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 도둑>
박안나
내가 연주회 초대장을 받은 것은 낙엽이 소복이 쌓이던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아빠, 편지 왔어요!” 딸아이가 낙엽 속에 파묻힐 뻔한 편지를 찾아왔는데 거기에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강인구, 강인구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초대장을 보낼 만큼 가까운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큰조카 친구가 보낸 건가, 중얼거리며 동봉한 팜플렛을 꺼내보았다. 야무진 이마에 미소로 반짝이는 눈빛. 문득, 기억의 골짜기를 휘휘 돌던 바람과 검은 구름이 싹 걷혔다. 그리고 이내 햇빛이 쏟아졌다. 그래. 바로 그 녀석이로군. 그 녀석이야! 가슴이 울렁이더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허허허허...... 허허허허...... 그 녀석은 커다란 눈망울에 선하디선한 웃음을 담고 늘상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찻물을 올리거나 난로에 조개탄을 부을 때에도 말이다.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한 때 어느 소읍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시<詩>라는 연인이 던진 시퍼런 독화살에 맞아 한창 짝사랑을 앓는, 그러니까 시인이 되고 싶어 무던히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건 너무나 달콤해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짝사랑을 이루는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그 녀석처럼 말이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아마도 좁은 마을길이 넓혀지고, 구불구불하던 신작로마다 아스팔트가 깔리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운동장에 쌓인 낙엽을 휘몰아 가던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던 어느 저녁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내년에는 꼭 중학교에 갈 거라던 까까머리 급사 아이를 보낸 뒤였다. ‘풍금 소리다!’ 찻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막 교지 편집 작업을 시작하려던 나는 엉겁결에 중얼거렸다. 사실 매일 저녁마다 무심히 지나쳤던 소리였다. 그런데도 그 날은 이상스레 내 귓전을 파고들며 가슴을 흔들었던 것이다. 군대의 말발굽 소리처럼, 때로는 풀잎을 기어가는 벌레들의 움직임처럼 섬세하게 긴장된 저 소리! 사실은 몇 달 전부터 늘 들어온 소리였다. 호기심으로 저러다가 싫증나면 그만 두겠지, 하고 지나쳤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한 가지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보다. 우리 영혼을 심하게 뒤흔들어 놓기도 할 만큼, 지독한 열병처럼 말이다. 나도 그랬다. 어릴 적 처음 형의 교과서에서 ‘사과’라는 글자를 알아보았을 때의 그 글맛이라니! ‘사과’ 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 오던 때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종이에 박힌 글자가 아니었다. 나무에서 갓 따온 싱싱한 사과였다. 그 글자가 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붉은 사과를 덥석 베어 문 것과 같았고,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안 가득 도는 향기와 단맛을 꼴깍 삼켰던 것이다. 그 뒤로는 언제까지나, 아주 오래도록 책만 보고 싶었다. 염소를 몰고 다니거나, 공을 차다가도 책을 펼쳐 들곤 했다. 내가 시인이 되고 싶은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녀석도 그런 모양이었다. 처음엔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들을 단음으로 눌러보는데 엉뚱한 음을 짚어 풍덩 개천에 빠지는 격이었고, 또한 눌러보는 반주부가 얼마나 엉터리였던지 그 불협화음에 킥킥 웃고 말 정도였다. 보나마나 청소를 끝낸 당번 녀석이 호기심에 쳐 보는 거겠지, 했다. 그런데 녀석은 아주 늦게까지 남아 풍금을 쳤다. 어스름이 깔리고, 이윽고 첫 달이 떠올라 달빛에 책상이 하얗게 돋아날 때까지. 녀석은 한 번 본 풍금의 맛이 정말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 날부터 매일, 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풍금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게다가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며칠 뒤 도서실에 있는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더 이상 삐걱대던 그 풍금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왼손으로는 단조롭지만 반주를 넣었는데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도미솔····· 도파라···· 솔시레·····” 훗, 영리한 녀석이로군. 화음을 찾아내다니. 그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날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를 습관처럼 흘려보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저 아름답게 피어나는 음 빛깔을 보라지. 서투르지만 강약이 있고, 온갖 빛깔이 살아나 상상력을 부풀리며 꿈꾸게 하는 음악이야.’ 그렇다. 그건 음악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저건! 매일 줄기차게 연습하던 저 소리는 바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잖아!’ 비록 쉽게 편곡된 것이라고는 해도 얼마 전 겨우 단음을 누르던 녀석의 솜씨라니.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물이 끓기 시작한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풍금소리가 들려오는 교실로 향했다. 누굴까······. “치익 치익 치익 치익······” 습관적으로 끄는 슬리퍼 소리에 신경을 쓰며 복도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학교 뒷산 떡갈나무 숲이 바람을 타는지 머리채를 푼 채 헝클어지고 있었다. 긴 복도 끝 교실에서는 여전히 풍금 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람에 실려 온 수백 만, 수 억 개의 빗방울들이 은전처럼 떨어지는 듯 했다. “뚝··· 뚝··· 뚝··· 또로록 똑똑똑····” 강하고 깊게 저음부를 울리며 패이던 풍금 속 굵은 빗줄기가 막 가녀린 보슬비로 바뀌었을 때였다. 마침내 나는 풍금소리가 울려 퍼지는 교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교실 앞에서 발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똑똑!” 노크를 하려다가 멈칫 손을 놓고 말았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는 교실 문에 기대고 서서 복도 유리창에 걸린 풍경을 바라보았다. ‘단풍이 물든 저 떡갈나무 숲. 비록 발자국은 남기지 않았어도 오늘도 누군가가 저 숲길을 지나갔겠지.’ 문득 말 하나도 밉게 놓이지 않은 그런 시<詩>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시인으로서 분명한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해 내 가슴은 슬픔으로 먹히는 중이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내 자신이 낱말 하나하나를 갉아먹는 벌레에 지나지 않을 텐데. 시인이라니? 당 치도 않지!’ 생각이 들자 절로 눈물이 났고, 몹시 목이 타서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내 몸이 덜컥, 움직여졌다. 연습을 끝낸 녀석이 문을 밀었던 것이다.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만 “누구야!” 소리를 질러 버렸다. 녀석이 놀라 들고 있던 악보를 떨어뜨렸다. 악보가 펄럭거리며 낱낱이 흩어졌다. 허겁지겁 악보를 줍던 녀석이 갑자기 정신이 드는지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서,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푸, 풍금 도둑이에요.” 악보를 쥔 손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악보를 빼앗았다. 사실 진한 가지 빛으로 가라앉은 복도에서, 그것도 느닷없이 툭 불거진 내 모습에 녀석도 놀랐겠지만 내 놀라움은 더 했던 것이다. 녀석은 바로 우리들의 심부름꾼, 그러니까 시간마다 학교 종을 땡땡 울리며 내년에는 꼭 중학교에 갈 거라며 수줍게 웃던 까까머리 급사였기 때문이다. 영영 빼앗기고 말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이고 막 악보를 돌려주려던 참이었다. 나는 눈이 둥그래져서 손때가 묻어 너절해진 악보를 살펴보았다. 악보는 인쇄된 것이 아니었다. 자를 대고 그린 오선 위에 연필로 그린 음표들이 겹겹이 들어찬 도화지였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쿡쿡쿡쿡·······. 내 웃음은 더욱 커졌다. 어허허허······ 어허허허······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나는 눈가에 질금거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눌러 닦았다. 웃음을 멈추고 창 너머 어둠에 묻힌 떡갈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빗방울 전주곡’이 비를 불러들인 것일까. 바람 타던 떡갈나무 숲에 후두두둑····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말없이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며 돌아서고 말았다.
낙엽 속에 파묻힌 연주 홀은 일찌감치 사람들로 붐볐다. 성공리에 ‘강인구 귀국 피아노 독주회’가 끝난 뒤였다. 꽃다발을 든 딸을 앞세우고 나는 무대 뒤로 갔다. 나비넥타이와 연주 복 단추를 풀고 땀을 닦던 녀석이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오늘따라 후줄근해 보이는 내 차림새가 영 마음에 걸렸으나 나는 악수를 청했다. ‘축하하네.’ 소리가 목구멍에 걸릴 뿐 끝까지 말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녀석은 와락 내 손을 잡더니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선생님, 오셨군요. 와 주셨어요. 혹시나 해서 옛 주소로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이렇게 와 주실 줄은 생각 못했어요.” 이런 저런 생각을 품고 있던 내가 그저 웃기만 하자, 꼭 그때 까까머리 풍금 도둑만큼 큰 딸 아이가 꽃다발을 전하며 말했다. “호호홋! 선생님이 그 유명한 풍금 도둑이지요? 저도 피아노 공부를 하거든요. 아빠는 제가 꾀를 부린다 싶으면 늘 그 옛날 풍금도둑 이야기를 하셔요.” 그런데도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에는 늦은 나이에, 그것도 독학으로 이룬 피아니스트의 길이 아닌가 말이다. 그 동안 녀석은 오직 피아노를 치기 위해 살았다고 했다.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구걸 피아노를 치거나, 도둑 피아노를 치다가 쫓겨나기가 예사였단다. “······선생님. 바로 이 손이었어요. 툭툭 등을 두드려 주시던 손. 이 손이 그 동안 어땠는지 아세요? 힘든 고갯길을 만나 지칠 때마다 제 등을 밀어 주곤 했지요.” 달뜬 목소리로 외치던 녀석이 기어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인사차 들른 녀석의 동료들과 문 곁을 지나던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내 손을 부여잡은 체였고, 손을 붙잡힌 나는 몹시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한 쪽에 비켜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딸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며칠 뒤, 선생님이 저를 보자고 했을 땐 이젠 틀렸구나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음악실 열쇠와 ‘빗방울 전주곡’ 원본 악보를 주시면서,” 말을 채 끝맺지 못한 녀석이 훌쩍, 코를 들이마셨다. 부시럭거리며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세요, 선생님! 제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랍니다.” 누렇게 바랜 채 코팅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악보였는데, 내가 어렵사리 구해 주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탈바가지처럼 웃는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에 발그레 눈물이 번졌다. 빗방울 같은 눈물이 떨어지면서, 내 심장 깊은 곳에 박혀서 녹슬고 있던 독화살을 건드렸을까. 시퍼런 독기가 지르르르·····퍼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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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쁨 님(박안나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은상이도 키우고 글도 열심히 쓰시고 존경스럽습니다. 다음 글 올릴 선생님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은 김향이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
김향이 선생님의 글 향기는 5월 20일에 만날 수 있습니다. 기다려집니다.
기쁨이 내게로 전해졌네. 늦둥이 키우느라 학원 경영하느라 동부서주하는 걸 안타까이 바라보며 그동안 펜촉이 녹슬까 염려 되더니 오늘 마음 놓았네. 흐믓하게 기쁘게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도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방에 방문객들 글이 넘쳐 여기다 글 남깁니다. 눈물이 핑 돌더군요.
빗방울 전주곡이 들려오는 듯한 동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함초롬님, 늘 변함없는 관심에 감사하다는 인사 드립니다. ^^*
선생님의 글 향기가 듬뿍~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