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삐뚤어진 사랑
지켜보는 담옥상은 울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거린다.
‘당신은 점점 더 내 곁에서 멀어지는군요…….’
담옥상을 지켜보는 상관휘의 안색은 일그러져 있었다.
‘사매는 구바우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놈을 사랑하고 있다!’
담옥상은 그런 상관휘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당신을 결코 놓칠 수 없어! 반드시 내 수중에 넣고 말 테야!’
상관휘 역시 다른 의미로 이를 악물면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사매를 포기하지 않는다. 구바우…… 근본도 모르는 천박한 사냥꾼에게 사매를 넘겨주진 않는다! 흑백역사? 저런 사람 같지도 않은 병신새끼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매의 감정도 일시적인 것일 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매를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런 상관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옥상과 구바우,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쳐진다. 구바우는 씨익 웃고, 담옥상은 분해서인지 어쩐 일인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은밀한 눈길이 있었다.
천산파 장문인 무적철도 담천강의 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였다. 비록 앞선 제1열이 아니라 뒤의 2열에 앉아 있긴 했지만, 귀빈석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여자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궁장 차림의 미부인이었다. 새하얀 우윳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키가 아주 훤칠하게 크고, 이목구비의 선이 굵은 미인이었다.
그녀의 눈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듯 푸르렀으며, 머리카락은 황금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중원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관외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저 죽음의 땅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서역을 지나야만 볼 수 있는 금발벽안(金髮碧眼)의 이국 여자였던 것이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져 올라간 것이 나름대로 성깔이 있어 보였고, 얇은 입술에 맺혀 있는 오만한 미소는 그녀가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차림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비단 중에서 가장 귀하고 값이 나간다는 백라비단이었고, 머리에 꽂혀 있는 봉황 문양을 조각한 비녀는 두 냥 이상의 백금이었으며, 옷에 걸려 있는 형형색색의 노리개는 옥(玉)과 산호(珊瑚), 마노(瑪瑙), 호박(琥珀), 비취(翡翠)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석이 달려 있었다.
가장 눈부신 것은 그녀의 목덜미였다. 목에는 황금으로 제련된 목걸이가 바투 목을 휘감고 있었는데, 목젖에 위치한 하나의 보석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비둘기 알만한 금강석(金剛石: 다이아몬드)이었다. 그 정도 크기의 금강석이라면 관외에서 말 천 마리 정도는 주어야 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고가 보석이었다.
이 여자를 본 사람들은 한눈에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금화부인(金花婦人) 수잔나(水盞那).
천산파 장문인 무적철도 담천강의 후처(後妻)이면서 천산파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여자다. 원래 이름은 스잔나 크리스티안 어쩌구~ 였는데, 중원으로 시집오면서 그냥 단출하게 수잔나가 되어 버린 여자다.
천산비연 담옥상의 친모인 천산신모(天山神母) 비설연(丕雪蓮)은 담옥상을 낳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십오 년 전에 죽었다. 그때 담옥상의 나이 네 살에 불과할 때였다.
그렇게 상처한 홀아비가 된 담천강에게 은밀한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다. 저 서역의 끝에 있다는 대식국(大寔國: 아라비아)의 거상 천상노야(天商老爺) 아트라만이 혼인 관계를 타진해 온 것이다.
그는 팔황천상단(八荒天商團)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있는 대식국 최대의 상인이었다.
서역의 유리 물품이나 과학기자재, 양탄자 같은 것을 중원으로 가져가서 팔면 열 배 이상의 이익이 보장된다. 거꾸로 중원에서 비단이나 향료, 도자기 같은 것을 가져다가 서역이나 그 너머 구라파(歐羅巴)에 판다면 투자금의 백 배 이상을 건질 수 있는 엄청난 이익이 남는 장사다.
그렇지만 항상 모험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워낙 먼길을 험한 자연을 뚫자면 그 고충도 큰일이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역시 대상을 노리는 마적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워낙 값나가는 물품을 운반하다 보니, 꿀을 노리고 덤비는 벌떼들이 워낙 많았다.
심지어는 중원으로 들어가서도 녹림(綠林)에 털린 것도 부지기수였다. 외국에서 오는 상인을 터는 거야말로 녹림도들에겐 호박이 넝쿨째 떨어지는 횡재나 다름아니다.
그랬기에 보호막이 필요함은 당연한 일이다.
천상노야 아트라만이 주목한 것이 바로 천산파였고, 마침 상처를 한 것을 기회로 삼았다. 자신의 손녀딸을 담천강에게 후처로 덥석 안겨준 것이다.
지참금도 만만찮은데다가 중원이나 관외에선 볼 수 없는 금발벽안의 백마미인이니 당연히 기꺼워했다.
원래 있는 집 여자가 없는 집으로 오면 콧대가 드높아짐은 당연한 일이다. 애틋한 사랑 같은 것이 오순도순 오고간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것이니 서로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지만 지난 십오 년의 세월 동안 담천강과 방사를 하면서 이 여자는 스스로 옷을 벗고 남편을 공양한 적이 없었다. 항상 수동적으로 들어오는 남편한테 몸을 내주고, 일이 끝나면 득달같이 목욕탕으로 달려가 몸을 씻었다. 땀이 묻는 것이 싫었다나 어쨌다나 하는 시답잖은 이유를 달고서 말이다.
더더욱 기괴한 일은 절대로 자기 몸 안에다가 파정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임신을 하면 배불뚝이가 되는 것이 싫고, 아기를 낳으면 몸매가 망가진다나 어쩐다나 하는 같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따위 말이나 해대는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아직 한창때인 담천강인지라 젊고 아름다운데다가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육체파 금발벽안 백마를 타는 재미로 구박을 견디면서도 방사를 거르지 않았던 담천강이었다.
삼년 전인가부터는 어느 날 문득 담천강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수잔나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였다.
그래도 금화부인 수잔나는 완전히 천산파에선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담천강이 다른 관외문파를 도와 주고, 천궁영웅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엄청난 자금의 출처가 바로 금화부인 수잔나였던 것이다.
금화부인 수잔나는 시집을 온 이후로 천산파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다니고 싶어도 나오질 못했다. 천산파의 돈주머니나 다름없는 그녀가 혹시 딴마음을 품거나, 혹은 다른 세력에서 납치를 해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담천강은 철저하게 그녀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다.
삼년 전인가부터는 그녀의 금족령을 해제해 주었다. 그 뜻은 갈 테면 가 보라는 것이었지만 수잔나는 그래도 천산파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데다가 오히려 더욱 막강해진 천산파와 담천강은 더 이상 팔황천상단의 보호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천상노야 아트라만의 죽음으로 기인하고 있었다. 팔황천상단은 여덟 명의 자식들에게 분배되어 오히려 그들은 경쟁적으로 담천강과 천산파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금화부인 수잔나의 효용 가치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끈 떨어진 연(鳶)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금화부인 수잔나였다.
그래도 그녀는 별반 아쉬움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천산파의 안주인이란 자리는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고, 육체 관계가 없는 것은 사랑도 없이 정략 결혼한 담천강이었는지라 별로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평온한 삼년을 살아온 금화부인 수잔나에게 마음의 격정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일년 전이었다.
그 전해에 역사적인 천궁영웅대회가 개최되었지만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는 활쏘기 같은 것은 비열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진정한 남자들의 결투는 갑주를 걸치고 장창을 비껴 든 채 투마에 올라타고 질풍같이 치달려 적의 목줄기를 꿰뚫는 장쾌한 승부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제1회 천궁영웅대회 우승자에 대한 얘기가 들끓으면서 구바우에 대한 호기심이 슬며시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흑백역사…….
그의 활 솜씨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몸이 절반 뚝 잘라서 오른쪽은 백옥처럼 희고 매끄럽고, 왼쪽은 숯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새카맣고 강인한 청년이 나타났다는 말에 희한한 동물을 구경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제2회 천궁영웅대회를 참관해 보았다.
일년 전 그날 이후, 그녀는 밤마다 꿈에 시달렸다.
애욕의 꿈…….
희고 미끈한 미청년을 그녀가 올라타고 앉아 쾌락의 몸부림을 치는 꿈을 꾸는가 하면, 시커먼 피부에 강인한 흑인청년이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는 육중하게 찍어누르는 압박감에 환희의 비명을 지르는 꿈……. 아침에 일어나면 아랫도리가 흥건하고 허벅지가 뻐근해지면서 젖가슴이 아플 정도로 부풀어올라 있기까지 하다.
그런 상태로 일년이 지났다. 비록 정략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천산파의 안주인이라는 자긍심만을 가지고 버텨 오고 있는 금화부인 수잔나는 오늘 마음의 벽 일부가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금화부인 수잔나는 오직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열망 서린 눈길을 받고 있는 곳에는 괴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구바우가 있었다.
‘반드시…… 저 아이를 내 엉덩이 아래에 깔아뭉갤 거야.’
그렇게 결심하는 이 여자의 허벅지는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고의가 축축해져 오고 있는 것을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
구바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은 몽롱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이런 것도 사랑이랄 수가 있을까?
그녀는 구바우와 같은 자리에서 말 한마디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몇 번 되지 않았다. 그것도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이다.
수잔나는 스스로 사랑이라고 이름붙였지만 그것은 집착이고 아집일 뿐이다. 있는 집안 영양(令孃)들이 어려서부터 가지게 되는 마음은 오만함이다.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중에 넣어야만 하는 편집증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이 저 사내를 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그녀의 소유물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충족될 때까지 이 여자는 애욕의 욕심을 떨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바우를 바라보는 수잔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부인이 외간남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상에 있던 무적철도 담천강은 일어나서 웅혼한 사자후의 공력을 실어 외쳤다.
“관중(貫中)에 관중이니…… 이번 천궁영웅대회의 우승자는 흑백역사 구바우이외다!”
그의 옆에 있던 폭풍천신 가패륵이 일어나면서 계속해서 외쳤다.
“향후 새로운 천궁영웅대회의 3연속 우승자가 나올 때까지 구바우는 천궁대영호(天弓大英豪)라 불리며 관외무림의 모든 형제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의 선언은 엄청난 명예와 부귀가 약속된 것이었다. 천궁왕을 넘어 천궁대영호라는 칭호를 받으며 막대한 권리를 약속받은 것이다.
일례로 서역과 막북의 어디에서고 최고의 객점에 투숙할 수 있고, 최고급 술을 공짜로 마실 의무가 있기도 하다. 기루에서도 어떤 여자든 골라 지명하여 즐길 수 있다.
객점과 기루에서는 천궁영웅기(天弓英雄旗)를 걸어 존경을 표시하고, 활을 지닌 자는 그가 머무는 곳 백 장 밖에 마련된 해궁대(解弓臺)에 활을 놓고 대한다.
서역과 막북의 소왕국 왕과 관외무림 문파의 장문인들과 동배로서 대우를 받는다 등등…….
“우아와~!”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연호하는 관중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영웅(英雄).
저 위대한 초원의 제왕인 칭기즈칸 테무친이 몽고대제국을 건설한 이후, 4한국이 몰락하고,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근근이 북원제국의 잔맥만이 남아 있는 관외에서 영웅이 사라진 지는 이미 백년 전이다.
이제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당연한 현상인지도 몰랐다.
“위대한 초원의 혼! 천궁대영호!”
“드디어 천궁대영호가 탄생했다!”
모든 사람이 열광하며 일제히 엄청난 환성을 내질렀다. 그렇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두둑!
활을 부러뜨리며 화를 참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구바우……!”
이를 가는 사람은 다름아닌 천산파의 소문주인 천산잠룡 상관휘였다. 담옥상이 환호하는 군중들에 휩싸여 있는 구바우를 착잡한 심정으로 보고 있자 상관휘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사매는 저놈을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하고 있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사매에게 유일하게 반항하는 자……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근본도 모르는 촌 무지렁이 사냥꾼 따위한테 질 수는 없어!’
담옥상은 구바우를 뜨거운 무언가가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바우…… 나 담옥상을 한갓 나약한 여자로밖에는 취급하지 않는 사내…… 하지만 언젠간 당신을 내 앞에 무릎꿇리고 말 테야. 그리고…… 그때 내 마음을 털어놓겠어.’
여인은 그런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는 흑백역사 구바우라는 한 청년을 놓고 그렇게 색다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
천산파는 오랜만에 조용해졌다. 천궁영웅대회가 끝나자 구름같이 밀려들었던 인파가 썰물 빠지듯 돌아갔기 때문이다.
천궁영웅대회가 구바우의 3연패로 인해서 천궁왕을 넘어선 천궁대영호라는 위대한 호칭을 남기고 끝나자 참가했던 관외무림의 지도자격인 사람들이 무적철도 담천강의 요청에 의해 회합을 가졌다.
사실 담천강이 노렸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였다. 지난 삼년 간 천궁영웅대회를 개최하면서 관외무림에서 천산파의 위용은 만방에 떨쳐졌고, 은연중에 관외무림의 패자로 인정받고 있는 상태였다.
관외육패(關外六覇)라고 불리는 관외무림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는 여섯 개의 문파만이 견제를 하고 있을 뿐이지 나머지 군소방파는 음으로 양으로 천산파의 도움을 받았던 터라 대외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터였다. 이제 남은 것은 관외육패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천궁영웅대회를 천산파가 전담하여 개최할 필요는 사실상 없어졌다. 담천강은 천궁영웅대회의 개최권을 포기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명분은 다른 방파에도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갑론을박(甲論乙駁) 끝에 몇 가지 결정이 내려졌다.
一. 천궁영웅대회는 앞으로 오년마다 개최하기로 한다.
二. 천궁대영호의 자리에 오른 구바우에 대한 특권은 평생토록 관외에서 유지하게 한다.
三. 천궁영웅대회를 개최하는 문파에게 천산파는 소요 자금의 오 할을 무상 제공한다.
四. 천궁영웅대회를 부활시킨 공적으로 천산파는 다른 세력의 침입을 받을 때에는 관외육패를 비롯한 관외무림 전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五. 천산파의 장문인 무적철도 담천강은 관외무림맹(關外武林盟)의 결성시에 제일대 맹주가 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단, 관외육패의 명령권은 관외육패 패주들의 양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상의 내용을 담은 선언문이 채택되어 포고되었다. 이로써 천산파의 위치는 관외무림에서 확고하게 굳어졌다.
***
천궁영웅대회가 끝난지도 한 달이 지났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천산의 장엄한 고봉(高峰)들은 늘 만년설에 덮여있거나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는 초본만이 자라는 민둥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천산의 아래쪽 산록에는 울창한 산림이 자리하고 있다.
천산의 어느 산봉우리 밑에 자리한 분지에는 작은 산막이 하나 보인다.
이 산막의 내부는 허름한 겉보기와는 사뭇 달랐다. 바닥에 깔린 범가죽은 푹신하기 이를 데 없고, 벽에는 곰가죽이 덮고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가 풍기면서도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구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백발백미의 비쩍 마른 마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천산노야(天山老爺).
이름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렇게 불릴 뿐이다. 그는 천산 일원의 사냥꾼과 약초꾼, 일반 백성들에겐 최고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가장 장수하고 있는 노인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천산의 역사. 당금 나이 구십오 세로 천산 일원의 호렵부(虎獵夫: 범 사냥꾼)들에게 신화적인 인물로 불리고 있었다.
천산노야는 고즈넉이 호피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옆에는 거대한 흰색 늑대가 길게 누워 있다.
천산노야는 혼자 중얼거렸다.
“바우! 그놈이 어느덧 다 자라 천궁대영호가 되다니! 헛허…… 어미가 핏덩이를 버린 채 떠난 것이 엊그제 일 같거늘…….”
천산노야는 흰빛 늑대의 머리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로부터 벌써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가……?”
천산노야의 머리 위로 지난 이십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절반은 새카맣고 절반은 새하얀 어린아기의 모습을 동굴 밖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어린아기가 빽빽 울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얼러 주었지만 자식을 키워 보지도 못하고 늙은 천산노야 구중경이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리가 없다. 세 시진 동안 진을 빼다가 아기가 울음을 그친 것은 오줌싼 기저귀를 갈아주고 난 다음이다.
기어다닐 때에는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만 그때부터 더 큰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말썽을 다 부리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천산노야는 흰색 늑대 새끼를 몇 년 전에 주워서 키우고 있었다. 암놈이었는데, 능히 천산 일대의 늑대 무리 중에서 가장 크게 자랐다. 천산설랑들에게 있어서는 여왕의 존재로 군림하는 놈이었다.
설아(雪兒)라고 이름 붙여서 키우고 있던 그놈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을 때 구바우는 한창 기어다니면서 말썽을 부리고 있을 시기였다.
설아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을 땐 새끼 늑대 다섯 마리와 격투를 벌여 밀치고는 설아의 늑대 젖을 줄창 입에 달고 살았다. 굶주린 새끼 늑대들이 울부짖어서 오히려 천산노야는 새끼 늑대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구바우가 아장아장 걸어다니면서는 근처에 살고 있던 천산설웅의 아기 곰과 치고 받고 싸우느라 몸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다섯 살 무렵인가부터는 활을 잡고 사냥을 나간다고 집을 떠나서는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가 칠 일 만에 기진맥진한 채 발견되어 천산노야의 애간장을 녹여 버렸다.
열 살에 이르러선 거대한 천산설웅을 잡아서 끌고 오다가 힘에 부쳐서 오히려 잡은 천산설웅의 거구 밑에 깔려 압사할 뻔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구바우는 자라면서 단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움직이면 천산노야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짓만 골라서 저질렀다. 그런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천산노야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서렸다.
‘천산이 이 늙은이에게 준 홍복인 게야. 구바우, 그놈은…….’
불현듯 늑대가 고개를 치켜 들었다.
크르릉…….
설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살기를 띤다.
“손님이 오셨나 보군.”
천산노야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문을 열고 무적철도 담천강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별래무양하셨소이까 노야?”
담천강은 당당하지만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천산노야에게 인사를 했다. 그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구파일방중 하나인 천산파 장문인이란 존재감은 중원무림에서도 대단한 신분이다. 게다가 담천강은 천궁영웅대회를 개최하면서 관외무림의 패자 자리까지 공인받고 있는 천산 일대의 위대한 군림자였다. 그와 동배의 예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하례를 받을 사람은 천산 일대에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포권의 예를 취하고 있었으니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주 지극함을 알 수 있었다.
담천강의 정중한 예의에 천산노야도 마주 허리를 굽히면서 입을 열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담 문주께서?”
담천강은 자리를 잡아 앉으며 입을 열었다.
“천궁영웅대회를 3기 연패한 천궁대영호가 이곳 천산에서 나고 자랐음은 천산파에게도 더할 수 없는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천산노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치하를 하시고자 오신 것은 아니실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노야, 천산 일대의 무림은 천산파가 장악하고 있지만 천산 일원의 일반 사람들에겐 천산노야라는 이름이 하늘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육십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천산대호와 천산설웅을 사냥하여 혹독한 춘궁기에 천산의 모든 촌락 사람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호환(虎患)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시지요.”
담천강의 지적 그대로였다.
천산산맥 일원에 사는 일반 백성들은 여름에는 짧은 밭농사로 소량의 채소와 식량을 얻고, 겨울에는 산짐승을 잡아 연명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빨리 온다거나 유난히 폭설이 내린다면 마을 사람들은 굶어죽고 만다. 그들도 분명히 중원인이고 명나라의 백성이긴 했지만 황실에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사 속에 있었다.
저 옛날 한(漢)나라 시절부터 장건(張騫)이 처음 천산남북로를 지나는 비단길을 열어놓은 이후, 이곳은 항상 중원 한족과 북방 흉노족 같은 오랑캐와 최전선으로 맞부딪치는 곳이다.
한무제(漢武帝)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여 서역 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때 흉노의 대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안서도호부에 주둔했던 부대는 그래서 대부분 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죽으나 사나 그만인 잉여인간들…….
정복전쟁이 벌어졌을 땐 선봉에 서서 진격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고, 서역 오랑캐들이 강성했을 땐 마지막까지 남아 화살받이가 되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영락제가 북원제국의 잔당을 치고자 할 때도 죄수들을 대거 동원하여 성공을 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북방 만리장성 곳곳에 진지를 갖추고는 떨구어 버린 것이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도 그런 자신들의 처지를 인정하고 있었다.
죄수들의 후예…….
차디찬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 이역의 척박한 땅에서나마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인 것이다. 비록 명나라 조정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천산파는 워낙 강력한 힘을 가진 무력집단이기에 자구책이 있었지만 그 이외의 백성들은 험한 자연의 할큄에 몸을 내맡기고 항상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사십여 년 전…… 이상기온이 돌아 여름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농작물이 말라죽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짐승들조차 찾아볼 수 없는 험악한 기상 상태가 연이어 이어졌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마을이 온통 아사하게 되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외곽의 산비탈에 통나무집을 짓고 평온하게 살던 마흔 중반 가량의 중년인이 있었다. 그는 이름도 말하지 않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천산 일대의 모든 마을이 아사(餓死) 직전의 단계에 이르러 어린아이를 바꿔서 삶아먹을 처지까지 오게 되었을 때,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년인은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범을 잡아왔다. 천산대호는 그 크기가 일반의 범보다 두 배는 더 크고, 털도 윤기가 흘러 아주 고가의 품질이었다.
이름 모를 중년인은 천산대호의 호피를 팔아 받은 돈으로 중원에서 식량을 구입했다. 천산의 마을들로 식량이 반입되어 그해 겨울의 기아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춘궁기가 도래하였지만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천산에는 일반의 곰보다 세 배 더 크고 성질이 사나운 천산설웅이 살고 있었다. 놈의 힘은 능히 천근 바위를 박살내 버리고, 천년고목을 뿌리째 뽑아 버릴 정도였으니 천산파의 장로급 이상 실력자가 아니라면 아예 도망가야 할 정도로 가죽도 질기고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죽일 수도 없는 맹수였다.
그런 거대한 천산설웅을 잡아 웅담을 채취하여 팔았다. 그놈의 웅담은 다른 지역의 곰보다 세 배 이상 크고, 약효 또한 탁월하기 그지없어 부르는 게 값이다.
그걸 판 돈으로 식량을 공급했단다.
장장 삼년 동안 천산 일대를 휘몰아친 한발과 기아로부터 그 이름없는 중년인은 마을의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구해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가 가는 길의 사람들은 오체투지하며 천산의 수호신이라 부르며 숭앙하였다.
대명제국의 천자보다도 더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천산노야였다.
천산노야는 담천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늘이 되고자 불타는 야망을 지닌 눈이야. 그러면서도 내심을 보이지 않는 신중함을 겸비한 무서운 인물…….’
담천강은 그런 천산노야를 무섭게 백열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구바우를 제게 주십시오. 그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겠습니다.”
“담 문주에겐 천산잠룡이라는 제자가 있는 것으로 아오만…….”
천산노야는 말꼬리를 흐렸다.
담천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놈은 고양이입니다. 결코 범이 될 수는 없는 재목이지요. 구바우의 후견인이신 노야께서 한 말씀만 해주신다면 그는 다음대의 천산파의 지존이 될 것입니다.”
천산노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나는 이미 삼년 전에 모든 것을 바우에게 물려주었소. 천산의 법은 그놈이 결정하오. 바우가…….”
담천강은 굳은 신색으로 물었다.
“내게 구바우에게 날개를 달아 줄 능력이 없다고 보십니까?”
천산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 문주의 능력은 천산조차도 비좁아 보일 정도요. 그렇기에 노부가 이러쿵저러쿵 할말이 없는 것이외다. 그저 이 늙은이는 지켜볼 뿐…….”
담천강은 속으로 움찔했다.
‘내 마음속을 이미 읽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 내 자신도 마음속에 담긴 야망의 끝을 알 수 없거늘…….’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면서 조용히 일어나며 다시금 깊숙이 포권의 예를 취해 보였다.
“다음에 한 번 더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담천강이 나가자 천산노야는 늑대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의 어떤 야망도 그 아이를 가둬 둘 순 없을 것이다.”
그는 늑대 설아의 턱밑을 쥐어들어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천궁대영호를 제자로 거둔다는 것은 확실히 대업을 이루는 데 좋은 후광이 되겠지?”
천산노야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삐뚤어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그것은 증오로 변하게 될 터! 바우의 앞날이 평탄하지만은 않겠구나.”
천산노야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놈에게 하루빨리 가정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신부감이 네 명이나 나섰으니 그중 하나만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게야. 에효~!”
종내에는 한숨을 쉬는 천산노야였다.
구바우가 천궁대영호가 된 이후로 숱한 혼담이 쇄도중이었다. 하지만 구바우의 신분이 있는 터라 대부분의 혼처는 알아서 떨어져 나갔고 마지막까지 네명의 처녀가 경합을 하게 되었다. 그 네명의 처녀는 배경이나 미모가 막상막하라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중이다.
결국 얼마전 처녀들의 후견인들은 자기들끼리 협상을 하여 네명을 모두 구바우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결정해버렸다고 통보해왔다. 구바우나 천산노야의 의사는 일체 무시하고! 만에 하나 탈락하는 것보다 천궁대영호의 배우자라는 자리를 나눠가지기로 한 것이다.
열 여자 싫다고 할 사내 없는 법이라 구바우는 좋아 입이 귀 끝에 걸렸지만 천산노야의 심사는 그리 좋지만도 않다. 여자 하나 거느리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때문이다.
“그 검둥이 흰둥이가 반씩 섞인 놈이 뭐가 좋다고 신부감이 네 명이나 되는지, 원…….”
구바우와 그의 네명의 약혹녀를 떠올릴 때마다 설레 고개를 젓게 되는 천산노야였다.
즐독합니다
그냥 천럭을 가졌을뿐 평범한 것 같은 분위기네요,
ㅈㄷ
잘 읽었읍니다
감사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