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반, 고기 반
조 흥 제
“지난 겨울 ‘용의 머리’에 올라서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니 강이 검습디다. 왜 그런가 하고 자세히 보니 검은 몽돌을 깔아 놓은 것 같았는데 고기의 검은 등이었습니다. 급히 마을에 있는 동업자들을 불러 강 아래 위쪽에 그물을 치고서 좁혀 와 용의 머리에서 들으니 고기가 몇 트럭이 나왔습니다.”
“에이, 여보시오. 그런 구라가 어디 있어요.”
우리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진짜예요.”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 선산을 관리하는 ‘묘지기’다. 선산(先山)이 임진강 가에 있는데 그 마을 사람에게 산소들을 관리하게 했다. 선산에 딸린 밭도 수백 평 되어 그 밭을 부쳐 먹으면서 벌초도 하고 시제도 지내게 한 것이다.
임진강 이북에는 사람이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민통선으로 지정되어 꼭 볼일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군 초소에서 들여보내지 않는다. 따라서 임진강에서 고기도 잡지 못하게 한다. 우리 묘지기는 군의 허가를 얻어 그 마을 세 사람과 함께 고기를 잡을 수 있단다.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1984년8월23일, 임진강 건너 원당리 선산에서 대동벌초(大同伐草)하는 날이다. 종로 5가에서 사촌형과 형수와 함께 자가용차에 올랐다.처서날에 하고 있다.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하니 우리 일행을 데리러 그곳에 사는 일가가 나왔다.
평소에는 벌초를 끝내고 저녁 때 나왔으나 그 날은 자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일가 동생이 고기를 잡는데 명수였다. 마당에는 시멘트로 3평 정도 되는 수조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잡아 온 고기를 넣고 길렀다. 손바닥만 한 붕어가 아니라 팔뚝만한 숭어다. 벌초 날 점심에는 그걸로 회를 떠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그날은 밤에 강으로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 마을 사람들과 경운기를 타고 강에 갔다. 낮에는 군 초소에서 지키지만 밥에는 몰래 들어가 잡는다고 했다. 강 양쪽에 군 초소가 있어 불도 못 켜고 말 소리도 크게 못 낸다. 밤에는 고기가 잘 잡힌다. 강가에 이르니 처처에서 둠벙둠벙 소리가 났다. 고기가 점프하는 소리라고 했다. 60m 초코를 양쪽에서 잡고 한 사람은 강에, 한 사람은 가에서 잡고 하류로 내려갔다. 이곳이 내 고향이다. 나는 해방 전 여기서 살아 빨래 하시는 어머니를 따라 와 멱(수영)을 감던 생각을 하고 물속이 깊지 않은 것을 알고 그물을 잡고 강심으로 들어가 허리께 높이를 유지하면서 내려갔다. 20여 분만에 나오라는 신호가 와서 나오니 팔뚝만한 고기가 그물에 널어 말리는 것 같이 걸렸다. 두 번 치니 비료포대로 한 가득 잡혔다. 친척 집 부엌에 와서 쏘가리는 매운탕 끓이고, 숭어는 회를 떠서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짧은 여름밤은 훤하게 밝아 왔다.
이건 진짜다. 양심을 걸고 말하겠는데 손톱만치도 거짓말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묘지기의 허풍도 터무니 없이 부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영삼 대통령 때 임진강 건너는 검열을 풀어 아무나 들어가 고기를 잡게 해 이제 임진강에서도 그런 낭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