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마이산의 메아리 전국시낭송대회-8월28일(수)마감, 10월5일(토)본선(지정시)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 선생 연보
출생 및 사망
박병순(朴炳淳) 1917.12.23 춘당 박종수 , 김성녀의 맏아들로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적내 1245번지에서 출생함.
2008년 12월 3일 정오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삼환아파트 10동 304호에서 92세를 일기로 별세함.
학력
진안공립보통학교 졸업(1933),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 졸업(1939), 전북대학교 문리대학 국문과 1회 졸업(1954),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국문학 전공) 2회(1956)졸업. 논문 <현대시조의 한 고찰>로 문학석사 학위 받음.
교육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 전주중, 전주 남중, 전주상고, 전주고, 남원농고, 이리공고, 전주공고, 진안 농고, 전주여상고, 전라고, 임실고 교사 역임(1939 - 1978)
전주대학교, 명지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시조창작론, 고전세미나, 시조가사론 등 강의(1965 - 1991)
문단
1938 <동광신문>에 시 <생명이 끊이기 전에>와 조선일보 학생문예란에 수필 <청어장수> 발표.
1952 - 1960 시조 최초 전문지 <신조> 5집까지 발간
1954 사화집 <새벽> 발간
1958 <현대문학>에 <김만경><생명><철창일기> 발표
1964-1970 한국시조작가협회 이사
1976 전라북도 문화상(시조창작 부분) 수상
1978 제3회 노산문학상(시조 창작 부분) 수상
1979-1996 노산문학회 운영이사, 가람문학상 운영위원
1988 제2회 황산시조문학상 수상
1991-1992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1994 제9회 표현문학상 수상
1996-2004 너른고을 문학 모임 명예회장
1999-2003 월간 <문학 21>편집위원,지도위원
2002 우리말글 지킴이 위촉 받음(문화관광부 장관, 한글학회장)
2004 국가 유공자 증서 받음
2004 진안 군민 훈장 대장(진안 군수) 받음
2007 가람시조문학상 공로상 수상
2008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공로상 수상
저서
1956 처녀시집 <낙수첩>,항도출판사
1971 제2시조집 <별빛처럼>,금강출판사
1973 제3시조집 <문을 바르기 전에>,세운출판사
1977 제4시조집 <새눈 새맘으로 세상을 보자>동화출판사
1977 화갑기념 <구름재 시조선집>,대광문화사
1981 제6시조집 <가을이 짙어가면>,새글사
1985 <한국시조 큰사전>한춘섭, 리태극 공저,을지출판공사
1986 제7시조집 <진달래, 낙조처럼>,청한문화사
1991 제8시조집 <해돋이 해넘이의 노래>,뿌리
1993 <구름재 시조전집>,가꿈
1997 제10시조집 <행복한 날>,세원
2003 제11시조집 <먼 길 바라기>,토우문원
[대표 시조 작품]
1. 병이 짙어지면
한번 병이 짙어지면 동기도 쓸데없다.
마음은 못 잊어도 항상 힘이 못 닿아,
애닯아 애닯아하다가 그만 놓고 말 겐가!
한 핏줄에 태어나서 한 젖 물고 크던 오뉘
장가시집 그 한 모금이 이토록 머온 건가?
처자를 먹이노라고 쩔쩔매는 이 꼴여!
“가지가 휘어지도록 울밑에 붉은 앵도
한 알도 축날세라 아끼고 또 아끼어
네 마음 소복이 담아 뿌끄리던 그 순정!“
순정 그 한 올이 소중히 남아 있어,
가쁜 숨 몰아 온 누이 홀로 방에 눕혀 두고,
별빛을 바라다보며 평상 위에 누웠다.
밤이 이슥토록 자지러진 기침 소리......
뉘 손으로 문질러야 가슴이 나으오리까?
어머니 상기 넋이 계시옵거든 이 한 딸을 살리소서.
한번 병이 짙어지면 순정도 소용 없다.
생각느니 마음뿐, 무엇으로 보탤거나?
뒤돌아 보고 보며 가물가물 사라져 간 흰 한 점!
2. 도솔산 도솔천
구름재 박병순
미인이 따뤄 주는 복분자 술을 마시고,
소쩍새 소리 들으며 숲을 헤쳐 가노라니,
때때로 새어 나는 달이 길을 인도하누나.
‘자연의 집’ 앞에 다다르니 다리 하나 걸렸는데,
도솔산 도솔천에 달흐르는 소리…
그 소리 시세우는 듯 천막 아래 잡 소리.
도솔산 도솔천을 가슴에 안아도 보고,
귀에 담아도 보고 마주 우러러도 보고,
새도록 애를 못 새겨 창을 열어도 보고.
도솔산 도솔천에 아침 해가 눈부시다.
그 황홀 그 태고를 마시러 나갔다가,
캠핑 온 젊은 남녀에게 이 선경을 앗겼네.
이슥도록 정을 나눈 스승이며 동지들이,
또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오붓한 설계를 나누는 속은 규방도곤 좋구나.
동백꽃 선운사에 꽃철은 비꼈어도,
백일홍 만발하여 운치를 돋구는가 !
대전 앞 향을 머금고 임의 명복 비누나.
3. 항구
구름재 박병순
어느 항구로부터 나와 어느 항구로 향하는 배뇨?
하늘도 수평도 아니 보이는 푸름을 잃은 바다……
나침도 기관도 헛되이 너울대는 한낱 허울.
물밑을 자맥질하여 몇 억만 리를 헤매었는지?
수렁속 같은 바다밑을 몇 겁을 두고 헤맸는지?
저 저기 가몰가몰 떠오르는 등대처럼 불빛 하나.
얼마 만한 깊이에서 어찌 용케 떠올랐는지?
아몰거리던 세상이 또 다시 천천히 열리고,
기능을 잃었던 선체에도 미온이 돌기 시작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콩알 만한 힘이 솟아나,
고 콩알 만한 힘으로 하여 온 몸을 가누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란 이렇게도 미미하고 신비론 것.
어느 항구로부터 나와 어느 항구로 향하는 배뇨?
하늘도 수평도 파도로 술렁이는 망망한 바다……
정상을 찾아 출항을 챙기는 공포에 떠는 새벽 항구.
4. 쑥국새 운다
구름재 박병순
아침 이슬 마시고 깊은 골 쑥국새 운다.
푸르름을 마시고 산 마을 쑥국새 운다
푸름에 겨워서 대낮을 쑥국 쑥국새 운다.
이침 이슬 머금고 소반새 운다.
푸르름 머금고 또르르 또르 소반새 운다.
은 구슬 굴리듯 또르르 또르 소반새 운다.
언제나 돌아와서 산새와 함께 살며,
어쩌면 돌아와 산새와 함께 놀며,
피먹진 가슴을 풀게 나도 함께 울거나
5. 책.3
구름재 박병순
헐벗고 굶주려 모은 소중한 수만 권 책이,
이제는 짐이 되어 운신조차 어려운데,
평수를 줄여야 할 운명이니 이를 장차 어쩔고?
책이 힘이자 생명이자 종교였는데,
그 굳게 믿던 희망과 보람의 성벽 무너지는가!
장서를 넉넉히 늘어놓고 법열할 날 언제뇨?
자식에 미뤄 주자니 또한 그에게 짐이 되고,
남에게 주는 건 헛짓 증정도 그리 만만찮은데,
낙향해 꾸린 책짐을 펼칠 수 없음 자못 막막쿠나!
세상에 이런 신세 어디 또 있을까?
하늘 보고 땅을 봐도 호소할 곳 망연하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굶(구멍)있단 말도 헛거로고.
이리 되작 저리 되작 곰곰이 생각는다.
엎치락뒤치락 몸살난 듯 발광일다.
해돋이 해넘이를 꿈에라도 가슴 열어 환희한다.
그리 좋은 책이 짐 되어 원수될 줄 알았던가?
밀릴대로 밀리다가 망할 때 망할망정.
아직은 서권기 속에 황홀한 삶 누리자.
금보다 귀한 것은 책 위에 더 있는가!
사람 재는 잣대도 책 아니고 어니 헤리?
혼령도 호랑나비 되어 책갈피를 감돌리라.
6. 해넘이의 노래
-해돋이로 살고파라
구름재 박병순
서녘 하늘 넘는 해가 영창 휘황 되비췰러니,
황홀히 일렁이다 벌겇게 달아 올라서,
애달아 숲에 얼굴 묻었다가 정적 가쁜 숨 덜컥 진다.
해돋이 그 밖에는 모르고 살아온 낼러니,
올 들어 저절로 깨치게 된 해넘이의 뜻,
해넘이 해넘이의 몸부림을 이제 어렴풋 알리로다.
해는 오늘 금방 져도 내일 또 해돋이로 뜨련만,
사람은 한 번 지면 어둠 속 몇 겁을 헤멜런가
인생도 해넘이가 해돋이로 영원으로 살고파라.
7. 이별 . 4
구름재 박병순
이별도 여러 가지다 사람과의 생사 이별……
아낙의 남편에 비긴 바늘과의 애달픈 이별
남정의 심혈과 숨결이 스민 책과의 애돌한 이별도.
수만 장서를 갈몰만한 넉넉한 공간이 없어,
갑자기 대학 도서관에 너를 넘긴 침통한 밤이여!
만인의 영원한 빛이 될 자릴지라도 슬픔은……,
사서계장님 동료와 학생 열여덟을 거느리고,
아침 아홉 시 반서 하오 네 시 반까지 걸려,
옮겨간 내 생명의 분신들의 애절한 절규에 궐 막는다.
못난놈! 어떻게 고생 고생 힘겹게 모은 책들인데,
평생 정든 책을 불시에 넘겨 줄 수 있단 말인가!
허탈코 허전한 가슴을 안고 몸부림치는 나날이여!
울어 보아도 불러 보아도 이젠 할 수 없는 일이다.
도서목록이 되고 도서분류가 이뤄져,
구름재 서재의 기능이 발휘돼 서권기 넘치길 빌고 빈다.
이별은 하였으되 인연이 끝난 건 아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에 더 채우고 갖추어서,
이룩된 서권의 갈피갈피를 넋은 나비 되어 날리라.
8. 초록 따라 바람 따라
구름재 박병순
꽃철 비껴가고 초록이 번지는 철에,
바람이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으니,
잎잎이 하늘하늘 흥겨워 서로서로 손짓한다.
나무들도 흥에 겨워 제 몸을 흔드는데,
시드는 몸이라서 어찌 흥이 없을소냐!
나뭇잎 손길 좇아 따라가면 누군가를 만날까?
살랑이는 바람 따라 숲길을 헤매이면,
저기 바람 따라오는 인기척이 있어,
귀 열면 귀울림 소리소리 환호하는 아우성-.
9. 감자를 긁으며
구름재 박병순
아내가 함지를 담근 감자를 깎으라 한다.
난 제일 닳은 수저로 감자를 닥닥 굵으며,
함박에 그득한 감자를 긁던 어머니를 본다.
더러는 작은어머니 누이동생 모습도 보이고,
버리쌀 위 쌀을 얹고 그 위에 감자를 부어 찐,
드북히 보리밥상 먼저 내놓던 희부연 감자 사발!
김 모락모락 오르는 감잘 젓가락에 찍어 불며 먹던,
그 포근포근한 맛 지금도 달가와서,
어머니 누이동생 작은엄마 환상 그려 감잘 긁다.
10. 새 하늘에 부치는 노래
구름재 박병순
모진
그 가난이
돌고 돌아 몰려와도,
마음은
속절없이
철따라 부푸는 밤......
흐믓이
날리는 눈발 위에
제 가락은 풀린다
구들은
식어 와도
꿈자리는 달가와,
하나
둘
꽃송이가
살포시 안기우며,
지그시
아늑한 포옹에
눈이 부신 새 하늘......
황홀하다기보다
차라리 가슴이 벅차
발돋움한 채
은자락을 날리며,
와르르
달리어올 듯
반겨 웃는 기린봉......
11. 가을.2
–산상 즉흥(山上卽興)
구름재 박병순
하늘이
너무 높아
마음 둥실 떠오르고,
김만경
황금 물결
가슴 활짝 트이는데,
무배추
파아란 이랑
더욱 눈에 새롭다.
금물결
바다 위에
그름이 지나가고,
흰 모래
굽이굽이
강도 맑게 흐르는데,
때마침
기적이 울어
가을 흥을 돋운다
햇볕이
그립도록
바람 한결 서늘하고,
들국화
하늘하늘
그 향도 그윽하고,
우리들
젊음은 모아
웃음꽃을 피우누나!
12. 포플러
구름재 박병순
넌 성숙해서 좋구나
늙음이 없어 더욱 좋구나.
반공에 치솟아
우쭐대는 너를 보면,
땅을 다지고 서서
하늘로 뻗는 네 기상!
오가는 사람에
희망을 주는 느늘에 서면,
외롬은 금방 사라지고
도로 어려지누나.
위로 솟으면 숲을 이루고
옆으로 뻗으면 그늘을 짓는,
그 밋밋한 몸매에
시원스런 차림으로
까마득 향수를 잊고
날로 꿈을 푸르누나.
오늘 아침사
새로 한 살 난
내 안에 한 그루 널 심노니,
푸르름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고,
한 평 땅
그늘로 하여
저 에덴을 가누누나.
13. 가을이 짙어가면
구름재 박병순
우물가 감나무에 더런 감이 발갛게 익어 가고,
아직도 뜨락엔 장미가 볼 붉히고,
푸르른 하늘에 흰구름 한 점 두웅 한가롭다.
허전했던 가슴에 기쁨이 와 철렁여도,
슬픔은 슬픔대로 물거품처럼 떠오르고,
낮달이 종이배 되어 이 안을 안고 간다.
차츰 가을은 짙어 가는데 가을에 깊이 젖지 못함은,
이 고동 설레임 아닌 불안과 초조에 떪이런가?
언제나 마음의 고요를 얻어 여유론 세월 누릴꼬.
철따라 제비 떼 떼지어 남으로 가면,
기러기 목을 뽑아 날아들 오련만,
내 속에 자리한 욕망이란 샌 가도 오도 못하나!
14. 산마을 닭의 울음
구름재 박병순
고향집
뒷문 쪽에 누워
첫닭 우는 소리 듣노라면,
허황으로
들뜬 마음
어디로 다 달아나 버리고,
참되고
순수하고 꾸밈없는
제 맘자리로 돌아간다.
얼푸시
잠들었다
두 홰째 닭 소리 듣노라면,
허욕으로
부푼 마음
간 데 없이 달아나고,
착하고
순박하고 거짓 없는
내 맘자리로 돌아온다.
세 홰
네 홰
거듭 홰치고
닭 우는 소리 듣다 보면,
허영으로
꽉 찬 마음
가뭇없이 사라지고,
구차한
세상 일 모두 떨치고
장군 메는 농군 된다.
15. 이 밤길
구름재 박병순
막걸리를 마시다가 막차를 놓치고서,
걸어서 접어 가는 아흔아홉 굽이
호랑이 울어 골을 울리어도 가야 하는 이 밤길.
달빛을 밟으며 도는 굽이굽이
눈길을 싸목싸목 또 돌아가노라면,
별빛도 초랑초랑히 내 갈 길을 밝히는가!
가다가 지치면은 주막에 쉬더라도,
이 밤이 새기 전에 이 길을 벗어야 한다.
다 와서 햇빛을 보면 춤을 덩실 추리라.
16. 책 숲에 누워 . 1
구름재 박병순
남들은 책더미 속에 묻혀 숨막히고 답답다지만,
나는야 책숲에 누워 잠도 자고 꿈도 꾸고
책 읽고 사색도 하고 환희 작약 창작한다.
여름 방학 겨울 방학 겨울잠 여름잠 당해 내고,
가난도 모멸도 구설도 중상도 배신도 배겨 내고,
나 홀로 더불어 숨쉬는 책숲 누리며 산다.
내가 살다 죽는대도 서책만은 남으리니,
책 속에 어린 학ㆍ예맥 자자손손 뻗어 나가,
책숲에 이어진 푸른 하늘을 줄기차게 열리라.
반나마 창 너머로 해도 뜨고 달도 뜨고,
눈을 감아도 별도 총총 스며든다.
서권기 환한 책숲에 누워 별똥 하나 줍는다.
17. 새눈 새맘으로 세상을 보자
구름재 박병순
나완 인연이 아주 멀던 창 너머 바깥 풍경이,
곱디 곤 아침 햇살 타고 환하게 드러나는구나 !
빠알간 양옥도 나란히 앉은 못등도 새롭고도 정다와라.
기린봉 넘는 한 떨기 구름 정말 깨끗이 피어나고,
버드나무 실가지에 감기는 바람 진정 곰살갑다.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온통 눈물겹고 눈부셔라.
어디서 오는 경이와 벅찬 감격과 법열이냐?
오늘 따라 완산 야경이 유난히도 아름다움은,
승화된 이 가슴의 탓이려니 새 눈 새 맘으로 세상보자.
새 눈으로 자연을 보고 새 맘으로 세상을 보며,
추한 것과 약한 것은 아예 거떠보지도 말고,
어질고 착하고 맑고 곱게만 이 세상을 살자
18. 청매―가람 스승님의 ‘청매’자작 친필 앞에서
구름재 박병순
반기시던 그 청매분 간데온데 없사와도,
그 정 그 정성은 작품으로 외오 남아,
청매는 제 철을 맞은 듯 이 방 안에 벙글었다.
대체 복이란 건 있고도 없는 것이,
만나고 헤어짐도 지내나니 그림자를,
청매는 넋으로 피어 이 내 안이 벙벙하다.
봉마다 방긋방긋 구슬보다 영롱한 꽃!
오늘 아침 버는 향이 잔 위에 번지는데
상머리 좀먹은 고서를 펴는 임의 환영 그렸다.
내가 보다 죽어 간 뒤 서폭만은 남으리니,
이 글 이 글씨에 이 숨결 다시 서려,
청매는 가슴마다에 오래 두고 피리라.
19. 사랑·1
-가람 스승님께
구름재 박병순
스승
깊은 정이
이 몸의 뼈에 저려,
대문을
나설 지음
핑 도는 눈물 모아,
높으신
그 뒤를 딸겠노라
다짐하는 이 한 뜻.
글만이
배움이랴
술에도 길이 있다.
깊이 둔
유하주(流霞酒)를
손수 찾아 따루시고,
안주를
먹이고서야
보내시는 그 마음!
백발
성(盛)한 몸이
분란(盆蘭)을 가꾸시고,
난(籣)잎
하나 하나
닦아서 윤이 나고,
가다가
꽃이 피는 날
향(香)을 반겨 하신다.
가람
깊이 어려 있어
한 천 겁(千劫)을 흐른대도,
그침 없을
흐름 따라
구름은 피오리니,
하나로
쏟히는 정성
피고 피어지이다.
20. 별빛처럼
구름재 박병순
덥수록한 내 수염을 깍아 주며 소녀가 묻기를,
“선생님, 선생님이 시인이셔요 ?” “왜 ?”
“시조집 ‘별빛처럼’을 좀 훔치어 봤어요.”
더운 물수건을 갈아 지긋이 눌러 주며 청하길,
“선생님 저에게 시를 한 편 써 주실수 없어요?”
“소녀가 읽던 ‘별빛처럼’을 좀 더 읽어 보아요.”
여느 때보다도 잔 수염을 밀어주며,
“여러 사랑 가운데도 그 이성의 참사랑 말예요 ? 예!”
“그 책을 다 읽어도 모르겠거든 저 하늘 별을 보아요.”
~중략~
아직도 더운 물수건 한쪽을 살포시 떠들며,
“선생님 그래도 사뭇 깨치지 못할 때엔요?”
“별처럼 별빛처럼 살아 가자구 별빛처럼 별처럼…”
21. 아버지 ∙ 2
구름재 박병순
열 셋에 장가가고 열 여섯에 할아버지 잃고,
뭇 빚장이에 졸리고 시달리고 보깨어도,
장부의 기개와 의지는 그럴수록 굳었다.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인단” 말은 당신의 철학 !
서른엔 두주가 넘쳐 곳간 짓고 사랑채 짓고,
오가는 과객을 불러 지관 극진 환대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자나깨나 ‘장군 대좌’...
묫자리 놓고 십년 재판도 승소하고,
큰돈에 지성 끝에 대질 사서 현몽으로 명당 썻네.
초하루 보름 상관없이 사흘이 멀다 성묘하고,
지관만 보면 앞장서 산소 자랑 일일러니,
이제는 선산 그 발치 아버지 누울 자릴 잡았다.
일제의 탄압 속에 네 남매를 가르치고,
해방 후 거듭 여섯 남매 가르치니,
막내도 올엔 여고 졸업반 장하신 울 아버지.
22. 다시 낙조처럼
구름재 박병순
내 생애
아무리
서럽고 괴로웠대도
임종만큼은
저
낙조처럼 고와야지
저녁놀
헤치고 깜박 숨지는
황홀황홀 저 한 점.
구름
흩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도
서녘 하늘은
마지막
거룩한 잠자리
낙조는
빈 하늘 한 가닥
서광으로 남는다.
23. 문을 바르기 전에
구름재 박병순
총총히 먼 길을 떠난 지 하마 보름도 넘었는데,
네 뚫고 간 문구멍을 아직도 막지 않은 뜻은,
그 구멍 너머 귄이 쭉쭉 흐르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침 저녁 선들거리고 비바람 사납게 부는 날도,
네 뚫고 간 문구멍을 상기도 막지 않은 뜻은,
고 구멍 너머 정이 찰찰 넘치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가을 큰비바람 끝에 둘레 한결 스산한데도,
네 뚫고 간 문구멍을 차마 가리지 못한 뜻은,
이 구멍 너머 힘이 철철 감돌던 생명 붙안고 싶어서다.
총총히 먼 길을 떠났듯 어서들 빨리 돌아오라,
장미꽃 이제도 피고 국화 향기로운 뜨락으로,
수 없이 찢고 간 문을 바르기 전에 종종걸음쳐 빨리 오라.
24. 추모(追慕)
– 다시 어머님 앞에
구름재 박병순
철없는 자식이라 불효타 마옵소서.
고지식한 이 자식을 무능타 마옵소서.
타고난 바탕과 운명 새삼 어찌하오리까!
어머니 사철 옷을 부드럽게 못 하옵고,
철따라 바뀌는 입맛 못 맞추는 주제에도,
외따로 늙는 외로움을 위로 한 번 못 한 천치.
어머님 가오신 뒤 변하옴 없사오나,
날로 솟는 설움 하늘에 닿사옵고,
초록도 눈물에 젖어 실성하여 우옵니다.
어머니 그 은혜를 이제사 깨치오이다.
어머니 그 사랑을 이제사 느끼오이다.
드높은 어머니 모습 환영 되어 피오이다.
어머닐 여의옴은 우주를 잃음이요,
우주를 잃으오매 고향도 없도소이다.
단 한 분 어머니만이 누리의 빛이오이다.
어머니 받으오소서 초라한 이 상을 받으오소서.
드실 것 없사오나, 싫다 말고 드시오소서.
이 정성 귀히 보시사 허물 말고 드오소서.
25. 내 고향
구름재 박병순
지난번
지날 때에는
진달래가 한창이더니,
이번에
지나노라니
신록 제법 우줄댄다.
낮달도
뭣이 좋은지
나를 따라오누나.
보리밭
사이사이
자운영 널려 있고,
제비도,
멧새도,
쌍쌍이 나르는데,
강변에
풀 뜯는 소는
여전 태고하구나.
보리목
올라오면
사랑도 움트는 법,
세월이
가노라면
미움도 가시느니,
오만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가자 내 고향!
26. 사랑·1-가람 스승님께
구름재 박병순
스승
깊은 정이
이 몸의 뼈에 저려,
대문을
나설 지음
핑 도는 눈물 모아,
높으신
그 뒤를 딸겠노라
다짐하는 이 한 뜻.
글만이
배움이랴
술에도 길이 있다.
깊이 둔
유하주(流霞酒)를
손수 찾아 따루시고,
안주를
먹이고서야
보내시는 그 마음!
백발
성(盛)한 몸이
분란(盆蘭)을 가꾸시고,
난(籣)잎
하나 하나
닦아서 윤이 나고,
가다가
꽃이 피는 날
향(香)을 반겨 하신다.
가람
깊이 어려 있어
한 천 겁(千劫)을 흐른대도,
그침 없을
흐름 따라
구름은 피오리니,
하나로
쏟히는 정성
피고 피어지이다.
27. 시름
구름재 박병순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고 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몸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초하여라
28. 운장산아 울어라 마이산아 솟아라
구름재 박병순
노령의 제일상봉 운장산아 울어라.
성적산(聖迹山) 내린 정맥 마이산(馬耳山)아 솟아라.
오늘은 재경 진안군민대회 섬진강아 노래하라.
월랑교(月浪橋) 건너올라 옥류천(玉流泉) 물이 맑고,
우화정(羽化亭) 땀을 씻어 내려뵈는 고운 골이,
산수에 슬기가 얼려 인물 더욱 튀었네.
순조 때 삼의당(三宜堂) 김씨 내외 금슬 좋게 살다 묻힌,
내노란 시인 묵객 예로부터 줄 이으니,
산 산도 손 손 손 마주치며 나그네를 부르네.
속금산 커오르던 전설 상기 새삼 새로웁고,
이갑룡 쌓은 탑은 신비로 싸여 있고,
천왕문(天王門)물을 마시면 극락은 바로 거기.
구름 스쳐가는 부부봉 구구구 비둘기 날고,
금당절 종소리는 유난히도 은은한데,
이산 묘 찾아뵈이면 선현 정기 되살아라.
상전 죽도에 가면 옛어른 의기가 놀고,
용담 백운 운일암은 올해도 단풍 붉었던가!
월포뜰 일대는 쏘가 돼도 진안 인정은 살아있네.
세상 인심 고약(괴약)하여 부귀영화 못 누리지만,
가시돌밭 영 넘으면 음지 양지 바뀔리니,
진안군 벗님네야 낙담 말고 앞서 끌고 뒤서 밀세.
운장산아 울어라 마이산아 솟아라.
섬진강아 노래하라 속금산 금줄 매고,
우리도 함께 커오르자 북을 둥둥 춤을 추자.
29. 아쉬움
구름재 박병순
마음도 몸도 갈갈이 찢긴 비탈길인데,
가시덤불에 찔리고 발부리를 채이며,
행여나 새봄을 기다려 보는 나날의 아쉬움.
여긴 방안 온도가 빙점(氷點)을 오르내리는 고원(高原)
인정도 사정도 없는 외딴집인데,
산만을 바라다보고 살아가는 아쉬움.
달이 창을 우비는 오밤중 여울물도 그쳤는지,
미칠 듯 외로움이 치밀어 오는 사나운 잠자리……
달 지고 또 다기 밝기를 기다리는 아쉬움.
고달픔 외로움 피맺힘으로 얽힌 험준한 운명의 능선,
언제면 다 넘으려나 요 고약한 팔자란 등성이,
봄 봄 봄 봄이면 하고 내 못 넘는 아쉬움.
30. 너만 있다면
- 학에 띄우는 노래
구름재 박병순
차마 떠난단 말하기가 어려워서,
예사로 악수로만 둥둥 떠나 온 뜻은,
모른 듯 자주 찾아와 만나보고 싶어였다.
이제 날이 가고 해가 바뀜에 즈음하여,
달을 건너고도 딴 일에 바빠하는 것은,
물결이 바위를 모래알로 가시듯 세월도 정을 앗는걸까?
언제나 한결같던 고마움을 죽는다 잊을런가!
삼 년 외로움도 그로 하여 내 덜였고,
호롱불 위태로웠던 생명도 너 때문에 남았다.
세월아 흐르거라 나를 씻어 흐르거라.
해도 달도 별도 별도 나를 외면하려무나.
그 속에 너만 있다면 나는 바라 살겠다.
31. 물소리
구름재 박병순
밤낮을 흘러가도 다함이 없는 물의 의미
깨칠 듯 깨칠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가슴 마구 울려 놓고 누비며 호며 가는.
밤낮을 달려가도 앞을 다투는 물의 의미
잡힐 듯 잡힐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안을 갈갈이 찢어 놓고 목을 놓아 우는.
밤낮을 울어 가도 그침이 없는 물의 의미
알 듯 알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간장 호되게 우비어 놓고 쌀쌀히 떨쳐 가는.
32. 설봉 속금산
구름재 박병순
뽀얀 옷 갈아 입고 하늘서 내려온 선년가?
땅에서 솟아난 보살의 화신인가!
눈 쌓인 신기한 두 봉우리 가슴에 와 안기네.
소복한 두 모습이 순수하고 다정해서,
껴안은 동자도 재롱하는 웃음꽃 피워,
공방든 내외 말문 열려 도란도란 정담이네.
이젠 나도 돌아와 당신 품안에 살고 싶네.
평생 우러러 그 정기 마셔 왔거니,
죽어도 그 자비에 싸여 얼싸 환생 꿈꾸리라.
5회 지정시
구름재 지정시 모음 22편
1. 속금산 금줄 매고
박병순
갑술년(甲戌年) 해뜰 무렵 마이 영봉을 향하여
한 박적 맑은 물을 높이 치켜들어,
그 정기 들이마시고 새 한 해를 맞는다.
여기는 산악 고원 분지 산밭〔山田〕일구고 다락논 갈아,
장작 패고 숯을 굽고 누에 치고 삼 농사 짓고,
머루랑 다래랑 우름 더덕 송이 먹으며 살아 왔으니.
상전 월포 일대 쏘가 되고 좁은 땅 좁아지고 사람 줄고,
갈수록 산인 고단한 우리 고장이지만,
산 곱고 물 맑고 인심 좋아 시인 묵객 줄 이었네.
쌀 농산물 개방 농촌 지원 그따위 소리 말고,
새해 새날 새아침에 무슨 반가운 소식 없을까?
까치떼 몰려와 정다운 화음 와지직근 우짖으라.
화목한 가정 다정한 이웃 겨레 사랑 나라 사랑으로,
동녘의 해를 맞아 가슴을 활짝 열고,
북녘의 동포들과 손을 맞잡고 조국 통일을 의논하자,
너 잘 살고 나 잘 살고 너도 행복 나도 행복,
온 겨레가 한살 되어 통일 만세 부르는 날,
속금산 금줄 매고 북을 둥둥 춤 덩실덩실 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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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향가(失鄕歌)
- 추석날에
박병순
고향은 고향이로되
벌써 내 고향이 아니옵네.
어머니 가시온 뒤
아버지도 변하셨다.
추석날 하늘 바라
목을 놓아 우노라.
술을 부어놓고
정성껏 절을 한다.
구부려 닿은 이마
그 모습 떠오르네.
어머니!
이 자식들을
혼령은 보시오니까?
어머니 살으신 제
그 사랑이 기루오이다.
발끝에 채이는 이슬
눈물 되어 지오이다
☆★☆★☆★☆★☆★☆★☆★☆★☆★☆★
3. 너만 있다면
- 학에 띄우는 노래
박병순
차마 떠난단 말하기가 어려워서,
예사로 악수로만 둥둥 떠나 온 뜻은,
모른 듯 자주 찾아와 만나보고 싶어였다.
이제 날이 가고 해가 바뀜에 즈음하여,
달을 건너고도 딴 일에 바빠하는 것은,
물결이 바위를 모래알로 가시듯 세월도 정을 앗는걸까?
언제나 한결같던 고마움을 죽는다 잊을런가!
삼 년 외로움도 그로 하여 내 덜였고,
호롱불 위태로웠던 생명도 너 때문에 남았다.
세월아 흐르거라 나를 씻어 흐르거라.
해도 달도 별도 별도 나를 외면하려무나.
그 속에 너만 있다면 나는 바라 살겠다.
☆★☆★☆★☆★☆★☆★☆★☆★☆★☆★
4. 눈이 쌓이는 밤에
박병순
눈이 소리 없이 사뭇 쌓이는 밤에,
오순도순 옛 이야기 상기도 꽃이 피는,
산갓집 지붕 밑에는 꿈이 남아 좋구나.
이웃집 호롱불 하나 둘마저 꺼지고,
눈이 길로 쌓이는 괴괴한 이 밤은,
원수도 내 사랑으로 속삭이고 싶구나.
차도 사람도 날새도 그친 막막한 밤에,
한 등잠 심지가 타다 타다 절로 꺼진,
들창에 눈보라 스쳐라 눈 눈발이 밝아라.
☆★☆★☆★☆★☆★☆★☆★☆★☆★☆★
5. 묵뫼
박병순
못 다핀 따리아로
엄마 앞서 가던 네가,
공동묘지 한 모롱에
외로이 묻혔다가,
이십 년 지샌 이제여
하마 묵뫼 되었구나.
봄에는 진달래꽃
가을엔 들국화를
궂은 비 쑥국새 소리
겨울날 눈분비 소리
그마저 들을 리 있나
칡덩굴만 뻗는구나.
☆★☆★☆★☆★☆★☆★☆★☆★☆★☆★
6. 무덤 앞에서
박병순
제철을
못 다 피고
저버린 다알리아야!
비탈진
무덤 속에
혼자서 묻히다니,
어머니
너를 못 잊어
일 년 만에 가셨다.
울음이
터져 나와
무덤 앞에 느끼는 제,
들국화
하늘하늘
뜨거운 눈시울에,
어리는
환영(幻影)을 보며
옛일 생각하노라.
☆★☆★☆★☆★☆★☆★☆★☆★☆★☆★
7. 물소리
박병순
밤낮을 흘러가도 다함이 없는 물의 의미
깨칠 듯 깨칠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가슴 마구 울려 놓고 누비며 호며 가는.
밤낮을 달려가도 앞을 다투는 물의 의미
잡힐 듯 잡힐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안을 갈갈이 찢어 놓고 목을 놓아 우는.
밤낮을 울어 가도 그침이 없는 물의 의미
알 듯 알 듯하여 물소리를 듣노라.
이 간장 호되게 우비어 놓고 쌀쌀히 떨쳐 가는.
☆★☆★☆★☆★☆★☆★☆★☆★☆★☆★
8. 설봉 속금산
박병순
뽀얀 옷 갈아 입고 하늘서 내려온 선년가?
땅에서 솟아난 보살의 화신인가!
눈 쌓인 신기한 두 봉우리 가슴에 와 안기네.
소복한 두 모습이 순수하고 다정해서,
껴안은 동자도 재롱하는 웃음꽃 피워,
공방든 내외 말문 열려 도란도란 정담이네.
이젠 나도 돌아와 당신 품안에 살고 싶네.
평생 우러러 그 정기 마셔 왔거니,
죽어도 그 자비에 싸여 얼싸 환생 꿈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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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속금산(마이산) 전설
박병순
아득한 옛날 저 숫속금산은 한 밤중에 크자 했다.
암속금산은 새벽에 크자고 했다.
산 산도 아내를 사랑하여 새벽녘에 크자 했다.
물동이를 이고 나온 아낙네가 외치는 소리
“아! 산이 크네, 아아! 저 산이 크네”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올랐던 자웅은 주저앉았다.
숫속금산은 분노에 넘쳐 두 아들을 빼앗고,
암속금산을 발로 차버린 차버린 뒤,
몇 겁이 흘러도 공방든 채로 그만 굳어 버렸다.
구름도 시름되어 저 봉을 스치는가!
구구구 산비둘기 짝을 불러 서로 나네.
사무친 그 한을 풀게 다시 솟아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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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손 손 손을 마주치며
박병순
성적산(聖迹山) 내린 정맥 북쪽 뻗어 마이산(馬耳山)을,
말귀 모양 솟은 두 봉 전설 또한 신기로와,
정기론 봉 앞에 서면 시름마저 가시네,
월랑교(月浪橋) 건너올라 옥류천(玉流泉) 물 마시고,
우화정(羽化亭) 땀을 씻어 내려뵈는 고운 골이,
산수에 슬기가 얼려 인물 더욱 튀누나!
순조 때 삼의당(三宜堂) 김씨 내외 금실 좋게 살다 묻힌,
내 노란 시인 묵객 예로부터 줄 이으니,
산 산도 손 손 손을 마주치며 나그네를 부르네.
☆★☆★☆★☆★☆★☆★☆★☆★☆★☆★
11. 아쉬움
박병순
마음도 몸도 갈갈이 찢긴 비탈길인데,
가시덤불에 찔리고 발부리를 채이며,
행여나 새봄을 기다려 보는 나날의 아쉬움.
여긴 방안 온도가 빙점(氷點)을 오르내리는 고원(高原)
인정도 사정도 없는 외딴집인데,
산만을 바라다보고 살아가는 아쉬움.
달이 창을 우비는 오밤중 여울물도 그쳤는지,
미칠 듯 외로움이 치밀어 오는 사나운 잠자리……
달 지고 또 다기 밝기를 기다리는 아쉬움.
고달픔 외로움 피맺힘으로 얽힌 험준한 운명의 능선,
언제면 다 넘으려나 요 고약한 팔자란 등성이,
봄 봄 봄 봄이면 하고 내 못 넘는 아쉬움.
☆★☆★☆★☆★☆★☆★☆★☆★☆★☆★
12. 어머니
박병순
어머니의
무릎을 떠나
공부하던 어린 시절,
벌써
금요일이면
마음은 들까불려,
이튿날
세 시간 끝나면
불티 닫듯하였지.
집에만
돌아오면
내가 바로 귀공자고,
일요일
낮때 지면
귀양길 가는 마음
어머닌
미리 아시고
나를 멈춰 주셨다.
첫닭도
울기 전에
밥을 다 지어 놓고,
내 아들
고달파라
차마 잠을 못 깨우셔,
두 홰째
닭이 울고야
소리하던 어머니!
눈이
펑펑
쏟아지는
삼십 리 새벽길을,
그렇게 뿌리쳐도
싸주신 묵직하던 그 보따리
호젓이
걸으면서야
어머니 마음을 보았다.
☆★☆★☆★☆★☆★☆★☆★☆★☆★☆★
13. 외딴섬
박병순
설움 설움 해도 굶는 설움이 더 크대도,
배고픈 사람 아니면 그 사정을 모르는 거라,
쌀값이 마구 올라도 모르겠단 녀석들!
어른도 현기가 돌고 어린놈 보채어 운다.
버릇으로 뒤를 보며 곰곰이 생각노니,
끼니를 건너는 설움보다 욱여 짜는 얼굴들!
누가 굶어 죽는대도 눈썹 하나 까딱없고,
모두들 눈이 뒤집혀 인정은 가뭇없다.
아무리 둘러보아야 마을 안의 외딴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은 가르쳐야겠고,
굶고 일을 나가는데 의용(儀容)은 갖춰야 한다.
험궂은 요지경 속에 허우대는 유형수!
☆★☆★☆★☆★☆★☆★☆★☆★☆★☆★
14. 운장산아 울어라 마니산아 솟아라
박병순
노령의 제일상봉 운장산아 울어라.
성적산(聖迹山) 내린 정맥 마이산(馬耳山)아 솟아라.
오늘은 재경 진안군민대회 섬진강아 노래하라.
월랑교(月浪橋) 건너올라 옥류천(玉流泉) 물이 맑고,
우화정(羽化亭) 땀을 씻어 내려뵈는 고운 골이,
산수에 슬기가 얼려 인물 더욱 튀었네.
순조 때 삼의당(三宜堂) 김씨 내외 금슬 좋게 살다 묻힌,
내노란 시인 묵객 예로부터 줄 이으니,
산 산도 손 손 손 마주치며 나그네를 부르네.
속금산 커오르던 전설 상기 새삼 새로웁고,
이갑룡 쌓은 탑은 신비로 싸여 있고,
천왕문(天王門)물을 마시면 극락은 바로 거기.
구름 스쳐가는 부부봉 구구구 비둘기 날고,
금당절 종소리는 유난히도 은은한데,
이산 묘 찾아뵈이면 선현 정기 되살아라.
상전 죽도에 가면 옛어른 의기가 놀고,
용담 백운 운일암은 올해도 단풍 붉었던가!
월포뜰 일대는 쏘가 돼도 진안 인정은 살아있네.
세상 인심 고약(괴약)하여 부귀영화 못 누리지만,
가시돌밭 영 넘으면 음지 양지 바뀔리니,
진안군 벗님네야 낙담 말고 앞서 끌고 뒤서 밀세.
운장산아 울어라 마니산아 솟아라.
섬진강아 노래하라 속금산 금줄 매고,
우리도 함께 커오르자 북을 둥둥 춤을 추자.
☆★☆★☆★☆★☆★☆★☆★☆★☆★☆★
15. 문을 바르기 전에
박병순
총총히 먼 길을 떠난 지 하마 보름도 넘었는데,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아직도 막지 않은 뜻은,
그 구멍 넘어 귄이 쪽쪽 흐르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침 저녁 선들거리고 비바람 사납게 부는 날도,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상기도 막지 않은 뜻은,
고 구멍 넘어 정이 찰찰 넘치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가을 큰 비바람 끝에 둘레 한결 스산한데도,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차마 가리지 못한 뜻은,
이 구멍 넘어 힘이 철철 감돌던 생명 붙안고 싶어서다.
총총히 먼길을 떠났듯 어서들 빨리 돌아오라.
장미꽃 이제도 피고 국화 향기로운 뜨락으로,
수없이 찢고 간 문을 바르기 전에 종종걸음 쳐 빨리 오라
☆★☆★☆★☆★☆★☆★☆★☆★☆★☆★.
16. 쑥국새 운다
박병순
아침 이슬 마시고 깊은 골 쑥국새 운다.
푸르름을 마시고 산 마을 쑥국새 운다
푸름에 겨워서 대낮을 쑥국 쑥국새 운다.
아침 이슬 머금고 소반새 운다.
푸르름 머금고 또르르 또르 소반새 운다.
은구슬 굴리듯 또르르 또르 소반새 운다.
언제나 돌아와서 산새와 함께 살며,
어쩌면 돌아와 산새와 함께 놀며,
피먹진 가슴을 풀게 나도 함께 울거나
☆★☆★☆★☆★☆★☆★☆★☆★☆★☆★
17. 책
박병순
헐벗고 굶주려 모은 소중한 수만 권 책이,
이제는 짐이 되어 운신조차 어려운데,
평수를 줄여야 할 운명이니 이를 장차 어쩔고?
책이 힘이자 생명이자 종교였는데,
그 굳게 믿던 희망과 보람의 성벽 무너지는가!
장서를 넉넉히 늘어놓고 법열할 날 언제뇨?
자식에 미뤄 주자니 또한 그에게 짐이 되고,
남에게 주는 건 헛짓 증정도 그리 만만찮은데,
낙향해 꾸린 책짐을 펼칠 수 없음 자못 막막쿠나!
세상에 이런 신세 어디 또 있을까?
하늘 보고 땅을 봐도 호소할 곳 망연하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굶(구멍)있단 말도 헛거로고.
이리 되작 저리 되작 곰곰이 생각는다.
엎치락뒤치락 몸살난 듯 발광일다.
해돋이 해넘이를 꿈에라도 가슴 열어 환희한다.
그리 좋은 책이 짐 되어 원수 될 줄 알았던가?
밀릴대로 밀리다가 망할 때 망할망정.
아직은 서권기 속에 황홀한 삶 누리자.
금보다 귀한 것은 책 위에 더 있는가!
사람 재는 잣대도 책 아니고 어니 헤리?
혼령도 호랑나비 되어 책갈피를 감돌리라.
☆★☆★☆★☆★☆★☆★☆★☆★☆★☆★
18. 해넘이의 노래
-해돋이로 살고파라
박병순
서녘 하늘 넘는 해가 영창 휘황 되비췰러니,
황홀히 일렁이다 벌겇게 달아 올라서,
애달아 숲에 얼굴 묻었다가 정적 가쁜 숨 덜컥 진다.
해돋이 그 밖에는 모르고 살아온 낼러니,
올 들어 저절로 깨치게 된 해넘이의 뜻,
해넘이 해넘이의 몸부림을 이제 어렴풋 알리로다.
해는 오늘 금방 져도 내일 또 해돋이로 뜨련만,
사람은 한 번 지면 어둠 속 몇 겁을 헤멜런가
인생도 해넘이가 해돋이로 영원으로 살고파라.
☆★☆★☆★☆★☆★☆★☆★☆★☆★☆★
19. 포플러
박병순
넌 성숙해서 좋구나
늙음이 없어 더욱 좋구나.
반공에 치솟아
우쭐대는 너를 보면,
땅을 다지고 서서
하늘로 뻗는 네 기상!
오가는 사람에
희망을 주는 그늘에 서면,
외롬은 금방 사라지고
도로 어려지누나.
위로 솟으면 숲을 이루고
옆으로 뻗으면 그늘을 짓는,
그 밋밋한 몸매에
시원스런 차림으로
까마득 향수를 잊고
날로 꿈을 푸르누나.
오늘 아침사
새로 한 살 난
내 안에 한 그루 널 심노니,
푸르름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고,
한 평 땅
그늘로 하여
저 에덴을 가누누나.
☆★☆★☆★☆★☆★☆★☆★☆★☆★☆★
20. 가을이 짙어가면
박병순
우물가 감나무에 더런 감이 발갛게 익어 가고,
아직도 뜨락엔 장미가 볼 붉히고,
푸르른 하늘에 흰구름 한 점 두웅 한가롭다.
허전했던 가슴에 기쁨이 와 철렁여도,
슬픔은 슬픔대로 물거품처럼 떠오르고,
낮달이 종이배 되어 이 안을 안고 간다.
차츰 가을은 짙어 가는데 가을에 깊이 젖지 못함은,
이 고동 설레임 아닌 불안과 초조에 떪이런가?
언제나 마음의 고요를 얻어 여유론 세월 누릴꼬.
철따라 제비떼 떼 지어 남으로 가면,
기러기 목을 뽑아 날아들 오련만,
내 속에 자리한 욕망이란 샌 가도 오도 못하나!
☆★☆★☆★☆★☆★☆★☆★☆★☆★☆★
21. 호박꽃은 부른다
박병순
나무 울타리를 무성히 뒤덮는 파아란 잎 사이로,
노랗게 드러난 네 얼굴에는 드메서 왔다는,
순이의 순직한 얼굴이 또한 그 속에 있어 좋구나.
날개 달린 놈이면 잉잉거리며 진득한 향(香)을 듣고 누구나 오라.
내 입술 그리 고울 건 없어도 어서들 오라.
이 가슴 속에다 깊숙이 묻어 문질러 주마.
마음은 수줍어도 젊음은 푸르러,
이들이들 타는 해는 오오 나의 숨결,
숨죽어 아물기 전에 어서들 빨리 오라.
장미처럼 눈부시진 못하여도 사나움 없고,
백합처럼 말쑥하진 못하여도 가냘픔 없고,
부둑진 삶은 하늘을 우러러 구김 없이 피었노라.
☆★☆★☆★☆★☆★☆★☆★☆★☆★☆★
22. 창
박병순
창이 이렇게 좋은 줄을 어제사 비로소 깨달았소.
창을 열어제치고 먼 산 둘레 앞에 서면,
자욱히 흐르는 안개 속에 나도 함께 잠기오.
밤 창문을 열면 등대처럼 빛나는 빨간 불빛 하나!
별도 숨은 깜깜한 하늘 앞에 서면,
말 없는 저 불빛만을 하염없이 지키오.
창 창이 좋은 줄을 이제사 깨달았소.
숨 막힌 사람에게 창이 주는 의미,
외로운 사람들에게 창이 주는 의미……
☆★☆★☆★☆★☆★☆★☆★☆★☆★☆★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 선생 연보
출생 및 사망
박병순(朴炳淳) 1917.12.23 춘당 박종수 , 김성녀의 맏아들로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적내 1245번지에서 출생함.
2008년 12월 3일 정오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삼환아파트 10동 304호에서 92세를 일기로 별세함.
학력
진안공립보통학교 졸업(1933),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 졸업(1939), 전북대학교 문리대학 국문과 1회 졸업(1954),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국문학 전공) 2회(1956)졸업. 논문 <현대시조의 한 고찰>로 문학석사 학위 받음.
교육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 전주중, 전주 남중, 전주상고, 전주고, 남원농고, 이리공고, 전주공고, 진안 농고, 전주여상고, 전라고, 임실고 교사 역임(1939 - 1978)
전주대학교, 명지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시조창작론, 고전세미나, 시조가사론 등 강의(1965 - 1991)
문단
1938 <동광신문>에 시 <생명이 끊이기 전에>와 조선일보 학생문예란에 수필 <청어장수> 발표.
1952 - 1960 시조 최초 전문지 <신조> 5집까지 발간
1954 사화집 <새벽> 발간
1958 <현대문학>에 <김만경><생명><철창일기> 발표
1964-1970 한국시조작가협회 이사
1976 전라북도 문화상(시조창작 부분) 수상
1978 제3회 노산문학상(시조 창작 부분) 수상
1979-1996 노산문학회 운영이사, 가람문학상 운영위원
1988 제2회 황산시조문학상 수상
1991-1992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1994 제9회 표현문학상 수상
1996-2004 너른고을 문학 모임 명예회장
1999-2003 월간 <문학 21>편집위원,지도위원
2002 우리말글 지킴이 위촉 받음(문화관광부 장관, 한글학회장)
2004 국가 유공자 증서 받음
2004 진안 군민 훈장 대장(진안 군수) 받음
2007 가람시조문학상 공로상 수상
2008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공로상 수상
저서
1956 처녀시집 <낙수첩>,항도출판사
1971 제2시조집 <별빛처럼>,금강출판사
1973 제3시조집 <문을 바르기 전에>,세운출판사
1977 제4시조집 <새눈 새맘으로 세상을 보자>동화출판사
1977 화갑기념 <구름재 시조선집>,대광문화사
1981 제6시조집 <가을이 짙어가면>,새글사
1985 <한국시조 큰사전>한춘섭, 리태극 공저,을지출판공사
1986 제7시조집 <진달래, 낙조처럼>,청한문화사
1991 제8시조집 <해돋이 해넘이의 노래>,뿌리
1993 <구름재 시조전집>,가꿈
1997 제10시조집 <행복한 날>,세원
2003 제11시조집 <먼 길 바라기>,토우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