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9,1-20 요한 6,52-59 영원한 생명, 만남 등의 단어들은 요한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생명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지고지순한 바람이겠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인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쉽게 그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믿음을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어 나가고 있지요. 성찬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한 전례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 된, 너무나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거나 세련된 예식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손쉬운 몸짓들이 성찬례에 녹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줄곧 예수님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고, 마실 것을 주면 마시면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때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배고파하는지, 무엇을 목말라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굳이 필요 없는 것조차 끝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욱더 많이 채우려 덤비는 오늘의 세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고픔을 묵상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배고플 때 모든 음식이 맛있어 보이듯, 우리가 무엇에 정말 배고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이 맛볼 참된 양식을 찾는 일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이기양 요셉 신부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9,1-20 요한 6,52-59 사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혹시 못 보셨는지요? 흔히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이야기하지요. 바로 오늘 독서에서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유다교에서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 세례를 받고 ‘예수는 주님’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울 본인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울의 회개는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지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두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뽑을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4(13)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확장한 일등 공신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발명가’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를 초대 교회의 근간을 이룩한 사도라고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부르짖은 니체는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다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바오로’로 불리었지요. 역사를 바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되풀이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다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파노가 죽을 때에도 옆에서 찬동을 하였고,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마스쿠스 쪽으로 도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그의 박해는 유명하여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옆에서 도왔던 하나니아스라는 사람까지도 바오로의 악명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사도9,13)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요청에 하나니아스가 한 대답입니다. 그곳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지요.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마스쿠스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수석사제들과 원로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위임장을 받고 혈기왕성하게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길을 가고 있는 바오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지요.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9,4)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9,5) 깜짝 놀란 바오로가 묻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9,5) 이 순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유다인으로서의 사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탄생이 되지요.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혈기왕성한 유다인 사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나도 놀라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의 판단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뽑은 이유가 오늘 독서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9,15-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데에 가담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출발할 때부터 벌써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당신의 일꾼으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땅에 엎드려졌던 사울은 즉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했지요. 마치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돌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 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만나면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사도9,18) 되지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이제 그가 당장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큰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오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선교사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찬동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쏟던 유다의 열혈 청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바오로사도는 45년경 1차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많은 시련과 실패를 체험하면서 성과없는 10여 년을 보내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은둔생활을 하기까지 합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바르나바가 사목자로 부릅니다. 그때서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쓰기 위해 부르셨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사람됨과 그 행위를 낱낱이 아시고 그를 바오로로 변화시킨 후에도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묵묵히 지켜보시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자신의 경험과 의지만을 믿고 마구 행동했다면 분명히 얼마 안 가서 실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의지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힘이 빠져 성령 안에 자신을 도구로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 또한 혈기 왕성하게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지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사십 년 동안을 양치기로 보내야 했습니다. 힘이 다 빠진 모세가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3,11) 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3,12)하고 끌어내시지요.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나 지식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길 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지요. 또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긴다고 해서 시련이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도, 부활을 체험한 열 한 사도에게도, 또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도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소명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길은 험난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주는 길이지요.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전하는 일을 사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9,23)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 곳에 성당에 세워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미로써 모든 봉헌을 마치고 파견될 때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촉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 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복음 선포가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고 그것이 가장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독서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다시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제일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바쳐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지요. 계속해서 사도들의 발자취를 들려주고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동참하게 한 그 이유는 바로 복음 선포 사명의 중대함을 전해주고, 그 소명의 실천을 우리에게 강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일은 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막막하고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내어드리고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구로 내어놓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인식시키고 파견을 하는데 과연 신자들은 그 사명을 깨닫고 자신을 도구로 내어놓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실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신자로서의 사명은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나가면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하고는 나가자마자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직무유기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들, 그리고 하느님의 부활의 체험을 더 깊이 성장시키는 방법은 복음 선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공동체가 복음적인 공동체로 거듭 성장하려면 복음 선포의 사도로서 내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여 놓아야 합니다. 그 때 개인의 부활 체험은 더욱 깊어져 성화되고 공동체는 복음적인 공동체로 한 걸음 더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9,15) 오늘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9,1-20 요한 6,52-59 우리가 식인종이란 말인가? 사실상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예수님의 폭탄선언이 있었다. 그 구절을 한번 더 읽어보자.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생명의 빵이 곧 사람이신 예수님의 자기 살이라는 엽기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 또한 만만치 않다.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유다인들의 반응과 예수께 대한 호칭을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호칭을 보자.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를 만난 군중은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선생님은 무슨 일(기적)을 하시겠습니까?"(30절)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운운하셨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하고 청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다"는 말씀에 못마땅해하며 웅성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유다인들의 불만은 '생명의 빵'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42절) 하며 돌연 예수께 대한 호칭을 바꿨다. 선생님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직접적인 호칭은 아니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며 하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이 반응으로 유다인들은 예수로부터 거의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데도 이유가 있지만, 이젠 생명의 빵이 자기 살이라는 말에 유다인들은 거의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고 노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는 없지만 이 구절 다음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란 말인가?"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우리들 사고의 지평을 넓혀보자. 식인종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미개인종을 일컫는 말로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뜻한다. 우리는 통상 인육을 음식으로 먹는 개화가 덜된 인종들을 식인종이라고 알고 있다. 왜 식인종들은 인육을 음식으로 먹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적대자나 원수를 잡아죽인 다음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했던 것일까?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인류문화사 계통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이런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미개한 인종들 사이에서 굶주림이나 복수, 종교의례나 효행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하나,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종족에서도 가끔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흔적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대략 뉴기니 내륙지방,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수마트라의 바타쿠족,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 북 극지방의 에스키모 등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지역에 따라서 인육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음식이 되기도 하였고(북극지방 에스키모), 식품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바타쿠족), 멜라네시아에서는 동물의 고기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의례적 살인과 식인은 종종 사술(邪術)이나 요술의 관행과 결부되었고, 병자가 그의 친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에는 승자가 싸움에서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승리의 축하잔치에 썼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일부에서는 영혼을 배당 받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고, 그 뼈를 보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종교· 의례적인 의미에서 사자의 특정 부분 또는 내장 부분을 먹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은 사람은 사자의 영혼과 힘을 얻는다는 생각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결국 카니발리즘은 사자의 영혼(정신)과 힘을 이어받고자 자민(子民) 보호적 차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관행이라는 말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한 가운데서 맹수나 적대자로부터 부족을 지키던 한 용사가 목숨을 바쳐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은 매우 있을법한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다음 용사가 죽은 용사의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의 부족을 위한 정신과 힘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 육신을 위한 양식이 되든,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되든 간에 예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행위는 카니발리즘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행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하게 당신 몸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실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는 살뿐 아니라 음료로 자신의 피까지도 내어 주신다.(55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를(나를) 먹는 사람도 예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사가가 제시하는 성체성사의 설정이다. 공관복음이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마태 26,26-30; 마르 14,22-25; 루카 22,15-20; 1코린 11,23-26),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활 한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육체를 위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원의 양식으로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더라도 육의 식인종이 아니라 사랑의 식인종일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