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內證하신 法을 드러내시다.
대비되는 양 극단을 벗어난 (般若知慧인) 中에 의해서 법을 드러내시다.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心意識은 동의어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 용례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心과 意는 비슷하게 사용하는 용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識은 心意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심해탈이나 의해탈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識해탈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만
慧해탈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유명해서 많이들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야(慧)와 識은 이름은 다르지만 그 정체는 한 놈인 것 같습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 –
imesaṃ dhammānaṃ saṃsaṭṭhānaṃ no visaṃsaṭṭhānaṃ
paññā bhāvetabbā, viññāṇaṃ pariññeyyaṃ.
Idaṃ nesaṃ nānākaraṇa’’nti.
"도반이여,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통찰지는 닦아야 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북방에서 轉識得智라는 표현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알음알이(識/慧)를
경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알음알이에 의해서 네 가지 경우의 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1. 지혜가 전혀 발현되지 않고 알음알이만 작동하는 경우.
2. 지혜가 일부 발현되었지만 아직 알음알이가 많이 작동하는 경우.
3. 지혜가 많이 발현되어서 알음알이는 아주 일부 작동하는 경우.
4. 지혜가 전적으로 발현되어 알음알이라고 이름은 하지만 알음알이라고 하기에는 …
[purisassa ca viññāṇasotaṃ pajānāti,
ubhayato abbocchinnaṃ idha loke appatiṭṭhitañca paraloke appatiṭṭhitañca.] *아래 참고.
[na mano dhammānaṃ saṃyojanaṃ, na dhammā manassa saṃyojanaṃ.
Yañca tatth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chandarāgo, taṃ tattha saṃyojanaṃ. …
Saṃvijjati kho, āvuso, bhagavato mano. Vijānāti bhagavā manasā dhammaṃ.
Chandarāgo bhagavato natthi. Suvimuttacitto bhagavā.
세존께서도 정신이 있어서 그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하지만
그러나 세존께서는 욕망과 탐욕이 없으므로 세존의 마음은 잘 해탈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반야지혜(中)에 의해서 드러내신 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12연기(苦集)입니다.
즉 지혜(中)에서 드러내신 법이 緣起라는 성스러운 진리(諦)이지
緣起가 中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외에도 bhagavā自內證(asesamabhijānāti)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법을 드러내십니다.
sappaṭibhāgaṃ dhammaṃ deseti 對比(割當)되는 法을 自內證에 의해서 드러내시다.
“idhāhaṃ, bhante,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 dhammassavanāya.
tassa me, bhante, bhagavā dhammaṃ deseti uttaruttaraṃ paṇītapaṇītaṃ kaṇhasukkasappaṭibhāgaṃ.
세존이시여, 저는 전에 법문을 듣기 위해서 여기 세존께 왔었습니다.
그런 제게 세존께서는 점점 더 높고 점점 더 수승하게,170)
검고 흰 부분들을 잘 갖추어171)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170) 이제 아래 §§3~19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차례로 점점 더 높고 수승한 17가지 법들을 들면서 이를 통해 세존의 위대하심을 추론하고 있다.
171) 검고 흰 부분들을 잘 갖춘 것(kaṅhasukka-sappaṭibhāga)에서 검은 부분은 해로운 법[不善法]을, 흰 부분은 유익한 법[善法]을 말한다. 검고 흰 부분들을 잘 갖춘 것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자나와사바 경」 (D18) §25와 주해를 참조할 것.(cf. S.v.105)
sappaṭibhāga
kaṇha | sukka |
atthita | natthita |
sassata | uccheda |
sappaṭibhāga: sa-paṭibhāga 類似的,兩者兼具的,對照的.(<擔當하는>各各의 몫으로 割當됨.)
paṭibhāga : paṭi-bhāga 類似,相似,對比,對抗. equal, similar. likeness, resemblance.
bhajati : to divide, partake
yathā yathā me, bhante, bhagavā dhammaṃ desesi
uttaruttaraṃ paṇītapaṇītaṃ kaṇhasukkasappaṭibhāgaṃ,
tathā tathāhaṃ tasmiṃ dhamme abhiññā idhekaccaṃ dhammaṃ dhammesu niṭṭhamagamaṃ;
satthari pasīdiṃ —
‘sammāsambuddho bhagavā,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uppaṭipanno sāvakasaṅgho’ti.
세존께서 점점 더 높고 점점 더 수승한, 검고 흰 부분들을 잘 갖추어 법을 설해 주실 때마다
저는 그 법에 대해서 최상의 지혜로 안 뒤,
법들 가운데서 여기 어떤 법을 통해서 완성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 '세존께서는 정등각이시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는다.'라는 청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kusaladhammadesanā (DN 28) 유익한 법들에 대한 법문
145.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kusalesu dhammesu.
tatrime kusalā dhammā seyyath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 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idha, bhante,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3.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익한 법들이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입니다.172)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173)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뭅니다.
172) 이들은 37보리분법(菩提分法, bodhipakkhiya-dhamma)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깨달음의 편(bodhi-pakkha)에 있는 유익한 심리현상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중국에서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으로 옮겼는데 이 pakkha(分, 片)를 upakāra-bhāva(도와주는 상태)로 이해한 주석서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좋은 번역이다. 37보리분법에 대해서는『청정도론』XXII.33 이하와『아비담마 길라잡이』7장 §§24~33을 참조할 것.
173)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마할리 경」(D6) §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본서 제2권 「대인연경」(D15) §36 주해의 양면해탈도 참조할 것.
etadānuttariyaṃ, bhante, kusalesu dhammesu.
taṃ bhagavā asesamabhijānāti, taṃ bhagavato asesamabhijānato uttari abhiññeyyaṃ natthi,
yadabhijānaṃ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bhagavatā bhiyyobhiññataro assa,
yadidaṃ kusalesu dhammesu.
세존이시여, 유익한 법들에 대한 이것이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유익한 법들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초월해서 안다고 주장할 다른 [법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āyatanapaṇṇattidesanā (DN 28) 감각장소의 천명에 대한 법문
146.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āyatanapaṇṇattīsu.
chayimāni, bhante, ajjhattikabāhirāni āyatanāni.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eva saddā ca, ghānañceva gandhā ca, jivhā ceva rasā ca,
kāyo ceva phoṭṭhabbā ca, mano ceva dhammā ca.
4.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감각장소[處, 入]의
천명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와 법이라는
이들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入處]들이 있습니다.
etadānuttariyaṃ, bhante, āyatanapaṇṇattīsu.
taṃ bhagavā asesamabhijānāti, taṃ bhagavato asesamabhijānato uttari abhiññeyyaṃ natthi,
yadabhijānaṃ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bhagavatā bhiyyobhiññataro assa
yadidaṃ āyatanapaṇṇattīsu.
세존이시여, 감각장소의 천명에 대한 이것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감각장소의 천명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초월해서 안다고 주장할 다른 [법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gabbhāvakkantidesanā (DN 28) 입태에 대한 법문
147.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gabbhāvakkantīsu.
catasso imā, bhante, gabbhāvakkantiyo.
5.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입태(入胎)174)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들 네 가지 입태가 있습니다.
174) ‘입태(入胎)'는 gabbha-avakkanti의 역어인데 '태(gabbha)에 들어감(avakkanti)'으로 직역할 수 있다. 한편 본 문단의 '모태'는 mātu kucchi의 역어인데 '어머니의(matu) 뱃속(kucchi)'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idha, bhante, ekacco a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ati; asampajāno mātukucchismiṃ ṭhāti;
asampajāno mātukucchimhā nikkhamati.
ayaṃ paṭhamā gabbhāvakkan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175) 모태에 들어가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모태에 머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모태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입태입니다.
175) 본문에서 ‘알아차리면서'는 sampajāna의 역어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는 asampajāna의 역어이다. 삼빠자나(sampajāna)는 본서에서 '알아차림[正知]' 혹은 ‘분명히 알아차림(「대념처경」D22)으로 옮기고 있는 수행에 관계된 중요한 술어이다. 알아차림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대반열반경」 (D16) §6.7의 주해와「대념처경」(D22)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ati;
asampajāno mātukucchismiṃ ṭhāti; asampajāno mātukucchimhā nikkhamati.
ayaṃ dutiyā gabbhāvakkanti.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들어가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모태에 머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모태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입태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ati;
sampajāno mātukucchismiṃ ṭhāti; asampajāno mātukucchimhā nikkhamati.
ayaṃ tatiyā gabbhāvakkanti.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들어가고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머물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모태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입태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ati;
sampajāno mātukucchismiṃ ṭhāti; sampajāno mātukucchimhā nikkhamati.
ayaṃ catutthā gabbhāvakkanti.
etadānuttariyaṃ, bhante, gabbhāvakkantīsu.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들어가고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머물고
알아차리면서 모태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입태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입태입니다. 세존이시여, 입태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ādesanavidhādesanā (DN 28) 예언의 분류에 대한 법문
148.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ādesanavidhāsu.
catasso imā, bhante, ādesanavidhā.
6.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예언의 분류176)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예언의 분류가 있습니다.
176) 예언의 분류로 옮긴 원어는 ādesana-vidhā이다. 복주서에서는 “이것들을 통해서 남의 마음을 드러낸다(parassa cittaṃ ādisati etehi)고 해서 예언(ādesana)이라 한다.”(DAȚ.iii.84)고 정의하고 있다.
idha, bhante, ekacco nimittena ādisati —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ayaṃ paṭhamā ādesanavidhā.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표상을 통해서 예언을 합니다.
‘이런 것이 당신의 마음이오, 당신의 마음은 이러하오. 당신의 마음은 이와 같소'라고,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예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 같고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언의 분류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na heva kho nimittena ādisati.
api ca kho manussānaṃ vā amanussānaṃ vā devatānaṃ vā saddaṃ sutvā ādisati —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ayaṃ dutiyā ādesanavidhā.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표상을 통해서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예언을 합니다.
'이런 것이 당신의 마음이오, 당신의 마음은 이러하오. 당신의 마음은 이와 같소'라고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예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 같고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예언의 분류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na heva kho nimittena ādisati,
nāpi manussānaṃ vā amanussānaṃ vā devatānaṃ vā saddaṃ sutvā ādisati.
api ca kho vitakkayato vicārayato vitakkavipphārasaddaṃ sutvā ādisati —
‘evampi te mano, itthampi te mano, itipi te cittan’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ayaṃ tatiyā ādesanavidhā.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표상을 통해서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예언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에 기인한 일으킨 생각에 따라
퍼져 나오는 소리를 듣고 예언을 합니다.
‘이런 것이 당신의 마음이오, 당신의 마음은 이러하오. 당신의 마음은 이와 같소'라고,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예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 같고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예언의 분류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na heva kho nimittena ādisati,
nāpi manussānaṃ vā amanussānaṃ vā devatānaṃ vā saddaṃ sutvā ādisati,
nāpi vitakkayato vicārayato vitakkavipphārasaddaṃ sutvā ādisati.
api ca kho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ṃ samāpannassa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ti —
‘yathā imassa bhoto manosaṅkhārā paṇihitā.
tathā imassa cittassa anantarā imaṃ nāma vitakkaṃ vitakkessatī’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ayaṃ catutthā ādesanavidhā.
etadānuttariyaṃ, bhante, ādesanavidhāsu.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표상을 통해서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예언을 하지도 않습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에 기인한 일으킨 생각에 따라
퍼져 나오는 소리를 듣고도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삼매를 구족한 마음으로 마음을 통하여 꿰뚫어 압니다.
'이 존자의 마음작용이 이렇게 향하고 있으니
이런 마음은 즉시에 이러한 생각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예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 같고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예언의 분류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예언의 분류입니다. 세존이시여, 예언의 분류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相(특징적인 前兆/兆朕)-聲聞-尋伺/尋餘波聲聞(天耳界)-以心傳心
dassanasamāpattidesanā (DN 28) 견(見)의 증득에 대한 법문
149.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dassanasamāpattīsu.
catasso imā, bhante, dassanasamāpattiyo.
7.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견(見)의 증득177)에 대해서 법문을 해 주신
이것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견의 증득이 있습니다.
177) ‘견의 증득은 dassana-samāpatti의 역어이다. 여기서는 본서 제2권「대념처경」(D22)과 『중부』「염신경」(M119) 등에 나타나는 32가지 몸의 부위를 관찰하는 수행을 더 확장해서 4가지 견의 증득으로 설하고 있다.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관찰은 『청정도론』 VIII.44~144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것.
idha, bhant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178)
178) “마음의 삼매(cetosamādhi)란 초선의 삼매(paṭhamajjhāna-samādhi)이다.” (DA.iii.888)
yathāsamāhite citte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tacapariyantaṃ pūraṃ nānappakārassa asucino paccavekkhati —
‘atthi imasmiṃ kāye kesā lomā nakhā dantā taco maṃsaṃ nhāru aṭṭhi aṭṭhimiñjaṃ
vakkaṃ hadayaṃ yakanaṃ kilomakaṃ pihakaṃ papphāsaṃ antaṃ antaguṇaṃ udariyaṃ
karīsaṃ pittaṃ semhaṃ pubbo lohitaṃ sedo medo assu vasā kheḷo siṅghānikā lasikā muttan’ti.
ayaṃ paṭhamā dassanasamāpatti.
마음이 삼매에 들어서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털 끝에서부터
아래로, 살갗으로 둘러싸여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있음을 반조합니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 · 몸털 · 손발톱 · 이빨 · 살갖 · 살 · 힘줄 · 뼈 · 골수 ·
콩팥 · 염통 · 간 · 근막 · 지라 · 허파 · 큰창자 · 작은창자 · 위 · 똥 ·
담즙 · 가래 · 고름 · 피 · 땀 · 굳기름 · 눈물 · [피부의] 기름기 · 침 · 콧물 · 관절활액 · 오줌
등이 있다.'라고 이것이 첫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179)
179) “이것은 32가지 부위를 혐오스러움(paṭikūla)으로 마음에 잡도리한 뒤 혐오스러움을 봄(paṭikūla-dassana)을 통해서 생긴 초선을 증득하는 것이 첫 번째 견의 증득이다. 그런데 만일 이 禪을 기초(pādaka)로 한 뒤 예류자(sotāpanna)가 되면 이것은 방편을 빌리지 않은(nippariyāya) 첫 번째 견의 증득이라 한다.” (Ibid)
본문에서는 뇌가 빠져 실제로는 31가지이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골수 안에 뇌가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여 32가지라고 주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대념처경」(D22)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kāya : 4念處 身受心法의 身(똥 · 오줌 등의 group)을 말한다. 그러나 단수형이다.
여기서도 말씀하지 않으신 '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tacapariyantaṃ
pūraṃ nānappakārassa asucino paccavekkhati —
‘atthi imasmiṃ kāye kesā lomā ... pe ... lasikā muttan’ti.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서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털 끝에서부터
아래로, 살갖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있음을 반조합니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 · 몸털 · 손발톱 · 이빨 · 살갖 · 살 · 힘줄 · 뼈 · 골수 ·
콩팥 · 염통 · 간 · 근막 · 지라 · 허파 ·큰창자 · 작은창자 · 똥 ·
담즙 · 가래 · 고름 · 피 · 땀 · 굳기름 · 눈물 · [피부의] 기름기 · 침 · 콧물 · 관절활액 · 오줌
등이 있다.'라고,
atikkamma ca purisassa chavimaṃsalohitaṃ aṭṭhiṃ paccavekkhati.
ayaṃ dutiyā dassanasamāpatti.
그리고 나아가서 피부와 살과 피로 에워싸인 인간의 해골을 반조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180)
180) “뼈(aṭṭhi), 뼈'라고 반조한 뒤(paccavekkhitvā) 생긴 뼈를 대상으로 가진 하늘눈[天眼]의 기초가 되는 禪을 증득하는 것(dibbacakkhu-pādakajjhāna-samāpatti)이 두 번째 견의 증득이다. 그런데 만일 이 선을 기초로 한 뒤 일래도(sakadāgāmi-magga)를 생기게 하면 이것은 방편을 빌리지 않은 두 번째 견의 증득이라 한다.”(Ibid)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tacapariyantaṃ
pūraṃ nānappakārassa asucino paccavekkhati —
‘atthi imasmiṃ kāye kesā lomā ... pe ... lasikā muttan’ti.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서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털 끝에서부터
아래로,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있음을 반조합니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 · 몸털 … 관절활액 · 오줌 등이 있다.'라고,
atikkamma ca purisassa chavimaṃsalohitaṃ aṭṭhiṃ paccavekkhati.
purisassa ca viññāṇasotaṃ pajānāti,
ubhayato abbocchinnaṃ idha loke patiṭṭhitañca paraloke patiṭṭhitañca.
ayaṃ tatiyā dassanasamāpatti.
그리고 나아가서 피부와 살과 피로 에워싸인 인간의 해골을 반조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181)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
둘로 끊어지지 않은 인간의 알음알이의 흐름182)을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세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183)
181)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idlha loke patiṭṭhitaṃ)'라는 것은 욕탐(chanda-rāga)을 통해서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라는 두 번째 문장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업과 업을 통해서 겪는 것(upagacchanta)이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 업으로서의 존재(kamma-bhava)를 끌어 들여(ākaḍḍhanta) [재생연결식이 생긴 것(paṭisandhinibbattana - DAȚ.iii.89)]이 저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Ibid)
182) “알음알이의 흐름(viññāṇa-sota)이란 알음알이이다.” (DA.iii.888)
183)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유학(有學)과 범부(凡夫, sekkha puthujjana)들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cetopariyañāṇa, 他心通)를 설한 것이다. 유학과 범부들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세 번째 견의 증득이기 때문이다.”(Ibid)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tacapariyantaṃ pūraṃ nānappakārassa asucino paccavekkhati —
‘atthi imasmiṃ kāye kesā lomā ... pe ... lasikā muttan’ti.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서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털 끝에서부터
아래로,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있음을 반조합니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 · 몸털 · 관절활액 · … 오줌 등이 있다.'라고
그리고 나아가서 피부와 살과 피로 에워싸인 인간의 해골을 반조합니다.
atikkamma ca purisassa chavimaṃsalohitaṃ aṭṭhiṃ paccavekkhati.
purisassa ca viññāṇasotaṃ pajānāti,
ubhayato abbocchinnaṃ idha loke appatiṭṭhitañca paraloke appatiṭṭhitañca.
ayaṃ catutthā dassanasamāpatti.
etadānuttariyaṃ, bhante, dassanasamāpattīsu.
그리고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184)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
둘로 끊어지지 않은 인간의 알음알이의 흐름을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네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185)
이것이 네 가지 견의 증득입니다.186)
세존이시여, 견의 증득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184)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라는 것은 욕탐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다]라는 두 번째 문장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업과 업을 통해서 겪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 것이다. 업으로서의 존재(kammabhava)를 끌어 들이지 않아서(anākaḍḍhanta) [재생연결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 저 세상에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 것이다.”(Ibid)
185)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번뇌 다한 자(khīṇāsava, 아라한)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설한 것이다. 번뇌 다한 자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네 번째 견의 증득이기 때문이다.” (Ibid)
186) “그리고 [몸의] 32가지 부위들에 대해서 위빳사나를 시작한 것(āraddha vipassanā)도 첫 번째 견의 증득이다. 뼈를 대상으로 하여 위빳사나를 시작한 것이 두 번째 견의 증득이다. 유학과 범부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와, 번뇌 다한 자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는 위와 같이 변동이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 초선이 첫 번째 견의 증득이다. 제2선은 두 번째, 제3선은 세 번째, 제4선은 네 번째 견의 증득이다. 같은 방법으로 첫 번째 도(예류도)는 첫 번째 견의 증득이다. 두 번째 도는 두 번째, 세 번째 도는 세 번째, 네 번째 도는 네 번째 견의 증득이다.” (DA.iii.889)
puggalapaṇṇattidesanā (DN 28) 인간의 규정에 대한 법문
♦ 150.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uggalapaṇṇattīsu.
sattime, bhante, puggalā.
ubhatobhāgavimutto paññāvimutto kāyasakkhī diṭṭhippatto
saddhāvimutto dhammānusārī saddhānusārī.
etadānuttariyaṃ, bhante, puggalapaṇṇattīsu.
8.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인간의 규정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곱 가지 인간이 있나니
①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②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
③ 체험한 자 ④ 견해를 얻은 자 ⑤ 믿음으로 해탈한 자
⑥ 법을 따르는 자 ⑦ 믿음을 따르는 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인간의 규정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187)
187) 이 일곱 가지 인간의 규정(puggala-paññatti)은 『청정도론』 XXI.74 이하에 '일곱 분의 성자들의 분류’로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것. 양면해탈과 혜해탈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마할리 경」(D6) §13의 주해와 제2권「대인연경」(D15) §36의 주해를 참조할 것.
padhānadesanā (DN 28) 노력에 대한 법문
151.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adhānesu.
sattime, bhante sambojjhaṅgā satisambojjhaṅgo dhammavicayasambojjhaṅgo vīriyasambojjhaṅgo
pītisambojjhaṅgo passaddhisambojjhaṅgo samādhisambojjhaṅgo upekkhāsambojjhaṅgo.
etadānuttariyaṃ, bhante, padhānesu.
9.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노력188)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가 있나니
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 ②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
③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 ④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
⑤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 ⑥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
⑦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입니다.
세존이시여, 노력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189)
188) 노력(padhāna)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으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칠각지를 들고 있다. 사정근에 대해서는『청정도론』XXII.35와『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S25의 해설을 참조할 것.
189)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 七覺支는『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235쪽 이하를 참조할 것.
paṭipadādesanā (DN 28) 도닦음에 대한 법문
♦ 152.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aṭipadāsu.
catasso imā, bhante, paṭipadā
dukkhā paṭipadā dandhābhiññā, dukkhā paṭipadā khippābhiññā,
sukhā paṭipadā dandhābhiññā, sukhā paṭipadā khippābhiññāti.
10.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도닦음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도닦음190)이 있나니
도닦음도 어렵고 초월지(신통지)도 더딘 것, 도닦음은 어려우나 초월지는 빠른 것,
도닦음은 쉬우나 초월지가 더딘 것, 도닦음도 쉽고 초월지도 빠른 것입니다.
190) 이 네 가지 도닦음(paṭipāda)은 『청정도론』 III. §14 이하에 잘 설명되어 있다.
tatra, bhante, yāyaṃ paṭipadā dukkhā dandhābhiññā,
ayaṃ, bhante, paṭipadā ubhayeneva hīnā akkhāyati dukkhattā ca dandhattā ca.
tatra, bhante, yāyaṃ paṭipadā dukkhā khippābhiññā,
ayaṃ pana, bhante, paṭipadā dukkhattā hīnā akkhāyati .
tatra, bhante, yāyaṃ paṭipadā sukhā dandhābhiññā,
ayaṃ pana, bhante, paṭipadā dandhattā hīnā akkhāyati.
tatra, bhante, yāyaṃ paṭipadā sukhā khippābhiññā,
ayaṃ pana, bhante, paṭipadā ubhayeneva paṇītā akkhāyati sukhattā ca khippattā ca.
etadānuttariyaṃ, bhante, paṭipadāsu.
세존이시여, 여기서 도닦음도 어렵고 초월지도 더딘
이러한 도닦음은 어렵고 더디기 때문에 양쪽 다 저열하다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도닦음은 어려우나 초월지는 빠른 이러한 도닦음은
어렵기 때문에 저열하다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도닦음은 쉬우나 초월지가 더딘 이러한 도닦음은
더디기 때문에 저열하다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도닦음도 쉽고 초월지도 빠른 이러한 도닦음은
쉽고 빠르기 때문에 양쪽 다 수승하다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도닦음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bhassasamācārādidesanā (DN 28) 말의 품행에 대한 법문
♦ 153.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bhassasamācāre.
idha, bhante, ekacco na ceva musāvādupasañhitaṃ vācaṃ bhāsati
na ca vebhūtiyaṃ na ca pesuṇiyaṃ na ca sārambhajaṃ jayāpekkho;
mantā mantā ca vācaṃ bhāsati nidhānavatiṃ kālena.
etadānuttariyaṃ, bhante, bhassasamācāre.
11. “나아가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해 주신 말의 품행191)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말과 관련된 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192)을 하지 않고
중상모략하지 않고 다른 것을 둘러대어 이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이유가 분명하고 시의적절한 지혜로운193) 말을 합니다.
세존이시여, 말의 품행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191) '말의 품행'은 bhassa-samācāra을 옮긴 것이다.
192) '이간질'로 옮긴 원어는 vebhūtiya(재앙을 초래함)인데 주석서는 이간질하는 말(bhedakaravāc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A.ili.892)
193) '지혜로운'으로 옮긴 원어는 mantā mantā인데 주석서에서 paññā(통찰지, 반야)라고 설명하고 있다.(Ibid)
인간의 도덕적 품행에 대한 법문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urisasīlasamācāre.
12.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인간의 도덕적 품행194)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194) ‘인간의 도덕적 품행'은 purisa-sīla-samācāra를 옮긴 것이다.
idha, bhante, ekacco sacco cassa saddho ca, na ca kuhako, na ca lapako, na ca nemittiko,
na ca nippesiko, na ca lābhena lābhaṃ nijigīsanako , indriyesu guttadvāro, bhojane mattaññū,
samakārī, jāgariyānuyogamanuyutto, atandito, āraddhavīriyo, jhāyī, satimā, kalyāṇapaṭibhāno,
gatimā, dhitimā, matimā, na ca kāmesu giddho, sato ca nipako ca.
etadānuttariyaṃ, bhante, purisasīlasamācāre.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진실하고 믿음이 있으며, 계략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암시를 주지 않고, 비방하지 않고, 이득으로 이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키고 음식에서 적당함을 알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바르게 행하며195)
깨어 있음에 전념하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참선을 하고196) 마음챙김을 유지하고
명료하게 표현하고, 행실을 뒷받침하는 통찰지와 활력을 [뒷받침하는 통찰지]와
사상을 [뒷받침하는 통찰지]를 갖추었고197)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으며
마음챙기고 현명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덕적 품행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195) “바르게 행함(samakārī)이란 몸과 말과 마노를 통해서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부정직함(vaṅka)을 제거하고 바르게 행한다는 뜻이다.”(DA.iii.893)
196) ‘참선을 하고'로 옮긴 원어는 PTS본은 ñāyī(지혜로운 자)이고 미얀마본과 PTS본 주석서에는 jhāyī(참선하는 자)로 나타난다. 문맥상 jhāyī가 옳다.
197) ‘행실을 뒷받침하는 통찰지와 활력을 뒷받침하는 통찰지와 사상을 뒷받침하는 통찰지를 갖추었고'로 길게 옮긴 원어는 gatimā dhitimā mutimā이다. 이것은 각각 행실을 갖춤, 활력을 갖춤, 사상을 갖춤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주석서에서 “행실을 갖춤이란 행실을 가능하게 하는(gamana samatthā) 통찰지(paññā)를 갖춘 것(samannāgata)이다. 활력을 갖춤이란 활력(dhāraṇa)을 가능하게 하는 통찰지를 갖춘 것이다. 사상을 갖춤에서 사상이란 통찰지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통찰지를 갖추었다는 뜻이다.”(Ibid)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anusāsanavidhādesanā (DN 28) 가르침의 분류에 대한 법문
154.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anusāsanavidhāsu.
catasso imā bhante anusāsanavidhā —
13. "나아가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해 주신 가르침의 분류198)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가르침의 분류가 있습니다.
198) ‘가르침의 분류는 anusāsana-vidhā를 옮긴 것이다.
*sāsana 명령(조언)을 anu-따라 가는(갈 수 있는) vidhā 여러 부류들에 대한 dhamma 분류
즉 根氣의 부류에 따라 설하시는 가르침(sāsana)의 분류
jānāti, bhante, bhagavā a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ayaṃ puggalo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bhavissa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근원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함]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설한 대로 도를 닦아,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199)
199) 본 문단에 나타나는 세 가지 족쇄 등의 여러 술어들은 본서 제1권「마할리 경」(D6) §13의 주해들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참조할 것.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bhavissati,
sakid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issatī’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설한 대로 도를 닦아,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者]가 되어,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기를.’이라고
한다면 계를 완전하게 갖춘 자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bhavissa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설한 대로 도를 닦아,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不還者]'라고
아십니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ī’ti.
etadānuttariyaṃ, bhante, anusāsanavidhāsu.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설한 대로 도를 닦아,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阿羅漢]'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의 분류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parapuggalavimuttiñāṇadesanā (DN 28) 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지혜에 대한 법문
155.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arapuggalavimuttiñāṇe.
14.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지혜200)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201)
200) '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지혜'는 parapuggala-vimuttiñāṇa를 옮긴 것이다.
201) 앞의 §13과 다른 것은 '이 사람은 설한 대로 도를 닦아(ayaṃ puggalo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라는 구절이 여기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13에서는 가르침의 분류가 주제이기 때문에 세존이 가르치고 설하신 대로 도를 닦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이 증득한 4가지 성자의 경지를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bhavissa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bhavissati,
sakid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issatī’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者]가 되어,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bhavissa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不還者]'라고 아십니다.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ṃ 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
‘ayaṃ puggal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ī’ti.
etadānuttariyaṃ, bhante, parapuggalavimuttiñāṇe.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자신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阿羅漢]'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지혜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sassatavādadesanā (DN 28) 영속론에 대한 법문
156.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sassatavādesu.
tayome, bhante, sassatavādā.
15.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영속론[常見]202)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 가지 영속론이 있습니다.
202) ‘영속론[常見]'은 sassata-vāda의 역어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세 가지 영속론은 본서 제1권 『범망경」(D1) §§1.31~1.33의 내용과 일치한다.
idha, bhant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tissopi jātiyo catassopi jātiyo pañcapi jātiyo dasapi jātiyo
vīsampi jātiyo tiṃsampi jātiyo cattālīsampi jātiyo paññāsampi jātiyo jātisatampi jātisahassampi
jātisatasahassampi anekānipi jātisatāni anekānipi jātisahassāni anekānipi jātisatasahassāni,
‘amutr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수백 생, 수천 생, 수십만 생 전을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다시 태어났다.’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냅니다.
so evamāha — ‘atī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 saṃvaṭṭi vā loko vivaṭṭi vāti.
anāga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 saṃvaṭṭissati vā loko vivaṭṭissati vāti.
sassato attā ca loko ca vañjho kūṭaṭṭho esikaṭṭhāyiṭṭhito.
te ca sattā sandhāvanti saṃsaranti cavanti upapajjanti, atthitveva sassatisaman’ti.
ayaṃ paṭhamo sassatavādo.
그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과거를 아나니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
나는 미래도 아나니 세상은 수축할 것이고 팽창할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황무지와 같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첫 번째 영속론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ekampi saṃvaṭṭavivaṭṭaṃ dve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tīṇi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cattāri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pañca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dasa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amutr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o evamāha — ‘atī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saṃvaṭṭi vā loko vivaṭṭi vāti .
anāga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saṃvaṭṭissati vā loko vivaṭṭissati vāti.
sassato attā ca loko ca vañjho kūṭaṭṭho esikaṭṭhāyiṭṭhito.
te ca sattā sandhāvanti saṃsaranti cavanti upapajjanti, atthitveva sassatisaman’ti.
ayaṃ dutiyo sassatavādo.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하나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두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네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다섯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과거를 아나니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
나는 미래도 아나니 세상은 수축할 것이고 팽창할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황무지와 같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두 번째 영속론입니다.
“puna caparaṃ, bhante, idh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dasa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vīsam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tiṃsam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cattālīsampi saṃvaṭṭavivaṭṭāni,
‘amutr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o evamāha — ‘atī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saṃvaṭṭipi loko vivaṭṭipīti;
anāgataṃpāhaṃ addhānaṃ jānāmi saṃvaṭṭissatipi loko vivaṭṭissatipīti.
sassato attā ca loko ca vañjho kūṭaṭṭho esikaṭṭhāyiṭṭhito.
te ca sattā sandhāvanti saṃsaranti cavanti upapajjanti, atthitveva sassatisaman’ti.
ayaṃ tatiyo sassatavādo,
etadānuttariyaṃ, bhante, sassatavādesu.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스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서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마흔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과거를 아나니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한다.
나는 미래도 아나니 세상은 수축할 것이고 팽창할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황무지와 같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세 번째 영속론입니다.
이것이 세 가지 영속론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속론[常見]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pubbenivāsānussatiñāṇadesanā (DN 28)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에 대한 법문
157.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pubbenivāsānussatiñāṇe.
16.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203)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203)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pubbenivasānussatiñāṇa)는 본서 제1권 「사문과경」 (D2) §93의 정형구와 일치한다. 『청정도론』 XIII.13~71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idha, bhant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tissopi jātiyo catassopi jātiyo pañcapi jātiyo dasapi jātiyo
vīsampi jātiyo tiṃsampi jātiyo cattālīsampi jātiyo paññāsampi jātiyo
jātisatampi jātisahassampi jātisatasahassampi anekepi saṃvaṭṭakappe
anekepi vivaṭṭakappe anekepi saṃvaṭṭavivaṭṭakappe,
‘amutr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anti, bhante, devā , yesaṃ na sakkā gaṇanāya vā saṅkhānena vā āyu saṅkhātuṃ.
api ca, yasmiṃ yasmiṃ attabhāve abhinivuṭṭhapubbo hoti
yadi vā rūpīsu yadi vā arūpīsu yadi vā saññīsu yadi vā asaññīsu yadi vā nevasaññīnāsaññīsu.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etadānuttariyaṃ, bhan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e.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여러 가지전생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합니다.
세존이시여,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cutūpapātañāṇadesanā (DN 28)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에 대한 법문
158.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e.
17. “나아가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해 주신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204)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204)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cutūpapātañāṇa)는 본서 제1권 「사문과경」(D2) §95의 정형구와 일치한다. 『청정도론』 XIV.72~101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idha, bhant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
‘ime vata bhonto sattā kāyaduccaritena samannāgatā vacīduccaritena samannāgatā
manoduccaritena samannāgatā ariyānaṃ upavādakā micchādiṭṭhikā micchādiṭṭhikammasamādānā.
te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nnā.
ime vā pana bhonto sattā kāyasucaritena samannāgatā vacīsucaritena samannāgatā
manosucaritena samannāgatā ariyānaṃ anupavādakā sammādiṭṭhikā sammādiṭṭhikammasamādānā.
te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nnā’ti.
iti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etadānuttariyaṃ, bhante,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e.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이분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분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비참한 곳, 나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분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분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서 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세존이시여,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iddhividhadesanā (DN 28) 신통변화[神足通]에 대한 법문
159. “aparaṃ pana, bhante, etadānuttariyaṃ,
yathā bhagavā dhammaṃ deseti iddhividhāsu.
18.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신통변화[神足通]205)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205) 신통변화(iddividha)는 본서 제1권「사문과경」(D2) §87의 정형구와 일치한다. 그리고 『청정도론』 XII장 전체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dvemā, bhante, iddhividhāyo —
atthi, bhante, iddhi sāsavā saupadhikā, ‘no ariyā’ti vuccati.
atthi, bhante, iddhi anāsavā anupadhikā ‘ariyā’ti vuccati.
세존이시여, 이러한 두 가지 신통변화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이 있고,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이 있습니다.
“katamā ca, bhante, iddhi sāsavā saupadhikā, ‘no ariyā’ti vuccati?
idha, bhant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 pe ...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anekavihitaṃ iddhividhaṃ paccanubhoti.
ekopi hutvā bahudhā hoti, bahudhāpi hutvā eko hoti;
āvibhāvaṃ tirobhāvaṃ tirokuṭṭaṃ tiropākāraṃ tiropabbataṃ asajjamāno gacchati seyyathāpi ākāse.
pathaviyāpi ummujjanimujjaṃ karoti,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e gacchati, seyyathāpi pathaviyaṃ.
ākāsepi pallaṅkena kamati, seyyathāpi pakkhī sakuṇo.
imepi candimasūriye evaṃmahiddhike evaṃmahānubhāve pāṇinā parāmasati parimajjati.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ṃ vatteti.
ayaṃ, bhante, iddhi sāsavā saupadhikā, ‘no ariyā’ti vuccati.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나툽니다.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합니다.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합니다.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합니다.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합니다.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계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다.
“katamā pana, bhante, iddhi anāsavā anupadhikā, ‘ariyā’ti vuccati?
idha, bhante, bhikkhu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e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p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sace ākaṅkhati — ‘appaṭikūle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e ca appaṭikūle ca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p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e ca appaṭikūle ca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añca appaṭikūlañca tadubhayaṃ abhinivajjetvā
upekkhako vihareyyaṃ sato sampajāno’ti, upekkhako tattha viharati sato sampajāno.
ayaṃ, bhante, iddhi anāsavā anupadhikā ‘ariyā’ti vuccati.
etadānuttariyaṃ, bhante, iddhividhāsu .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가
① 만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② 만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③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④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⑤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 둘 다를 제거한 뒤
평온한 자가 되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거기서 평온한 자가 되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신통변화[神足通]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taṃ bhagavā asesamabhijānāti, taṃ bhagavato asesamabhijānato uttari abhiññeyyaṃ natthi,
yadabhijānaṃ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bhagavatā bhiyyobhiññataro assa
yadidaṃ iddhividhāsu.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신통변화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초월해서 안다고 주장할 다른 [법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댓글 // Vijānāti bhagavā manasā dhammaṃ.
세존께서도 정신이 있어서 그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하지만//
세존께서도 그런(닙바나) 마음(manasā)으로 법을 인식하지만...
중에 의해서(majjhena) 법을 설하다...에서는
두가지 종류의 연기된 법을 설합니다.
1. 12연기내 각각에 관한 연기된 법(가령, 형성들, 식, 명색, ... 태어남 )
2. 괴로움에 관한 연기된 법(법-멸-집)
알음알이...분별 識...안다... 철처히 안다 -> 정확한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