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일탈을 꿈꾼다.
노병철
이상하리만치 요즘 우울증 환자가 늘고 있다. 생활환경은 분명 먹고 살만한데 왜 우울해 지는지 그 생체 리듬적 과정은 알 수 없지만 분명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자기 모습에 괴로워 한다는 사실이다. 이게 중년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장년 남자에게도 이런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가다 거실에서 만나 서로 안부 묻는 아내지만 여전히 옆에 존재하고 있고, 애들도 지방대학이지만 부모 능력 무시하지 않으려고 장학금 한번 받지 않고 애비 등골 제대로 빼며 졸업해서 너무나 걱정 될 정도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데 뭐가 불만인지 사는 게 별 재미가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위 많은 동년배들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아 정신과 의사들의 입이 귀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
결혼생활을 30년을 했다면 시간으로 따지면 2십6만 시간이고 분으로 따지면 1천5백만 분이다. 영화 한편 보는 시간을 계산하기 편하게 100분으로 잡으면 15만7천편의 영화를 보게 되는 꼴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멜로영화만 15만편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반쯤 미쳐서 날 뛸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은 폭력이 심한 홍콩영화도 보고, 야리 꾸리한 세미포르노같은 자극적인 영화도 보고, 말도 안되는 듯한 환타지 영화도 좀 곁들이고, 춘향전같은 고전영화는 물론 되게 무서운 귀신영화도 보아야 그 시간을 알차게 다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을 마냥 멜로로 착각하는 젊은 애들에게 결혼 50년이 다되어 가는 선배 한 분이 아주 점잖은 말로 충고하는 걸 보았다. “꿈 깨라” 결혼40주년, 50주년 즐겁게 살아오신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분들조차 늘 평온한 생활만 했겠는가? 현실과 이상을 혼동하고 현실이 아닌 이상에 안주 하고 싶은 마음을 보바리즘이라고 한단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엠마의 사는 모습을 보고 보바리즘이라게 생겼는지 아니면 엠마의 남편 샤를르 때문에 보바리즘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현실과 이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생활에서 오는 권태를 어떤 방법으로 해소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원하지 않는 삶에 맞서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은지 그런지를 쉽게 가치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든지 꼭 찾아야만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 ‘부작용’이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한번이라도 한문으로 긁적여 보면 알 수 있는 뜻을 그냥 대충 아는 척 하느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부작용을 한문으로 쓰면 不作用이 아니라 副作用이다. 즉 일어나지 않아야 될 작용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약을 먹으면 이런 부작용이 납니다’라고 적어 놓았고 그 문구를 읽어보면 얼굴이 빨갛게 된다는 홍조라든지 간지럽다는 뜻의 ‘소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고 적혀있다. 살아나가는데 ‘일탈’은 분명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不作用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는 副作用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삶의 ‘일탈’을 이상한 쪽으로 많이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외도(外道)라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지는 몰라도 본능에 충실한 대다수의 남자들에겐 ‘바람’이란 단어와 연계되고 만다. 오죽했으면 국어학자분들께서도 대사전에 외도를 오입(誤入)으로 기록 해 놓았을까. ‘오입’은 들어갈 때 안 들어가고 잘못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여기에다 어떤 속성을 얕잡아 부르는 단어인‘쟁이’가 붙어 오입쟁이로 매도되고 만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디 가서 일탈이니 외도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쉽지가 않다. 설상가상 실제 오입쟁이들은 이미 체면 따윈 다 잃었으니 염치없는 짓을 서슴없이 해 되는 통에 옛말에 ‘오입쟁이 헌 갓 쓰고 똥 누기는 예사다’는 말처럼 온 산을 모텔 집성촌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작금의 대다수 중장년 남자들은 속마음으로 꿈만 꾸지 실행에 잘 옮기지 못한다. 이런바 경제개발 시대를 살아온 터라 뼈 속까지 근면 절약정신이 배겨있어 물려받은 땅이 올라 졸부가 되거나 로또 1등에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하지 않은 이상 절대 헛돈 못 쓴다. 술집 아가씨에게 줄 팁이 아까워 허벅지 한번 못 만지고 나오고 식당에 상 차려주려고 허리숙인 서빙아줌마 젖가슴을 보고 놀라 혀 깨무는 남자들이 무슨 언감생심 그런 외도를 꿈꾸겠는가. 오로지 내 집 한 칸 마련해서 대문 옆에 내 이름 석 자 적힌 문패 하나 걸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을 살아 온 터라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남의 일 같지 않아 눈물짓는 세대인 것이다.
그래서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빠듯한 이 어려운 경제 환경에 한 푼이라도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자 이 추운 겨울에도 거시기 요롱소리 나게 뛰고 있는데 뭔 이상한 눈길로 보느냐며 시간 날 때마다 항변하고 있지만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불교문학 공부하는 것과 한국화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뿐이다. 이런 처지에 웃어른들처럼 ‘작은집’ 챙길 여유며 정신이 어디 있냐고 열심히 입에 침을 튀기며 집사람에게 하늘같은 지아비를 제대로 좀 보라며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가만히 내 머리를 보더니 한마디 한다.
“애들아 아빠 머리 볶았다. 요즘 미장원 아줌마 만나는 모양이다.”
첫댓글 요즘같은 시국에 산문이
란 잘 읽히는게 중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읽고 공감대가
넓으면 많은독자가 생겨
전달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성공을 등에지게됩니다. 문학성이란 글을 사실대로 않쓰고 작가가 느낀대로 형상화를 잘 하는
기술이라 볼 수도 있지요.
앞으로 통신기술발전 땜에 문학도 세계화가 되어야 하는데 작품을 그대로
번역했을 때 제대로 알아먹는 인구가 얼마나 될까가 문제입니다.
난 에세이를 쓰니까 독자도 한정적이고 호불호가
확실이 가려지는것 알고
있지만 지난 30년을 써
왔어도 앞으로 그냥 갑니다. 예술은 각자가 가는게지 어떤 룰이 있드래도
극히 제한적이 여야 한다
생각합니다.
노국장님 핫팅
저 역시 매일매일 일탈을 꿈꿉니다.
새로운 일을 기대하고,
새로운 설렘을 희망합니다.
머리 볶으셨습니까.
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