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속도 모르는 왕빈대 / 최종호
벌써 10여년 가까이 지난 얘기다. 그 당시 큰아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집 공고가 나자 완도, 여수, 보성 등 여러 지역을 놓고 고민했으나 상대적으로 모집 인원이 많고 차후 승진에서도 유리한 도청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합격하더라도 집안 형편상 방을 얻어 주는 것은 머리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보성군으로 지원하기를 바랐다.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도 쉽고 업무도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결국 내 생각대로 되었다.
첫 근무지는 공교롭게도 내가 근무하는 인접 면사무소. 집에서 출퇴근하는 데 한 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나랑 관사에서 같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챙겨 주는 일은 큰 숙제였다. 혼자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녀석이 빌붙어 있으니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부랴부랴 된장국, 미역국 끊이는 방법과 계란 요리를 배웠다. 그 중 가장 만만한 요리는 ‘토마토 계란 스크램블’이다.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김치와도 잘 어울린다. 다른 반찬이 별로 필요 없다. 재미도 있고 어렵지 않은 데다 재료도 토마토, 양파, 계란 등 몇 가지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그곳에서 가장 즐겨 만들던 음식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녀석이 주중 내내 관사를 벗어나지 않는 데 있었다. 한 번쯤 집에 갔다 오면 좋으련만 그러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다.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나니까. 가끔 아내에게 “짜식이 내 속도 모르는 왕빈데야.”라고 볼멘소리를 하면 “직접 전하지, 왜 말 못해?”라고 하면서 웃는다. 그렇게 2년 남짓 지내다 내가 먼저 근무지를 뜨고 나서야 머리 무거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난 요리는 젬병이다. 그런데도 40대에 용감하게 섬 생활을 하겠다고 나선 때가 있었다. 승진하려면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아내는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자취 생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하의도까지 따라왔다가 나만 남겨두고 떠났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가르쳐 준 대로 국을 끓였는데 미역이 냄비 뚜껑을 밀어 내고 있었다. 살펴보니 냄비 가득 미역만 들어있다. 물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만 넣으라고 가르쳐 주었을 것인데 생각나지 않았다. 한 봉지를 다 넣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짭조름한 미역을 우적우적 다 씹어 먹어야만 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사내 녀석이 정지(부엌 사투리) 근처에 오면 수염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되도록 부엌에 못 오게 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자취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내가 큰녀석과 단둘이 생활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퇴직하고 생활 요리를 배워 간간하게라도 가끔 가족 파티를 하겠다고 원대한 목표를 세웠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1주일에 한 번이라도 아내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만한 실력이 없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정성을 다해 라면을 끓였지만 너무 신중했던지 면발이 퉁퉁 불어 눈치를 보면서 먹었다. 그 이후에는 라면 먹고 싶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있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조금 오래된 일이지만 아내 생일날 미역국을 대접했다. 다른 사람이 끓여 준 것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기에 그리한 것이다. 또, 많이 아팠을 때는 선물 받은 낙지로 죽을 만들었더니 고마워했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겠는가? 인터넷에 나온 레시피를 따라 한 것이다.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러지 학원이라도 다니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란 듯이 요리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