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두 번째 일본행
소회주님, 이 창영을 데리고 왔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곽균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양휘를 향해 말했다.
창가에 서 있던 양휘는 고개를 돌렸다.
파리한 안색의 이창영이 곽균의 옆에 서 있었다.
이창영의 두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한
모습이었다.
양휘가 자리에 앉아 곽균과 이창영은 그의 정면에 섰다.
그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양휘의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낀 이창영의 머리가 저절로 떨어졌다. 지난 번 만남 이후 그는 양휘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양휘의 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이 식은땀으로 젖을 정도였으니 그는 지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했다.
예, 소회주님,
이창영은 등을 곧추세우며 대답했다. 그는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나고 있었다.
심하게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양휘도 곽균도 이창영의 긴장을 풀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자를 어떻게 끌어내겠다는 건가?
양휘를 대신해 질문한 건 곽균이었다.
이창영은 드러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후 말문을 열었다.
임한은 약점이 거의 없는 자입니다. 평소에도 철저하게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는 자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곽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창영의 파리했던 안색이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허옇게 변했다.
그때 양휘가 곽균을 손짓으로 침묵시킨 후 이창영을 향해 말했다.
약점이 거의 없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약점이 있긴 있다는 말인 듯싶은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이창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게 뭔가?
사람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임한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가 평생 세 사람과 끊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맺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정운이란 중과 향토 사학자인 이준하 그리고 이청운이란 친구입니다.
친구라.
양휘와 곽균의 두 눈이 동시에 강렬한 빛을 발했다.
이 창영의 말은 계속되었다.
정운과 이준하는 임한에 의해 한국지회가 붕괴되기 전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청운은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이청운이란 자의 신변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긴다면 임한이 움직일 것이라는 건가?
양휘는 생각에 잠기며 물었다. 양휘는 신변의 문제라고 돌려 말했지만 그것이 납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와 대립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조직을 동원해 이청운의 집 주변을 경호했습니다. 조직이 드러날 위험조차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이청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는 반드시 움직입니다.
이창영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양휘의 미간은 오히려 깊게 파이고 있었다.
이청운이 그자의 유일한 친구라는 말인데 그 이청운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나?
한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지회가 건재하다면 몰라도 현재로서는 한국에 있는 자를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게다가 이청운이 임한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라면 천부가 그를 경호하지 않을 리 없다.
이나가와의 야쿠자들이 한국에 들어가 있지만 그들만으로 이청운이란 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작전을 펼 수는 없다. 임한과 천부의 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목표는 이청운이 아닙니다.
이창영의 말에 흥미를 느낀 양휘의 시선이 점점 깊어졌다.
소회주님 말씀처럼 이청운의 주변은 천부가 철저하게 경호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사람을 보낸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 경호를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뚫었다 하더라도 그 시간차라면 임한이 현장에 올 것입니다.
이청운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은 실패할 확률이 99퍼센트입니다.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킨 이 창영은 말을 이었다.
이청운은 목숨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임한과도 가족처럼 친하죠. 그녀가 납치된다면 분명 이청운은 임한과 상의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임한은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누구 때문에 납치되었는지 모를 리 없으니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양휘와 곽균을 번갈아 바라본 이창영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양휘에 대한 두려움은 역력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듯 그의 두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이 나라 안에 있습니다.
이창영의 마지막 말을 들은 양휘와 곽균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임한을 한국에서 끌어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신도철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주호에게 그를 방문한 목적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후였다.
그는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광대뼈가 두드러졌고 굵은 눈썹은 털이 많이 빠져 듬성듬성했다.
그의 시선이 정주호를 향했다. 정주호도 그도 십여 년 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주먹 세계에서 거물로 알려진 자이지만 서충원이 건재했다면 그의 집을 찾아올 꿈도 꾸지 못했을 자였다. 그의 입가가 슬쩍 비틀렸다.
시기를 잘 타는 자다.
신도철은 정주호에 대한 선입견이 조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정주호에 대해 주먹만 믿고 날뛰는 그저 그런 자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정주호는 서충원이 교도소로 산 지금 그가 서충원의 빈자리를 메워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찾아왔다. 시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
자네가 서충원이 했던 일을 맡고 싶고, 여기 스즈끼는 이 나라에서 대부업을 하고 싶다는 건가?
그는 정주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자네 생각은 나쁘지 않군.
신도철의 말을 들은 정주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부업의 음지는 살벌하다. 서충원의 북악파가 신도철의 지시를 받을 때는 누구도 그의 아성에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그의 텃밭을 기웃거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주호를 받아들일 결심을 한 것이다.
짧게 말을 끊은 신도철의 시선이 스즈끼를 향했다.
하지만 내가 이나가와를 도울 이유는 없을 듯한데?
그의 말을 들은 스즈끼의 시선이 강해졌다. 신도철의 말속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신도철이 그를 돕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스즈끼와 신도철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렇게 표정 없는 얼굴로 신도철을 응시하던 스즈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희가 임한을 처리하겠습니다.
신도철의 안색이 변했다.
나에 대해 조사했군.
거래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입니다.
스즈끼의 음성은 여유가 있었다. 정주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충원도 실패한 일이네.
이나가와를 북악과 비교한다면 섭섭한 일입니다.
흠.
신도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즈끼는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신도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도철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임한과 신도철의 관계에 대해 일본에 있을 때 이창영에게 들었다. 이창영이 한국으로부터 밀항해 온 후 중국으로 갈 때까지 그를 보호한 사람이 스즈끼였던 것이다.
대오야붕 야마나까로부터 한국행을 지시 받고 대부업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스즈끼는 신도철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신도철을 등에 업을 수 있다면 한국 내에서 기반을 잡는 것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 떠올린 것이 임한이었다.
그가 한국으로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임한에 대해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임한과 신도철을 연결 지어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자네가 원하는 것은 얻게 해주지. 하지만 임한에 대한 자네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네. 그 약속이 깨지는 순간이 이나가와의 기반이 사라지는 순간이 될 걸세.
신도철의 시선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스즈끼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 드리워진 웃음이 짙어졌다.
야마나까는 임한에 대해 정보 수집 이외의 어떤 공작도 불허했다. 공작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자체도 허락되지 않았다. 스즈끼는 야마나까가 그렇게 지시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대강 알고 있는 바로는 임한은 현직 경찰이라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라고 제거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대오야붕은 임한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다. 그러나 임한이 설사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라 해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즈끼는 야마나까 대오야붕의 지시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는 시점에서 야마나까에게 임한의 제거를 허락 받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한국에서 조직 기반을 잡는 것은 이나가와의 오랜 소망이었다. 신도철의 도움을 받으면 그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는 야마나까가 그의 건의를 허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임한은 이나가와 한국 진출의 제물이 될 것이다. 스즈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자였지만 회를 알지 못했다. 그는 이나가와의 조직원인 것이다.
신도철과 스즈끼, 정주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서로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이상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실제적인 부분에 맞추어져 있었다.
옥상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사람의 얼굴에 지루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래에서 들리는 말에는 더 이상 귀담아 들을 내용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옥상은 삼십 센티미터에 가까운 철근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는 아래서 들리는 말을 듣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벌렁 드러누운 그의 두 눈에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이 들어왔다.
해안가의 울퉁불퉁한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하면서 시계를 보고 있었다.
늦는군.
사내의 굵은 음성에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달빛에 드러난 사내는 삼십 대 후반 정도였는데 입고 있는 양복상의가 부풀어 터질 듯한 근육의 소유자였다.
그가 있는 곳은 나가사끼 항에서 십오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은 바닷물의 풍화 작용으로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발을 디딜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협해서 평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사내가 다시 시계를 보기 위해 손목을 들었을 때였다.
많이 늦었습니까, 형님?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사내는 온몸을 긴장하며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본 사내의 얼굴에서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귀신이 따로 없구만, 언제 왔나?
방금입니다.
임한은 이를 드러내며 특유의 소리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 년 수개월만의 만남이었지만 양범구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단단한 어깨도, 웃으며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 작은 눈도.
한은 일본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밀항이다. 배나 비행기를 이용한 정상적인 루트로 일본에 입국했자면 당장 일본지회에 체크되었을 것이다. 그의 밀항은 강재은이 도왔다.
차는 저쪽에 있네.
양범구는 손짓으로 한을 따르게 하며 발소리를 죽이고 해안가를 벗어났다.
차에 탄 양범구는 계기판의 불빛에 비쳐진 한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자네 얼굴이.
한은 얼굴에 난 검상을 손으로 쓸며 싱긋 웃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놈들인가?
양범구의 두 눈에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화내지 마십시오. 형님이 화를 내실 대상들은 이미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상처를 남기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버려야 했습니다.
한은 담담한 눈빛으로 양범구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양범구는 입을 벙긋거리며 무언가를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예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간 한에게서 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핸드 브레이크를 풀고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검은색 캠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탄환처럼 튀어 나갔다.
여전하군요.
양범구가 사는 신주쿠의 맨션에 들어선 한은 집 안을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소파에는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거실 탁자에는 납작하게 우그러진 맥주 캔들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여전히 지저분하다는 뜻이어서 양범구는 두터운 어깨를 장난스럽게 으쓱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홀아비 신세인데 변한 것이 있겠나!
그는 소파에 앉은 한에게 캔 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한은 그가 건넨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일본지회에 대한 공격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그런 뒤에는 바로 일본을 빠져나와야 했다. 오래 머무른다면 일본은 요새가 될 것이고 중국에서 양천종이 날아올 것이다.
일본은 적지였다. 그가 일을 벌이고 나면 일본 전역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변할 것이다. 일본엔 그를 지원할 사람이 없다. 이곳에서 그가 시간을 끈다면 그는 독 안에 든 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지리에 훤하고 야쿠자 세계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다. 국정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국가 기관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그를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이었다. 그가 생각해 낸 사람은 양범구였다.
그는 공해상까지는 국정원에서 마련해 준 배를 타고 나왔지만 그곳에서부터
양범구가 있던 해안까지는 소형 침투용 보트를 타고 왔다. 해상을 순찰하는
자위대나 해경정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밀항하는 그를 잡아낼 수 없다.
야마구찌가 형님을 알아채지 못해서 다행입니다.
자네가 일을 깔끔하게 한 덕이지. 그래도 자네가 떠난 후 이 집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석 달이나 걸렸네. 그들이 자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한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느낀 양범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고생은 무슨 덕분에 평생 못할 구경을 하지 않았었나!
그는 야마구찌의 본거지를 무인지경으로 헤집고 다니던 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난 양범구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엔 무슨 일인데 밀항까지 한 건가? 예전에 했던 일의 연장인가?
질문을 하는 양범구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사람을 데려가야 하는 일인가 보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양범구를 향해 한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양범구의 얼굴에 기색이 떠올랐다.
아냐? 그럼 무슨 일을 하러 온 거야?
일자로 다물려 있던 한의 말문이 천천히 열렸다. 앞으로 그가 벌이고자 하는 일을 양범구는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기도 했지만 양범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전쟁을 할 겁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양범구는 한의 말을 선뜻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긴장으로 그의 작은 눈이 두 배는 커지며 음성이 시위를 당긴 활처럼 팽팽해졌다.
가능한 피하도록 노력하겠지만 반드시 죽여야만 할 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양범구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야마구찌의 오사카 오야붕 고바야시 칸지의 저택에서 손을 쓰던 한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한은 수십 명을 쓰러뜨리면서도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자네는 많이 변했군.
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던 양범구가 피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네를 믿어. 전쟁이라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이편이든 저편이든 누군가 죽어나가야 하는 상황이란 뜻이겠지.
그는 벌컥 맥주를 들이키고는 한 손으로 빈 캔을 우그러뜨려 탁자위에 올려 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를 죽이겠다는 건가? 야마구찌에 속한 자인가?
한의 대답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양범구의 입이 벌어졌다. 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했다. 그가 한이 지금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도 세상에 야마구찌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으하하 하하, 자네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그럼 야마구찌가 아니라면 상대는 누군가?
야마구찌를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호쾌하게 웃던 양범구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야무구찌를 지배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있단 말인가?
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군.
양범구는 신을처럼 중얼거렸다.
한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야마구찌를 이끌던 다께다란 자가 한국에 왔었습니다.
그가 직접 말인가?
예.
아무리 그의 수중에 있던 사람을 빼갔다고 해도 그가 직접 움직였단 말인가?
다께다의 행동은 상식에 어긋난다. 야마구찌의 대오야붕이라는 자리는 동네
골목대장이 아닌 것이다. 놀라 중얼거리듯 묻던 양범구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야마구찌를 지배한다는 자들이 그에게 한국으로 가도록 명령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허 그는 어떻게 되었나?
죽었습니다. 제 손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들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해 주겠나?
그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한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실망한 듯 미간을 찡그리던 양범구의 두 눈이 타는 듯 강렬해졌다.
그는 한을 믿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관서의 패자 야마구찌를 지배한다는 자들이었다. 소문으로도 그런 자들의 존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을 그동안 침묵시켜 왔다는 뜻이었다. 양범구가 그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 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나?
던지듯 뱉는 양범구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어투였다.
한은 양범구가 빠르게 여유를 되찾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양범구는 험하게 살아온 만큼 배포가 남다를 사람이었다.
저는 전쟁을 하러 왔습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죠. 무기라?
이제는 주먹만 믿지는 않는 건가? 양범구는 빙긋 웃으며 한의 주먹을 가리켰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상처를 최소화하며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한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오래전 이 땅에서 죽을 뻔했었다.
그때는 혼자였고, 적이 얼마나 거대한지도 몰랐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된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가 천외천부를 부활시킬 것을 믿고 죽어간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양범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자네가 싸움 방식을 바꾸었다니 나로서는 좋은 일이야. 걱정이 줄어드니까, 그리고 또 있나?
시오가마로 저를 데려다주십시요.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겠군.
양범구의 눈매에 잔주름이 잡혔다. 그는 웃고 있었다.
창밖으로 짙은 어둠에 담긴 도쿄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김 석준은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밤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하지만 별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하늘이 밤이라고 어디 갈까.
그가 있는 곳은 이 층으로 된 단독 주택의 옥상이었는데 한 개 층의 건평만 150평이 넘어 대저택이었다. 건물의 사방을 날아 갈 듯한 처마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옥상에는 수십 평에 달하는 공간이 있었다.
천하의 김석준이 좀도둑처럼 옥상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다니 네 부탁이 아니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런 짓 안 한다.
김석준은 투덜거리며 앞에서 천천히 좌우로 돌아가고 있는 감시카메라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생각이야 웅크리고 있다고 했지만 그는 팔베개를 하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의 어디에서도 추위를 느끼는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한서불침(寒暑不侵, 추위와 더위가 침범할 수 없는 경지)의 경지는 아직 멀었지만 그가 익힌 일원천강기공의 성취가 높아지면서 그는 추위에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기온이 약간 서늘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쥐새끼처럼 들락날락하기는 그는 이 층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가 있는 곳은 한남동에 있는 신도철의 자택이었다. 그가 듣고 있는 숨소리는 당연히 신도철의 숨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신도철은 그를 찾아온 스즈끼, 정주호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들을 보낸 신도철이 잠든 것은 10여분 전이었다.
한의 부탁으로 김석준이 이곳을 감시한 지도 벌써 이틀째였다.
그가 처음부터 신도철의 저택을 감시한 것은 아니었다. 한이 부탁한 것은 이나가와의 야쿠자 패거리였지 신도철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스즈끼가 신도철의 저택을 드나드는 것이 포착된 후 그는 스지끼의 감시를 조영구에게 맡기고 자신은 신도철을 감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스즈끼는 대부업을 하기 위한 준비 중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철의 도움을 바라는 상황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김석준이 신도철을 감시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신도철을 감시하면 스즈끼의 행동반경은 언제든지 알 수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스즈끼를 만난 후 신도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졌기 때문이었다.
한이 예전에 병신을 만든 놈들이 이놈들의 자식이라 이거지. 그래서 서충원의 부하들이 한을 습격했고, 스즈끼라는 놈의 부탁이 없었어도 신도철은 한에 대해 냄새를 맡고 다녔을 놈이다.
스즈끼가 다녀간 후 신도철은 여러모로 바빠졌다.
여당 의원인 전경국과 한창건설 사장 장상범 등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들을 둔 사람들과 회동을 시작한 것이다.
서충원이 한에게 보낸 수하들이 실패한 후 신도철은 전경국과 함께 임한을 외지로 보내는 작업을 했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이면서 임한은 외지로 발령 나기는커녕 경찰청으로 파견 발령이 나버렸고 그 얼마 후 북악파는 붕괴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지만 신도철에게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임한에 대해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신도철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은 돈을 갖고 있었지만 돈으로 해결 할 수가 없는 일도 있다. 임한이 구체적으로 조폭 검거 작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검경과 국정원의 중요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임한을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똥이 어떻게 튈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면서 상황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스즈끼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가. 이나가와구미는 야마구찌와 함께 일본을 양분하는 거대 조직이다.
이나가와의 조직원 수는 북악파의 열배 이상이었고 자금 능력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전문 히트맨(살인청부업자)을 거느릴 정도의 국제적인 조직인 것이다. 그는
스즈끼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김석준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신도철이나 스즈끼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미친놈들, 상대할 사람을 상대해야지. 차라리 죽여 달라고 고사를 지내라.
그는 신도철이나 스즈끼를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으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한을 쓰러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스즈끼가 한국에 온 의도는 파악되었다. 임한에 대한 정보 수집과 이나가와구미의 한국 내 조직을 만드는 것.
그러나 스즈끼의 의도는 몽상으로 끝날 것이다. 임한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한국 내 조직을 만드는 것도.
임한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저들을 처리하는 것은 김석준 혼자 힘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한에게 연락이 오면 상의를 해봐야겠다.
저들의 의도가 분명해진 이상 급할 것은 없었다. 저들 중엔 그를 긴장시킬 만한 자들이 없었다. 움직이는 동선(행동반경)만 파악하고 있으면 되었다. 그가 마음을 먹는 순간이 저들의 마지막이 될 터였다.
그러고 보면 네가 한 일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구나.
김석준은 지금 일본에 있는 한을 생각했다.
한이 한국지회를 붕괴시키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잠시 어둠에 잠긴 신도철의 저택을 둘러보던 김석준의 어깨가 슬쩍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저택의 정원에는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김석준의 움직임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