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성공하면 모두가 그 혜택을 본다
살아 보니 보고 듣고 배울 것이 더 많더라(3)나라가 가난하면 모두가 춥고 배고프다.
bestkorea(회원)
(English version is below)
-여름마다 물바다가 됐던 한강에서 기적이-
겨울마다 한강(漢江)이 꽁꽁 얼어붙었다. 마음 놓고 썰매도 타고 자전거도 타고 또 뛰어놀았다. 얼음 낚시꾼도 많았다. 얼음 구멍이 여기저기 너무 많아서 특히 밤에는 조심조심 다녔다. 지금은 사라진 밤섬(당시 약 60가구, 철거 후 철새도래지로 지정)에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 한 대에 둘이 타고 오가기도 했다. 지프차가 건널 정도로 두껍게 꽁꽁 얼었다. (바이칼호수가 결빙되면 그 위를 트럭이 오가는 모습을 볼 땐 한강이 생각난다). 50~60년대 중반까지 내내 그랬다. 강물이 하도 맑고 깨끗해서 여름이면 수영하다 물을 마셔도 아무 탈이 없었다. 기억으로는 이런 현상이 제2 한강교가 개통된 1965년부터 몇 년 더 계속된 것 같다. 겨울이면 얼음판이 되어주고, 여름이면 수영장이 되어준 한강은 정말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그러나 매년 반복되던 한강의 홍수(洪水)는 끔찍했다. 제방(堤防)이 없던 시절의 물난리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마치 하늘의 신(神)이 복수라도 하듯 흙탕물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노아(Noah)와 방주(方舟)가 절실했다. 초가집과 돼지 하물며 소도 떠내려왔다. 마포 전차 종점(終點)은 물론 신촌 굴다리(옛 강화버스 종접)까지 물이 찼다(그야말로 물바다다. 이와 같은 장면을 미얀마의 이라와디강과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 본 적 있다). 내가 일하던 공장 건물은 2층이었는데 아래층은 완전히 잠겼다. 물이 빠지고 복구하는데 보통 일주일 이상 걸렸다. 상습침수(常習侵水) 지역의 가옥(家屋) 피해 역시 막대(莫大)했다. 물 빠진 후 햇볕에 말리기 위해 집 앞에 내놓은 고만고만한 가구와 생활용품 등 진풍경(珍風景)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신(神)이 노여움을 푼 걸까. 어느 해 갑자기 매년 반복되던 끔찍한 대홍수는 멈췄다. 의인(義人) 노아가 나타나고 방주가 등장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 그리고 여의도의 방죽(윤중제)과 한강 양변(兩邊)의 긴 제방이었다. 진짜 한강의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참고: 오늘날 한강 양변의 제방에는 50여 개의 나들목(토끼굴)이 있다. 이곳에 나바론 요새를 방불케 하는 철제 육갑문들이 거의 완벽하게 설치돼 있다. 한강 물 범람 걱정 뚝).
바로 일 년 전(1966),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한강의 기적과 무관치 않다. 암튼,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김포공항에서 청와대로 가던 중 신촌 로터리에서 하차했다. 로터리를 반 바퀴 돌며 손을 들어 환영 인파에 답례(答禮)했다. 이때 나는 운 좋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5m)에서 특히 박정희 대통령을 눈여겨볼 수 있었다. 눈동자에 빛이 났다.
소수(小數) 부잣집을 제외한 가정집엔 수돗물이 없었다. 동네 가운데 파놓은 공동(共同)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려 마셨다. 500여 미터 거리에 설치해놓은 공동 수도가 있었지만, 이용자(利用者)는 거의 없었다. 유료(有料)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수도공사가 아직 안된 부잣집에 수돗물을 길어주고(양 어깨에 물통 짐) 돈을 받기도 했다. 그땐 흔한 풍경이었지만 나도 엄마와 함께, 다른 집처럼, 빨랫감을 모아 엄마는 이고 나는 둘러메고 한강에 가서(3km) 빨래해 왔다. 아직도 인도 파키스탄과 우간다 등 내가 다녀 본 많은 나라는 불결한 우물물을 마시고 있다.
당시 서울시 분뇨(糞尿) 처리장은 마포 신수동에 있었다(일명 똥통머리). 그 위치를 말하면 “설마”라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신촌 로터리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위치는 마포 서강의 와우산(臥牛山)에서 남산 쪽으로 보면 약 2km 앞 언덕 위에 현재의 광성중-고등학교가 보인다. 그 학교와 와우산 사이에 약 700m쯤에 완만한 구릉지가 있었다. 대부분 채소밭. 그 비스듬한 경사지에 약 50cm 깊이와 1m 넓이의 구덩이를 10m 간격을 두고 아래로 (계단식)으로 20여 개 파놓았다. 그곳에 분뇨차들이 와서 분뇨를 쏟아놓는다. 건조되면 인부들이 걷어낸 뒤 또 사용하는 순환식이었다. 악취는 당연했다. 4km 거리에 있던 당인리 발전소에서는 연일 회색 연기를 뿜어냈다. 어떤 날은 풍향(風向)에 따라, 온 동네가 코를 막았고 빨래를 걷어 들였다.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툭하면 불평하고 항의하고 고발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날 생각해보면 마치 먼 옛날의 농경시대 얘기 같다. 불과 50~60년 전의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러한 열악(劣惡)한 환경은 근대화의 진척(進陟)에 따라 빠른 속도로 개선되거나 사라졌다. 성공한 大韓民國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물 부족, 식량부족, 의약품 부족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大韓民國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아직 물(식량, 의약품)과 생필품(生必品)이 부족한 곳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특히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페루 등이 그랬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당시 이들에게 볼펜 한 자루는 아주 큰 선물이었다 (3다스를 가져간 적도 있음). 볼펜 한 자루에 행복해하는 아이들 모습은 내 어릴 때의 모습을 다시 보는 데자뷔 현상을 낳기도 했다.
당시에도 부흥주택(復興住宅)이라 하여 소수(小數)의 부자들이 사는 제대로 된 집들은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 시유지(市有地)에 무허가로 난립(亂立)한 판잣집, 양철집, 흙벽돌집,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집들이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123달러에 불과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울로 전국에서 구직자들이 모여들었다. 잠잘 곳이 태부족이었다. 오죽했으면 판잣집에 세 들어 살기도 어려웠을까. 급조(急造)된 이런 열악한 상태의 무허가 집들은 태풍이 왔다 하면 지붕과 벽이 뜯겨나가거나 통째 날아가기 일쑤였다. 겨울엔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언젠가, 조그만 무허가 배터리 제조 공장(가정집)에서 일할 때다. 나와 함께 실내에서 작업하던 친구가 갑자기 쓰러졌다. 나는 이 친구를 업고 1km 거리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원인은 연탄가스 중독. 문틈으로 가스가 스며든 것이다.
이처럼 여름마다 태풍 뒤엔 지붕이 날아가고 축대가 무너지고 흙벽돌집이 무너지는 사고들이 심심찮았다. 비 오면 천장(天障) 여기저기서 물이 줄줄 샜다. 양동이와 깡통은 필수품(必需品). 그래도 행복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하물며 오늘날에야!! 언제든 수도꼭지만 틀면 찬물 더운물이 쏟아지고, 냉장고에는 먹고 마실 것이 떨어질 날이 없다. 그것도 귀찮아 전화 한 통이면 총알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꿈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이 게 신기하고 고맙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신기한 건지 난 도통 모르겠다. 물론 풍요 속에 자란 세대는 그렇다 쳐도, 글쎄 보릿고개 세대는 다를 것 같은데, 정작 접해보면 그런 사람들이 드문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당시 서울 경기도는 물론 전국(全國)의 명소(名所) 중 명소라면 종로구 와룡동 소재(所在)의 창경원(昌慶苑)을 들 수 있다. 특히 봄과 소풍 철엔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유일(唯一)한 동물원(動物園)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마포에 살고 있었음에도 부모(父母)님과 함께 온 가족이 함께 와 본 적이 없다. 1984년, 창경원은 오늘날의 과천 서울 대공원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옛 창경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희귀(稀貴)종류의 동물들과 식물들 그리고 최첨단 과학의 놀이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완전 선진국형이다. 이 역시 내 어릴 땐 상상도 못 했던 꿈같은 세상이다.
이처럼 나라가 성공하면 모두가 그 혜택을 본다. 이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大韓民國이다. 세계가 증명한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약 140개국이 독립을 했다. 그중 유일하게 大韓民國만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나라가 됐다. 강냉이가루로 만든 노란 빵과 쌀뜨물 맛의 분유로 배를 채우며 일하면서 배운 세대(世代)가 있었고, 위대한 지도자(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대부분의 나라처럼 평생 죽도록 일하고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생(生)을 마감하는 공산국가(共產國家)가 됐을 것이다.
반대로 나라가 가난하면 모두가 춥고 배고프다. 초췌(憔悴)해진다. 비루(悲淚)를 삼키며 비루(鄙陋)한 삶을 살게 된다. 그 한(恨)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야 한다. 이런 나라들을 수없이 직접 가서 보고 확인했다. 이처럼 양극단(陽極端)의 두 시대를 다 살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루하루가 매일 새롭고 신기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 4부 계속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