 울기 시작했다. 안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광주에서 사람깨나 죽였겠네. 저런 게 노동운동한다고 끼어들다니. 장종웅이 뛰어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신돌석씨와 함께 했던 노동자들이 그를 꽉 붙잡았다. 신돌석씨도 그런 말한 놈들의 면상도 보고 한 대 갈겨 주고라도 싶었지만 더 이상 문제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소리치고 울고 몸부림치는 장종웅을 끌고 근처에 산다는 노동자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재웠다.
[삽화-백소(白笑)]
얼마 뒤에 만난 장종웅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는 정말 다행으로 광주에는 안 갔다고 했다. 80년에는 서울로 배치되어서 어느 대학에 주둔해 있었단다. 몇 달 지나서 휴교령이 풀리면서 원대로 복귀했단다. 그는 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신돌석씨에게 믿어 달라는 투로 대학에 배치되어서 근무하던 때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토요일 밤이었는데 갑자기 비상이 떨어지면서 완전 군장하고 이동을 했단다. 부마항쟁 때의 기억이 있어서 기분이 안 좋았는데 다행히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갔단다.
서울에서는 5월 15일의 이른바 남대문 회군 이후 시위가 소강상태가 되면서 주말이라 그런지 학교 안에 학생이 거의 없었단다. 일단 학교 여기저기를 수색해서 학생들을 잡아다가 운동장에 꿇어 앉히고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했단다. 자기 동기나 선임, 후임 중에 광주로 배치되어서 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 뒤에 상당수가 폐인이 되었단다. 쿠데타로 권력, 돈을 차지한 놈들은 계급이 높은 놈들이고, 하사관이나 병들은 그 트라우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장종웅은 자신도 광주에 갔으면 지금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장종웅은 자기가 부산에서도 강경하게 진압에 나서지는 못했다고 했다. 시위가 잦아드는 밤늦게 여관, 여인숙을 뒤지는 일들을 했단다. 한번은 어느 여인숙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봤다. 같이 있는 사람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 시위를 하고 들어온 사람이 거의 틀림없었다. 하지만 장종웅은 모른 척했다. 함께 간 병사들이 다가오는데 문제 있는 사람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해서 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때 공수부대에게 연행되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리곤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눈 감아 주는 공수부대를 보고 옛날 생각이 났다고 한다.
보수대연합을 통해 절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군사독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다. 아예 대놓고 전노협을 와해시키겠다고 했고, 그것이 신문 1면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전노협 결성에 함께 한 노동자들의 생각은 언제 니들이 안 그랬냐는 식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약했고, 서툴렀지만, 희망만은 훨씬 더 강했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할 거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탄압의 신호탄이 울리자마자 전노협 결성을 주도한 위원장과 간부들을 대거 구속, 수배하였을 뿐 아니라, 노조들을 업무조사라는 이름으로 샅샅이 뒤져서 괴롭혔다. 1987년 이전까지 군사독재는 노조에 대해 업무감사라는 권한을 법률에 규정하고 그것으로 노조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지만, 그해 11월 노동조합법을 개정한 이후에 업무조사라는 것으로 조금 완화되기는 했다. 하지만 업무조사만으로도 노동조합은 완전히 털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언론이 떠들어대니 노조가 마치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신돌석씨는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 윤석열 정부가 하겠다고 하는 노조에 대한 회계 감사 어쩌구 하는 것의 저의가 빤히 보인다. 노동자들이나 시민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야비한 짓이다. 노조가 조합원에게 재무상태를 공개하면 되는 것이지 정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노조들은 법이 정한 기한 내에 착실하게 재무상태를 공개하고 있다. 저들이 쉬지 않고 탄압해 왔는데 노조가 허술하게 할 리가 있는가? 이전 군사독재 시절 어용노조가 했던 것이 기억되는 사람들이 이런 보도에 속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들의 이러한 짓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쥐어짜기 직전에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매타작을 하는 식이다. 그때도 자본의 이익을 위한 구조조정을 위해 쥐어짜기가 필요했다. 그때 이후 자본시장이중구조가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비정규직이 널리게 된다. 그 전에 이에 대해 저항할 전노협 산하 민주노조들을 탄압하고, 부정의 이미지를 덧붙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노조들을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전노협은 그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삽화-백소(白笑)]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적으로 경제 불황이다. 그것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자본이 여기서 견디고 이윤을 확보하는 길은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늘리고, 임금을 교묘하게 줄여야 한다. 자본이 원하는 대로 노동자를 순치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매를 들어야 한다. 일단 앞장서서 저항하는 자들을 두들겨 패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노동자 대중을 분리시켜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감당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야 한다. 노동자는 어제의 노동자가 아니다. 힘이 있고, 깨어 있다.
전노협 결성과 3당 합당 이후 노동탄압이 거세지면서 해고자 복직투쟁은 어렵게 되었다. 회사 앞에 가서 시위만 하면 무조건 경찰이 달려와 잡아들였다. 대공장 주변에는 아예 경찰이 배치되었다. 장종웅은 30여 차례 연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직사건들을 조작해 내면서 해고자 중에 연루된 사람들이 있어서 모임이 어려워졌다. 생활고에 지친 해고자들이 복직을 포기하고 재취업들을 시도하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지역을 옮겨도 걸리기 일쑤였다. 농촌으로 귀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농사도 더 어려운 현실이었다. 암담한 때였다.
신돌석씨도 이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노조결성투쟁, 파업투쟁 등이 한창일 때 제3자 개입금지로 수배되고, 1990년에는 노동단체가 침탈당하면서 수배되더니, 마침내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대공분실에서 수배되고, 결국 체포되어서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신돌석씨야 조직에서는 크게 활동한 바가 없기 때문에 집행유예로 나왔지만, 아무튼 그 기간에 고생을 했고, 지역도 옮기게 되었다. 장종웅과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대통령 선거가 되고 국민승리 21 활동을 지역에서 하였는데, 유세를 응원하러 다니다가 인천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장종웅은 그 동안 새로 취업을 하였다. 자동차 공장에서 복직투쟁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고,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노조가 이제 그만하기를 종용하였다. 함께 할 사람도 하나 둘 사라졌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협력업체에 취업을 알선해 준 경우가 많았다. 그때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다 알게 된 후배들이 악기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려고 하니 이제 복직투쟁은 그만하고 새로 노조를 만들어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안하였다. 이따금씩 만나서 조언을 듣던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선배들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악기 공장에 취직했다고 한다.
악기 공장에 취직하고 노조를 만들 준비를 하는 몇 년 동안 장종웅은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시간을 가졌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우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장종웅은 해고된 뒤 수입이 없이 살았다. 이따금씩 건설현장에 가서 일용직으로 수입을 얻었지만,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금세 그만두었다. 그런 가운데 성당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는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앙심이 돈독하였고,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말씀은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애들도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생겼다.
가정을 꾸리고 아내가 공장에서 버는 돈으로 살아갔는데 장종웅이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하자 살기가 괜찮아졌다. 회사는 이전 자동차 회사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재정상태가 알찼다. 그리고 전세계로 수출망을 갖고 있어서 매출이 나날이 증가했다. 사장도 악기에 조예가 있어서 그런지 이전에 보던 사장들과는 달리 상당히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노동자들의 고충을 이해한다면서 웬만한 것은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장종웅은 여기서 노조를 만들어서 탄탄하게 꾸려가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꿈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노조를 만들자 회사 관리자들이 갑자기 장종웅의 전력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외부세력인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사주를 받는다고 노동자들에게 이간질을 시키기 시작했다. 장종웅은 정말 있는 놈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첫 임금교섭을 했는데 이전보다 더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경제가 어렵다나 어쩐다나. 말도 안 되었다.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사장은 장종웅을 보아도 눈길 한번 주지 않으려고 했다.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기분이 지속되는 나날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