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과 마찬가지로 콜리지의 영향은 그의 특수한 종교적 믿음이나 철학적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그는 영국 사회에 깔려 있는 전통적 견해의 한계 내에서 철학의 정신을 위대하게 각성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벤담과 거의 마찬가지로 세상의 기존 질서에 대한 위대한 질문자였는데, 그 이유는 질문자가 반드시 적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벤담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견해 혹은 전통적인 견해에 관해 그것이 참인지 질문하도록 이끌었고, 콜리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도록 이끌었다.
벤담은 전통적인 견해의 외부에 서서, 그리고 그런 견해에 대한 전적인 이방인으로서 그것을 검토했다. 콜리지는 그런 견해를 내부로부터 보았으며 그것에 대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았다. 즉 그는 그런 전통적인 견해가 어떤 명백한 사실에 의해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고, 그것이 어떤 외관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되어왔는지를, 그것이 세대를 이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에 대한 충실한 해석으로 보여왔는지를 발견하고자 했다.
벤담은 어떤 명제를 그것이 그 자신의 탐구의 결과와 맞는지 안 맞는지에 따라 참인지 거짓인지로 판단하고, 그 명제가 그가 생각하는 참된 것을 의미하지 않을 때에는 그 명제가 의미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콜리지는 어떤 종교적 철학적 혹은 다른 종류의 교설을 사려 깊은 사람들이 믿어왔고, 그것을 어떤 세대의 국민들이나 사람들이 수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이해해야 할 문제의 일부이고 설명해야 할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벤담은 모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은 귀족들, 성직자들, 법률가들 혹은 다른 종류의 사기꾼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벤담의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인간 지성과 감정의 복잡함에 대해 훨씬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콜리지는 어떤 교설이 오랜 동안 혹은 광범위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그 교설 자체가 전적으로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비록 후대에 그런 교설을 단지 전통적이란 이유로 받아들인 사람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처음에 그런 교설을 제시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에게는 실재(reality)였던 어떤 것을 언어로 표현한 노력의 결과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교설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 교설 안의 어떤 것이 인간 정신의 어떤 부분에 적응했다는 증거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뿌리까지 파 내려가서 어떤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교설이 만족시킬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어떤 자연적 필요나 요구를 찾게 될 것인데, 이런 필요 중에는 벤담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기심이나 쉽게 믿는 성향(credulity)도 자리를 잡고 있겠지만 그런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철학자의 이런 관점 차이로부터,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관점을 아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에, 벤담은 전통적 의견 안에 있는 진리를 놓치고, 콜리지는 전통 밖에 있거나 전통들과 다른 진리를 놓칠 것으로 예상되겠지만, 오히려 각자는 다른 사람이 놓친 많은 것들을 찾거나 찾는 길을 보여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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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실 위에 든 두 가지 예 중 어느 쪽보 다 더 큰 실수이다.
왜냐하면 영국 사람 중에는 아직 거의 인정 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대륙의 철학자들이 오래전부
터 인정해 온 진리 가운데 하나는 현재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정신과학과사회과학에서 대립적인 사고방식(antagonist modes of thought) 혹은 변증법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이다.
정치 체제에서 서로 견제하는 권력들이 필요한 것처럼, 사고에서도 이런 대립적인 사고방식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이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관대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기초이며,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한 관대함을 서로의 의견에 대한 무관심보다 낫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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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어려운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를 위한 첫 번째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 즉 그것의 어려움에 대해 적절 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연구를 할 때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위험이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일부를 진리의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사회철학에서 과거와 현재의 거의 모든 주된 논쟁에서 양측은 그들이 부정하는 것에서는 틀렸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서는 맞았고,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에 더해 상대방의 견해를 받아들였다면 그들 자신의 견해를 옳게 만들기 위해 그 이상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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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 본 두 사람, 문명과 현대를 숭배하는 사람과 독립성과 과거를 숭배하는 사람보다 더 차이가 나는 두 명의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 한쪽의 의견에서 긍정적인 모든 것은 참이다.
그리고 만일 진리의 한쪽 반이 진리의 모든 것이라면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가 무척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할 필요가 있는데, 두 가지를 결합하는 실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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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모든 중요한 부분적 진리에 관해 언제나 두 가지 대립하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한 사고방식은 그 진리에 너무 많은 자리를, 다른 사고방식은 그것에 너무 적은 자리를 내준다.
사실 여러 견해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이 두 극단 사이의 왕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정신 능력의 불완전함 때문에 저명 한 사상가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주제의 각자의 부분적 견해가 그 정확한 가치로 평가되고 그 이상으로 평가되지 않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리고 비록 이런 정확한 균형이 스승의 보다 현명한 정신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일반 대중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스승은 자신의 이론에서 새로운 것을,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강하게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새로운 것에 대해 불균형한 인상을 주는 것을 막지 못한다.
새로움을 저항하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추동력이 대중의 마음을 거의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데에 거의 언제나 성공한다.
따라서 한 방향으로의 쏠림은 상응하는 반작용을 결정한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추가 한 번 왕복 운동할 때마다 중심으로부터 덜벗어나게 하고, 이런 경향을 지속하게 하면서 마침내 중심에 멈추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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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견해로는 독일철학-콜리지(Germano-Coleridge)의 이론은 이런 반작용의 결과이다.
그것은 18세기 철학에 대한 인간 정신의 반항을 표현한다.
18세기 철학이 경험적이었기 때문에 이 철학은 존재론적이고, 그 철학이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이 철학은 보수적이며, 그 철학의 많은 부분이 무신론적이었기 때문에 이 철학은 종교적이고, 그 철학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에 이 철학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그 철학이 너무 사실적이고 산문적이었기 때문에 이 철학은 시적이다.
모든 국면에서 그것은 18세기 철학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
그렇지만 이전에 주의를 환기한 것처럼 개선의 일반적 법칙에 충실해서 그것은 선행하는 철학적 반작용이 그랬던 것에 비해, 특히 18세기 철학이 그것에 선행하는 철학에 대해 승리했을 때 그 이전의 철학을 그토록 심하게 부정한 데 비해, 그 반대되는 철학을 덜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그것이 반대하는 교설에서 진리인 것에 관해 덜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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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관적인 철학의 틀은 그 출발점으로 인간 지식의 원천과 인간의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에 관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가장 포괄적인 이 질문에 대해 18세기의 가장 주된 이론은 로크에 의해서 주장되고, 통상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의 일반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연에 관해 혹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관해서든 우리는 우리의 감각들에 제시되는 사실들과, 유비적으로 그것들로부터 추론되는 다른 사실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경험에 선행하는 지식은 없다.
즉 정신의 내적인 빛에 의해 인식될 수 있고 직관적 증거에 근거한 지식은 없다.
감각과 정신 자체의 행위에 의한 의식이 우리의 지식의 배타적인 근원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재료이다.
이 이론에 대해 콜리지는 칸트 이후의 독일 철학자들과 리드(Thomas Reid) 이후의 영국 철학자들 대부분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는 인간 정신 안에 비록 일정한 한계 내에서이 기는 하지만 물자체의 본성과 속성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지성에서 그와 독일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기술적인 용어로 그가 오성(understanding)과 이성(reason)이라 부르는 두 가지 능력을 구별한다.
오성의 능력은 현상 혹은 사물의 외관을 판단하고 이로부터 일반화를 하고, 이성은 직접적인 직관에 의해 우리가 감관을 통해 알 수 없는 사물들을 지각하고 진리를 인식한다.
이런 지각은 생래적인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경험 없이는 일깨워지지 않지만 그것들은 경험의 복사본이 아니다.
경험은 그것들의 원형이 아니고 그것들이 나타나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자연의 외관들은 우리 안에서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가시적인 외관의 원인이 되고 그것들의 법칙 속에서 그런 외관들이 의존하는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이념을 일깨우는데, 그때 콜리지가 자주 드는 예에 따라 마치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사물들을 보지만,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보기 전에 눈이 미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런
것들이 외관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지각한다.
(주 : 이런 논변이 바로 칸트의 선험적 논변이다)
그래서 콜리지에 의하면 경험적 진리와 구별되는 선험적 진리가 있는데, 이런 선험적 진리는 경험의 기회를 통해 시작되지만, 그 자체들은 경험의 주제가 아니고 선험적으로 알려지는 진리이다. 이런 선험적인 진리들의 목록에 콜리지는 종교와 도덕의 근본적인 이론들, 수학의 법칙들, 물리적 자연의 궁극적인 법칙들을 포함시킨다.
그는 이런 것들은 비록 경험과 필연적으로 일관되어야 하지만 경험에 의해 증명될 수는 없으며, 만일 그것들을 완전하게 안다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관찰된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고 아직 관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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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사람에게 이들 두 대립되는 이론의 당파적 지지자들 사이에 치명적이고 상호 파괴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쪽도 그 반대쪽을 왜곡하고 폄하하기 위한 지적인 비판과 도덕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감각주의'가 경험주의 철학에 대한 흔한 욕이고, '신비주의'가 선험주의 철학에 대한 흔한 욕이다. 경험주의 이론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이론이라고 비난받고, 선험주의 이론은 인간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이론이라고 비난받는다.
이 논쟁의 많은 선험주의자들은 그들의 적들이 도덕적 의무와 종교적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망에 의해 경험주의 이론을 지지한다고 강하게 믿으며, 많은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주의자들이 정신병원에 수용해야 적합할 사람들이거나 과거의 편견을 위한 아주 세련된 새 논증을 만듦으로써 간교하게 신분제 질서와 귀족의 이익에 아첨하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이런 비판들을 가장 자유롭게 하는 사람들이, 이 질문의 복잡함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거나 상대방의 논변이나 자기 자신의 논변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인 데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양쪽의 건전한 사람들조차 서로의 의견의 경향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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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주의자들에 의하면, 모든 지식이 경험의 일반화라는 로크와 그의 추종자들의 이론은 엄격한 논리적 결과에 의해 무신론에 이르게 되며, 흄과 다른 회의자주의자들이 경험의 근거 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주장이 옳다.
칸트와 같이 콜리지도 통상적인 신의 존재 증명, 우주에 있는 디자인의 표지 혹은 다른 말로 자연 의 질서가 인간의 기술과 디자인의 효과와 유사하다는 것으로 부터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논변이 유지될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더 나아가 경험주의는 도덕을 동물적 감수성의 맹목적 충동이나 타산적 결과에 대한 계산으로 전락 시키는데, 이는 도덕의 본질에는 치명적인 것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파괴시킨다.
그리고 이런 경험주의 이론에서는 과학조차 과학의 특징을 잃어버리고, 사실을 설명하지 않고 사실들을 열거하고 배열만 하는 경험론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가 그 사실 안에서 법칙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설명되는데, 그런 법칙들이 나타나자마자 우리는 그런 법칙들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험주의 철학자들이 로크, 하틀리, 벤담의 철학에 제기하는 비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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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경험주의자들이 선험주의자들에게 제기하는 비판을 살펴보자.
선험주의자들은 관찰이 아니라 상상력을 진리의 기준으로 만들고, 인간의 가장 황당한 꿈을 철학의 왕좌에 앉히는 것과 다름없는 원칙들을 주장하고, 그런 원칙을 순수이성의 직관으로서 인류에게 강요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적 열광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져 온 것이다.
그리고 비록 야콥 뵈메(Jakob Böhme)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개인적 계시가 그 심각한 비일관성 때문에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선험주의자들의 주장은 개인의 꿈을 다수의 꿈으로 대체하는데 불과하다.
충분히 강한 파당을 형성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이든 그들 이성의 직관들이,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편견들이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진리라고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진리는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더러 이성이 아니라 단지 오성에 의해 반대증명들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증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증명에 반대해서 그런 진리를 믿어야 한다고, 더 나아가 이런 진리를 더 강하게 믿어야 하는데, 이런 진리는 언어나 명제의 논리적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선험주의자들이 선험적 진리를 위해 이런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가장 강한 쪽에 있는 사람은 누구이든 그의 명제를 증명 하는 대신에 그것을 가지고 그의 편의에 따라 독단을 펼칠 수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전과 신적인 능력'이 없는 것으로 혹은 타락한 마음 때문에 가장 쉬운 계시들조차 볼 수 없는 사람들로 비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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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도 자신의 「명상에 대한 도움(Aids to Reflection)」의 25번째 경구에서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 그 자신의 종파나 교회를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모든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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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끝이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논의된 질문에 대해 우리가 지지하는 견해는 로크와 벤담의 학파인 경험주의이다. 우리가 보기에 물자체의 본성과 법칙, 혹은 경험의 대상이 되는 현상의 원인인 물자체의 본성과 법칙은 인간의 정신 능력에는 근원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경험 자체와의 유비에 의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느 것도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그리고 인간 정신에 어떤 관
념, 감정 혹은 힘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의 근원이 어떤 다른 근원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철학 의 중심적인 개념에 대해 콜리지와 의견을 달리한다.
우리는 그와 그의 독일 철학자들이 철학에 도입한 특이한 기술적 용어들이 필요하거나 유용하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들이 이런 용어 들을 도입한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교설들에 논리적 정확성을 주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인 교설들과 많은 구체적인 실험적 진리들의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이런 용어들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들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콜리지와 독일 철학자들에게 어떻게 일상적인 용법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 신비주의라는 비판이 가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상식주의 철학자인 리드와 듀갈드 스튜어트의 이론은 제대로 이해된다면 독일 철학자들의 이론과 실체적으로 동일한데, 독일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의 섬세함에 반대해 성공적으로 주장되는 "상식”의 명령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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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들의 잘못은 오히려 그들이 도덕 감정을 부정하는 데 있었다기보다, 그들이 그런 감정들을 너무 많이 신뢰하고 그것들이 인간 본성에 사실보다 더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인간 본성 외의 것에 덜 의존한다고 믿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도덕 감정이 인간 마음에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들이 인간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그런 도덕 감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준수에 관한 모든 체계가 급격히 파괴된다 해도 문제없이 유지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 철학자가 목표로 한 것은 그런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천년왕국에서 미신, 종교적 미신, 모든 종류의 실수와 편견은 파괴되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점차적으로 독재와 세습적 특권도 같은 운명을 맞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것이 성취된다면, 그들은 잠시도 인간성의 모든 덕과 우아함이 번성하는 데 실패하리라거나, 유독한 잡초가 한 차례 제거된 후에 다시 토양을 갈아줄 필요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면에서 그들은 사람들이 범하는 매우 흔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 실수란 자신들이 언제나 익숙했던 질서를 인간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들이 큰 국가에 모여 사는 것을, 그리고 여기저기 있는 미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들 중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제정되는 법률에, 그리고 서로의 의견에 의해서 제정되는 도덕 법칙들에 엄격하게 복종하는 것을 보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상의 사태가 이렇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사태를 이렇게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태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지와 욕망을 규제하기 위한 많은 문화적이고 규제적인 영향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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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랑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달리, 사회적 통일 (social union)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요소인 정부에 대한 복종은 수립하기 어렵다.
적도에 있는 나라들의 넓은 평원에 사는 주민들처럼, 약하고 기력 없는 종족 중에는 수동적인 복종이 아마도 자연적인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곳에서도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신의 명령이라는 숙명주의가 종교적 교리로서 유행하지 않는 어떤 종족이 있을지 의심한다.
그러나 용감하고 호전적인 종족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된 심판이라 할 수 있는 국가와 사회적 도덕에 복종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힘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회는 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로마제국 멸망 후에 근대 유럽에서 봉건적 무정부 상태를 극복하고 한 나라의 사람들을 정부에 복종시키는 데에 기독교가 큰 영향력을 끼치며 협력을 했는데, 로마의 멸망 이후 경과된 세 배 의 시간이 걸렸다.
만일 이들 철학자가 자신의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인간 본성을,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특정한 계급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법과 정부에 대해, 저항하는 성격의 힘과 남성다운 성격이 여전히 어느 정도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복종이 강하고 지속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어떤 전제 조건들이 있고 이런 전제 조건들이 충족되어 있다는 것을, 그런 조건들 중에 중요한 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첫째, 야만적인 힘에 의해 복속된 노예들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 체계가 존재해 왔고, 이런 체계는 아동기로부터 시작해 평생 지속되는데, 이 체계에 불가결한 중요한 요소는 시민들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규제하게 하는 훈련이다.
즉 시민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개인적 충동과 목표를 사회의 목적들에 복종시키고, 그리고 모든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회적 목적이 지시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며, 그런 사회적 목적에 반항하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규제하며, 그런 것들에 동의하는 감정을 북돋는 습관과 힘을 훈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나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 공화 국들의 전체 시민 정책과 군사 정책은 그런 훈련의 체계였다.
근대 국가들에서 이런 훈련의 체계는 주로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이런 규제하는 훈련의 엄격함이 이완될 때마다,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 무정부를 향한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 머리를 다시 쳐들고 국가는 내부로부터 해체되며, 국가는 빠르거나 느리게 쇠퇴한 후에 독재의 노예가 되거나 외부 침략자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영구적인 정치적 사회의 두 번째 조건은 어떤 형태의 충성심의 존재에 있다.
이 감정은 그 대상에서 다를 수 있고 특정한 형태의 정부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이 민주주의이건 군주제이건 그 본질은 언제나 같다.
그것은 국가에는 어떤 확정된 것, 영원한 어떤 것,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일반적 동의에 의해 그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는 것, 다른 무엇이 변하건 지켜질 권리가 있는 것이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사실 고대의 거의 모든 국 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의 경우에서처럼 국가의 수호자로서 공통된 신에게 연결될 수 있는, 혹은 그것은 자신이 아 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지도자이며 보호자로서 평가되 는 사람들에게 연결될 수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신의 지명에
의해서, 혹은 오래 지속된 왕계 등에 의해서, 혹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가치에 대한 일반적 인
정에 의해서 그런 사람들로 인정된다.
혹은 그것은 법률이나 고대의 자유 혹은 법령(ordinances)에 연결될 수도 있다.
혹은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현대에 그 감정이 존재하게 될 것 같은 유일한 방식인데, 그 감정은 아직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오직 초보적인 상태에 있는 제도들에 의해 실현되는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사회적 평등의 원칙에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내구적으로 존재해 온 모든 정치적 사회에서는 어떤 확정된 점, 사람들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떤 것, 비록 그것에 대한 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누구도 그것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흔들릴까 두려워 하는 것, 간략히 말해 아마도 일시적인 위기 동안을 예외로 한다면 사람들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충성심의 필요성은 쉽게 알 수 있다.
국가는 결코 긴 시간 동안 내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인류가 아주 많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희망할 수 없다.
한 국가 내의 강한 파당들 사이에 즉각적인 이해와 정열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지금까 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회로 하여금 평화로운 존속을 위한 안전을 영구히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이런 폭풍을 견디고 격동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하건, 그들의 갈등이 현존하는 사회적 통합 체계의 근본적인 원칙에 영향을 미치지 않 고,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합리적 행동의 기초로 삼고, 자신들의 희망과 목표와 동일시하는 것을 전복시키겠다고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일시적 질병이나 건강에 좋은 예방 약이 아니라 한 국가의 일반적인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모든 폭력적인 적의가 표출될 때, 국가는 거의 내전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정치 사회에서 안정성의 세 번째 본질적인 조건은 같은 공동체나 국가의 성원들 사이에 강하고 능동적인 통합(cohesion)의 원칙인, 국민감정(nationality)이다.
여기서 우리가 국민감정을 그 용어의 속된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은 거의 말할 필요 가 없을 것이다.
이런 속된 의미가 포함하는 것은 외국인에 대 한 합당하지 않은 반감, 인류의 일반적 복지에 대한 무관심, 혹은 우리 자신의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선호, 우리 민족의 나쁜 특이성을 그것들이 민족적이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다른 나라가 좋은 것이라고 발견한 것을 채택하기를 거부하는 것 등이다.
우리는 적대가 아니라 공감의 원칙을, 분리가 아니라 통합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정부 아래 사는, 그리고 동일한 자연적 혹은 역사적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이해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 자 신들을 이방인으로서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서로 연관되 어 있다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자신들을 하나의 국민이라고 느끼며, 운명을 함께하고 있고, 동포 어느 사람에게 행해 진 악은 자신에 대해 행해진 악이며, 그런 동포들이 모두 지는 공통된 부담 중에서 자신의 몫을 지려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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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들의 실 수는 그들이 공격한 많은 잘못들 안에 타락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썩어 빠진 많은 제도들 안에 비록 그 시대에 더 이상 맞지 않는 형식과 외관을 하고 있지만 문명 사회의 필요 요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이런 진리를 그것을 둘러싸고 자란 잘못들과 마찬가지로 불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개껍데기를 버리면서 그 안에 있는 조갯살마저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를 통합시킬 결속력 없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 했는데, 그런 경우에 예견될 수 있었던 참담한 실패를 거뒀다.
이제 우리는 18세기 철학자들이 하지 않았기에 비난한 것을 콜리지가 속한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해냈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상에 있어서 모든 반작용은 물론 이전에 간과되었던 진리의 부분을 보게 한다.
유럽에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루터까지 혹은 볼테르까지 진행되어 온, 모든 것을 비판하는 철학이 다른 철학, 동시에 사회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심한 비판자이고 과거에 있어서 좋은 것을 정열적으로 옹호하는 철학에 의해 계승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이 모든 토리(영국의 보수파 정당)와 왕당파 저술가들의 쉬운 장점이다.
그러나 독일 철학 - 콜리지학파의 특이성은 그들이 즉각적인 논쟁을 넘어서 모든 그런 논쟁에 관련된 근본적인 원리들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여기저기 존재하는 서로 떨어져 있는 사상가를 예외로 한다면 인간 사회의 존재와 성장의 귀납적인 법칙에 대해 포괄성이나 깊이를 가지고 탐구한 첫 번째 학파이다.
그들은 우리가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을 사회적 존재의 항구적 형태의 본질적 원칙들로서, 즉 어떤 저술가가 우연히 지지하는 특정한 정체나 종교에 내재하는 단지 우연한 장점으로서가 아니라, 원칙으로서 부각시킨 첫 번째 학파였다.
그들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베이컨적인 탐구 정신 속에서 이 탐구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거나 그것과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 연구한 첫 번째 학파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속한 파당의 옹호론이 아니라 사회철학을 생산했는데, 그 당시에 가능했던 유일한 형태의 사회철학인 역사철학을 통해 산출했다.
이런 역사철학은 특정한 윤리적 혹은 종교적인 교설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인간 문화의 철학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종류의 철학자들이 기여한 것들보다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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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서의 각각의 특정 음절이 지시하는 것이 없을까 우려해서, 성서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했고, 성서의 정신과 일반적 목적들에 대해 가장 굴종적인 관념들을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은 어떤 성실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두 종류의 사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는데, 한 종류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도들과 신조들의 폐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새로운 이론을 그 최후의 결과까지 밀고 나가고 후자는 옛것들의 최선의 의미와 목적들을 다시 주장한다.
앞의 종류의 최고봉이 벤담이고, 후자의 종류의 최고봉이 콜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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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통상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종종 완벽하게 의식하면서 , 그리고 그들의 후손의 이익을 위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더 자주 느끼면서도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그들을 위해 항구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그들이 믿을 때에는, 거의 언제나 그 가치를 과대 평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목적인 일반적 이익과 가장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고려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항구적인 이익이 그런 일반적 이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직접적인 이익과 습관적 감정이 일반적 이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많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매우 복잡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 요소들은 동일한 성질이 아니고, 동일한 방법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 것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정치철학은 이것들 중에 어떤 구성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같이 충족되는지, 즉 하나의 구성 요소를 제공하면 다른 구성 요소들도 제공될 수 있는지, 이들 구성 요소가 적대 관계에 있거나 적어도 분리 관계에 있어서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따로 제공되어야 하는 것들을 구분하기 위해, 이런 요소들을 분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구성 요소들에 대한 예비적 분류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할 때, 완전한 정부에서는 이런 사회의 큰 이익들에 상응하는 정부의 부서가 있을 것이고, 이 부서는 그 부서가 산출할 책임이 있는 목적을 실제로, 그리고 항상적으로 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정치적 헌법이 목표로 하는 완전함의 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에 대한 제한된 접근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 가능성은 없다.
정부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로부터 구성되어야 하고, 정체에서 권력의 배분은 사회에 실제 존재하는 권력의 배분과 많이 다르거나 오랜 동안 다를 수는 없다.
우리는 이것이 따라야 할 원리이며, 어느 곳에 존재하는 정부이건 이 타입으로부터 후퇴하는 만큼 불완전하고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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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콜리지를 변호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는 철학을 통해 신학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 중 많은 부분이 적어도 우리에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콜리지의 시도가 성공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도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여부이다.
어떤 종교적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건 철학은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할 것이고 그런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부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만일 철학이 기독교와 양립 가능하지 않다거나 철학이 기독교를 측면에서 지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지금 영국에서 철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어떤 철학이든 수용될 전망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종교적 철학이라는 관념을 경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종교적 철학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 중 하나라고 한다면, 우리의 바람은 종교적 철학이 철학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의 무제한적인 자유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보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한 곳에서는 철학이 불가능하다.
첫 번째로, 철학적 탐구를 통해 정직하게 도달된 결론들에 대해 정의롭고 선한 신이 영원한 벌로
처벌한다는 믿음(belief)이나, 두 번째로 성경의 모든 구절에 관해 이미 정해진 결론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구절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결과는 궤변과 자기기만을 통해 그런 결론에 맞추어져야하는 곳에서는, 철학적 사고가 마비된다.
철학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이런 두 가지 문제들로 인해, 가장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조차, 신학적 사색을 할 때에는 왜곡되고 우둔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어서 후세의 동정심을 유발했다.
그러나 콜리지의 정신은 이 두 가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콜리지에 의하면 종교적 의무 중 하나인 신앙은 오성(understanding)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와 감정의 상태이다.
그에 따르면 이단(heresy)은 그 문자적 의미와 종교적인 함축에 있어서 의지에 따른 실수(wilful error) 혹은 의지의 도착(perversion)에 유래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따라서 정통적인 이단도 있을 수 있는데, 진리에 대한 무관심은 그 질문이 잘못된 편에서 만큼이나 올바른 편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콜리지는 자신의 의견에 반해 믿음에 의한 가톨릭 신앙을 오성의 행위로 해석하는 위 아타나시우스(pseudo Athanasius)의 반대되는 독트린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루터의 교리는 진리가 단지 오성의 확신이라면, 진리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실수도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 못한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진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실수가 개인적인 실수가 되는 것은, 그 실수가 논리와 역사로부터 벗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실수의 원인이 그 사람의 마음에 있거나, 그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는 비기독교적인 소망이나 습관으로부터 유래할 때이다.
그래서 이단적 교설들은 파당적이고 분열적이며 과시적이며, 야심차고 부정직한 정열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점과 관련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 콜리지가 가지는 견해는 방부제(preservative) 역할을 했다.
그는 하느님이 성경을 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맞지만, 이런 성경의 기자들이 쓰는 모든 단어가 하느님이 불러주신 것을 받아 쓴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과 신약성서의 모든 책의 텍스트의 모든 음절이 절대적 진리와 신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성경 자체에 의해서 지지되지 않으며, 신앙 없는 마음이 존재하는 미신 중 하나이며, 사실 성서 무오류설은 교황의 무오류설보다” 더 지나친 것으로 양쪽 모두를 위해 동일한 논변들이 제시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이 성경을 쓴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계시하고자 의도하는 진리를 알려주셨고, 그 나머지는 그들의 인간적인 능력에 맡기셨다.
콜리지는 성경에 대한 이런 비판의 자유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성경의 독특하고 초월적인 성격을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입장과, 그에 못지않게 기독교적 지혜의 순수한 정신에 반하는 주장, 즉 우리의 신앙은 이성과 반대되고, 신앙을 위해 이성을 희생해야 한다는 성서 무오류주의 입장 사이에 안전과 평화를 가능하게 해줄 유일한 중도라고 열렬히 주장했다.
성서 무오류주의는 마치 빛의 아버지인 신이 이성을 부여한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바보가 되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주장했다.
성서 무오류주의가 맞다면 신이 인간 지성에는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종교를 주고 인간으로 하
여금 그런 비이성적인 종교를 믿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는 신의 선하심에 반하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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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 긴 에세이를 마쳐야 하는데, 사실 이 논문은 그 자체는 길지만, 그 주제에 관련해서는 짧다고 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콜리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콜리지와 그가 속한 학파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를 바란다.
우리는 토리 철학자인 콜리지가 전적으로 토리주의자만이 아니고, 자주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좋은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증명했기를 바란다.
콜리지는 토리주의자들이 망각해 버리고, 현재의 자유주의자들이 몰랐던 명백한 진리들을 구해냈다.
비록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만일 보수주의 철학이 부조리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보수주의 철학은 그것보다 훨씬 나쁜 수많은 부조리를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것은, 비록 그 의견이 견지할 만큼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이유가 충분치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자신이 가진 근본적인 의견을 이성의 시험에 붙이는 사람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이성의 명령에 더욱 개방적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올빼미같이 빛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옛날의 비합리적인 편협한 사람들 같은 특징을 가졌을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토리주의의 좋은 면을 성찰하고, 공적인 선을 위한 엔진으로서 그런 토리주의의 역량을 통해 현존하는 체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 그 체제를 행정적으로 운영하게 된다면 그는 토리주의의 역량을 실현하는 데, 그리고 토리주의가 보다 실재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개혁가의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주여, 우리의 적을 계몽시켜 주소서. 그들의 위트를 날카롭게 하시고 그들의 지각에 날카로움을 주시고, 그들의 추론 능력에 일관성과 명료함을 주십시오.
우리는 그들의 지혜가 아니라 그들의 광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그들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우리를 걱정하게 하나이다.”
우리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의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영국과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큰 재산의 소유자들 대부분과 그런 큰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보수적이고 보수적일 것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맹목적이지 않다.
이런 강력한 세력이 영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개혁을 위한 영적이거나 현세적인 계획을 내놓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최고의 부조리이다.
그런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보아야 한다.
이들 재산가 계급이 자신들과 같은 개혁가들에 반해 단합하는 것에 만족하는가?
이 계급의 마음에서 개혁을 위한 준비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무슨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
혹은 어떤 방법에 의해서 그런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
만일 이들의 마음에서 개혁을 위한 준비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개종시키는 비현실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보수주의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 자유주의적인 의견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해야 하는가?
이런 마음의 준비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신조를 체계화하고 합리화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장 약한 시도조차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콜리지의 철학처럼 도덕적 선과 참된 통찰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은 훨씬 더 많은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