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집가의 초대*
윤 종 희
여름의 막바지다.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고 있다. 초대장 없는 하객이 국립중앙박물관 마당 가득이다.
초대장을 가진 사람은 들어갈 수 있으나, 없는 사람은 초대된 사람이 빠진 수만큼만 들어갈 수 있어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다섯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초대되었다. 꼬박 일 년을 기다린 결과다. 작품을 함께 즐기자고 초대한 수집가의 집으로 벅찬 마음 가득 안고 들어갔다.
집 입구에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석조물이 우뚝 서 두 손을 모으고 손님을 맞는다. 민머리 이마에 백호가 그려져 있고, 키가 작은 석인상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토끼 같은 것을 잡고 있다. 설명에 잡귀를 쫓아내거나 마을의 약한 걸 메워주는 장승과 같은 역할이란다. 그런데 그 표정이 단순하지만 다채롭다. 무뚝뚝하고 어수룩한 표정이 소원을 들어줄 신령한 존재로 권위적이지 않고 친근하여 우리 선조의 속뜻이 궁금했다.
‘우리 집을 소개합니다’라는 안내에 따라 궁궐 문처럼 위가 둥근 점토로 된 문으로 안내되었다. 황토 빛깔 엷은 붉은색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우리나라 근현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의 점토에 붉은색을 칠한 부조물이다. 붉은 문을 지나 수집가의 집 수집품이 만들어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기와집 아래 황토 위 선으로만 표현된 노부부가 누워 있는 임옥상의 〈김 씨 연대기 11〉다. 그 어떤 설명이 없어도 노부부가 가족을 지키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터전을 일구어낸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윗세대의 희생을 기둥 삼아,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재의 토대를 마련해 준 그림은 조용하고도 은근하게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콧수염이 난 자신과 부인과 아들을 그린 장욱진의 〈가족〉,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 등 가족을 주제로 한 따뜻한 그림들은 나날이 삭막해져 가는 현재 우리 가족 공동체를 생각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이중섭의 〈현해탄〉, 그림 속에서 그는 통통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러 가고 있는데, 얼마나 기뻤으면 머리가 완전히 뒤로 젖혀진 얼굴을 그렸을까. 그의 생 전부였던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나러 가는데 왜 아니 그랬겠는가.
수집가는 정약용의 〈정효자전> <정부인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 정여주의 요청으로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정관일이 생전에 했던 효행을 적은 글과 자신의 며느리이자 정관일의 부인 김 씨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겠다는 마음가짐의 글을 다산 선생에게 부탁해 써준 작품이다.
그에 못지않게 선생 역시 유배지에서도 아내가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다섯 폭 낡은 비단 치마를 70여 장으로 자르고 다듬어 하피첩霞帔帖을 만들었다. 시집가는 딸에게는 축하와 당부의 말을, 아들들에게는 가장으로서 선비로서의 도를 적어 보냈다. 이렇듯 집안 어른으로서의 위계질서와 해야 할 도리를 자식들에게 보여준 우리의 선조들 지혜를 보며, 잠시 어른이 없는 이 시대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며.
다리가 피곤할 즈음 삼층장과 작은 서랍 일흔두 개 약장과 삿다리 장식 삼층장이며, 안방에 있어야 할 반닫이장이 놓여 있는 사랑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릴 적 귀한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평상시에는 쓰지 않던 상다리가 곡선이면서도 정교한 예쁜 상에 다과를 내오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기획된 자리에 앉자 영상과 함께 잘 차려진 구족반* 다과상이 내 앞에 있다. 손님으로 주인과 겸상하여 이 공간의 것들을 은근하게 공유하며 교감하란다.
그때 영상 속에서는 기와 처마 끝으로 비는 흘러내리고, 세상은 고요한데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와 나뭇잎에 후드득후드득 빗방울 듣는 소리만이 들린다. 그때 주인이 내온 따끈한 차 한 잔에 나를 맡기며 사색에 젖어 잠시나마 여유자적餘裕自適 조선의 선비가 되어보고 일어설 즈음, 비는 그치고 멀리 앞산 능선으로 비구름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 모든 게 상상이었으나 귀한 손님으로 대접도 받으며 주인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고, 잠시 나를 들여다보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며 쉼과 여유가 있는 풍류까지 즐겼다.
주인은 다시 객을 모네의 정원으로 데리고 간다. <수련이 있는 연못>이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 그린 것으로 그림을 영상으로 바닥과 벽면에 비추어 내가 수련이 있는 연못에 들어와 거닐고 있는 양 착각을 일으켰다. 집에 초대된 손님들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학생들의 생동감 넘치는 왁자함도 유쾌했다. 이런 발상의 기획이 신선했고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우리 문화콘텐츠는 이제는 그 위상이 나타나 자부심을 느끼며 박수를 보냈다.
예술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각과 반응이 담겨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해 왔다. 자연은 인간에게 먹거리를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공간이며, 맨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장 편안한 자연은 길들인 자연일 것이다. 그런 삼국시대 흙으로 빚은 토우장식 그릇과 소 말 모양 명기 등이 그곳에 그득했다.
다시 수집가를 따라간 곳에서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조우했다. 그림 오른쪽에 글이 있다. 첫 줄엔 ‘인왕제색仁王霽色’ 즉 ‘인왕산 비가 개다’이다. 다음 줄엔 정선의 호인 ‘겸재謙齋’ 마지막엔 ‘신미 윤월 하완辛未閏月下浣’이라 적혀 있다. 작년 서대문인 돈의문 성곽을 돌 때 치마바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질 못했다. 천 길 낭떠러지여서 오금이 저려 슬금슬금 기어 바위 위를 건너갔던 생각을 하며 그림 앞에 섰다.
인사동 네거리 어디쯤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 영상이 비쳤다. 화면 앞쪽 연운煙雲을 따라가다 우뚝 솟은 검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치마바위의 선명하게 남은 굵은 붓자국은 검게 칠해 물기 머금은 상태를 표현함으로 바위의 존재감을 더 드러낸 듯하다.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붓을 다루면서 화면에 공간의 깊이를 연출하고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 근처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아침에는 북악산 안개를 저녁에는 인왕산 노을을 마주했을 것이다. 동네 뒷동산을 그린 정선은 <인왕제색도>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보이는 여러 바위의 특징을 잘 살렸고 한양 성곽도 점으로 툭툭 찍어 표현했다. 정선은 청운동에서 태어나 줄곧 살다 52세 때인 1727년 인왕산 아래 옥인동으로 이사를 왔다. 평생 인왕산 인근에서 실아 온 정선에게는 인왕산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실제와 다르단다. 그의 나이 76세, 정선이 자기 삶의 터전이 되어준 인왕산을 애정 어린 자기만의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이지 싶다. 그의 시각으로 본 비 갠 인왕산의 특별한 순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내어 그의 평생 역작이 되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대작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음에 가슴이 벅찼다.
그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옆의 <추성부도秋聲賦圖>와 마주했다. 김홍도 예순하나의 나이 1805년 겨울에 그린 연도가 확인되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추성秋聲’ 가을바람 소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추성부>는 중국 북송의 구양수가 ‘가을바람 소리를 표현한 시’다. 김홍도는 이 시를 가지고 그림으로 옮기고 시 원문을 여백에 써서 <추성부도>를 완성했다. 시와 그림, 글씨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걸작품이다. 수묵화법으로 화면 전체를 엷게 먹칠하여 밤의 분위기를, 나무와 바위를 마른 붓으로 그려내 건조한 가을 산하의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은 시공간을, 서안書案 앞의 선비와 바깥 상황을 알려 주는 동자의 몸짓은 인물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옛 선인의 보이지 않는 자연을 표현해 내는 탁월한 정서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밖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자기만의 내면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 임금이 붕어한 후 아들 수업료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해 아픈 몸을 일으켜 마지막 대작이 될지도 모를 <추성부도>를 묵묵히 그려내지 않았을까.
가을날 달밤의 소리가 여운으로 아직 남아있는데 불국사 설경이 나를 맞는다. 은은한 영상과 함께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하얗게 뒤덮인 겨울날 불국사 설경雪景이다. 박대성의 <불국의 설경>, 겨울 고요한 산사를 마음에 얹는다. 그는 뉴욕에서 불국사 설경을 그리기 위해 일 년을 절 손님방에서 묵었다. 마침 그해 겨울 경주에는 칠 년 만에 눈이 내렸고, 박대성은 불국사의 눈 내린 고즈넉한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는 불국사에서 받은 감동을 한글 고체로 적어 놓았다.
겨울은 고요한 계절입니다/가을까지 떠들썩했던 생명의 소리가 잦아들고/ 바람 소리와 고라니 울음소리만 유난스럽습니다./눈이 내립니다./소복하게 쌓인 눈 속에 소리마저 묻혀 버리면/새하얀 별세상이 펼쳐집니다./“내가 있는 동안 눈이 오면 좋겠는데...”/그날/ “불국사의 낯선 침묵”/눈 덮인 소나무들만 저마다 가지를 널어 뜨리고 침묵을/만끽하고 있습니다.
-불국사를 그리는 작가의 소회를 적은 글 중 일부
초대해 준 수집가의 배웅을 받으며, 차고 넘치도록 차려진 잔치상에서 주인과 나누고 누릴 수 있었던 충만함에 감사하다 고맙다를 몇 번을 되뇌었다. 자연과 교감하며 남긴 작품과 흙과 금속을 활용하여 문명이 발전되어 왔음도 보았다. 글과 그림으로 생각을 펼쳐냈으며,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생각의 경계를 넘어온 인류의 이야기를 간직한 물건들이 수집가 덕분에 잘 보존되었다. 그리고 전시장 작품들의 기획력에 한 번 더 박수를 보낸다. 그저 미술품을 보이기 위함이 아닌 관객과 공유하며 수집가와 교감도 나눌 수 있는 쉼과 여유를 줌으로 작품세계에 푹 빠져보는 헐렁함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혜안과 문화 사랑 정신으로 수집된 문화유산과 미술품을 함께 누릴 수 있었음에 기쁨이었다. 그의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생전 그는 ‘문화는 좋거나 나쁜 것의 우열이 아니라 다를 뿐이요,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느냐, 우리 나름의 문화가 정체성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라의 격변기에도 이건희 회장뿐만이 아니라 간송 전형필을 위시한 수집가들이 있었기에 문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서며 잔치에 초대해 준 주인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국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내어준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게 감사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제목
*구족반 굵고 두툼한 다리 윗부분이 밖으로 둥글게 벌어지다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시 발끝까지 안으로 굽어져 있는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