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阿片)으로 명의가 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후배, 서경호(徐敬浩, 1952~ ) 교수가 그의 저서 《아편전쟁》 (일조각, 2020)를 보내왔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최근 중국의 ‘대국굴기(大國崛起)’ 추구와 그것이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아편전쟁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현재의 ‘대국굴기’를 그 설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설욕은 왕년의 가해자를 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주변의 만만한 국가를 대상으로 하지 않나 싶다.”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깊은 혜안(慧眼)을 보았습니다. 귀한 저서를 읽는 기쁨은 더 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1780년, 1796년, 1799년 3차례에 걸쳐 아편 수입을 대대적으로 금지하게 되지만 영국은 이러한 제재조치를 뒤로하고 밀수입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였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됩니다. 이렇게 영국이 막대한 이익을 보자 미국 역시 튀르키예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기 시작합니다. 막대한 양의 아편이 중국으로 유입되자 가격이 저렴해진 아편을 중국인들이 대거 흡입하게 되고 아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사진 1: 이성낙, 2024. 사진 2 및 해설: Google)
필자가 1960년대 뮌헨(München)대학교 의과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을 하던 시절, 아편과는 좀 다른 부류의 마약 ‘마리화나(Marijuana)’가 사회 문제로 드러나면서 세계적 명저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저자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를 위시하여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이미 오래전 마리화나 찬미론자였다고 알려졌습니다.
필자는 마약에 대한 관용적인 사회정서에 적잖이 놀라워하며 의아해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아마도 퍽은 놀라웠나 봅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병원의 역학 구조상 인턴의 직무와 입지가 참으로 ‘왜소’할 때가 많아서 종종 괴리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환자 진료와 관련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게 ‘인턴의 잡(Job)’이었습니다. 당시 선배 의사가 우아하게 부탁하지만, 결국은 방사선과에 달려가서 환자 진료에 필요한 X-Ray 필름을 찾아오라는 식의 ‘막노동’을 하던 시절입니다. 몸으로 때우는 심부름꾼 같은 역할을 하다 보니 가끔 마음의 갈등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지만 홀로 진단을 내릴 수도, 능동적인 진료도 허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형 대학병원구조에서 인턴의 입지는 실로 초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높은 교수님’이 회진할 때면 선배 레지던트의 그늘에 묻혀 자신의 존재감조차 찾기 어려웠습니다.
회진할 때 또는 회진이 끝났을 때, 교수님은 병실 밖 복도에서 회진 중 보았던 환자에 대해 레지던트에게 질문도 하고 더 필요한 검사 항목들을 자상하게 지시하시곤 하였습니다. 교수님이 실습 나온 학생들과 질의응답을 해도, 인턴은 항상 열외가 되어 먼발치에서 조용히 서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가끔은 왠지 ‘이방인’처럼 쑥스러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주임교수와 조교수 및 레지던트들이 한 입원 환자의 치료 문제를 놓고 무척이나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일주일 전 입원한 40대 남자 환자가 어떤 치료에도 차도가 없고 심한 설사 증상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는 극심한 탈수(脫水)증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각종 세균 검사를 해봤지만, 어떤 병인균(病因菌)도 찾지 못했고 방사선 검사도 치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환자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고 할까. 환자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코와 볼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다”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극도의 탈수 상태에서 겨우 숨만 어렵게 쉬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가 싶었습니다. 정녕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회진 중 그 환자를 세심하게 살펴본 후 주임교수님이 “Extra muros(밖에서)”라는 짧은 코멘트를 주셨습니다. 병실을 나와 소회의실에 주임교수를 비롯한 다른 교수와 레지던트들이 모였습니다. 교수님은 주변을 살펴보면서, 혹시 누가 좋은 치료방안이 생각나면 말해보라는 취지로 도움을 청하듯 물으셨습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난감한 분위기 속 먼발치에 서 있던 인턴인 필자가 얼떨결에 “혹시 아편액[(阿片液), Tintura opium]을 쓰면 어떨까요?”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입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귀에서 ‘쿵쿵’ 울렸습니다. 순간 레지던트 선배들은 ‘감히 인턴 주제에 끼어들어?’라는 듯 차가운 눈초리로 필자를 쏘아보았습니다.
그때 주임교수께서 “아, 그래, 그렇지. Tintura opium이야!!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라며 큰 소리로 환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곤 필자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면서 “명의가 따로 없네, Herr Doctor Lee!!” 라면서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필자와 그 자리의 선배들 모두 어리둥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병원 구석구석을 돌고 돌았습니다. 필자는 일약 ‘명의반열’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 환자의 극심했던 설사 증상은 ‘아편액’ 몇 방울이 들어가자 놀랍게도 호전되기 시작해 설사가 멈추고, 약 4주간의 영양 보충 치료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였습니다. 퇴원하던 환자의 미소에 덧없는 행복감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환자의 그 행복해하는 모습 때문에, 오늘도 과한 업무를 견뎌내는가 봅니다.
모두 필자가 어떻게 아편을 생각해 냈는지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뮌헨대 의대 다닐 때, 약리학 시간에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면서 필자의 속내를 감추었습니다. 필자는 끝내 약리학 강의에서 배웠다고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그 유명한 ‘아편전쟁’ 때문에 서구사회는 동양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익히 알고 있기에, 그냥 “약리학 강의 때 들었던 것이 기억나서….”라고 말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필자가 아편을 생각해 낸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필자가 중학교 1~2년생 시절, 전쟁 중이라 주변 생활환경, 특히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인 이질(痢疾)로 고통받던 환자가 이웃에 종종 있었나 봅니다. 딱한 사정을 들으신 어머니는 집에 비상약으로 깊이 간직하고 있던 아편을 환자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곤 하셨습니다. 그러면, 며칠 후 환자 가족이 어머니를 찾아와 환자가 살아났다며 좋아하고 고마워하던 모습이 가끔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작은 사탕 알 크기의 검정 엿 덩어리 같은 소품을 정성껏 고운 삼베 천에 싸서 간직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훗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당시 대가족을 거느리는 가정에서는 ‘아편’이 가내 상비약이었다고 저에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의대생으로 약리학 강의를 들으며, 아편이 약리학적으로 지사제(止瀉劑)로서 효능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되새겼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길에 오를 때 어머니께서 그 ‘상비약’을 챙기셨다는 사실에 오늘, 이 순간에도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한편 필자가 무학(無學)이었던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겼던 시기가 있었던 점을 절절한 마음으로 사죄합니다. 어머니께서 필자에게 몸소 가르쳐주신 세상 사는 지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인턴 시절의 그 경험은 훗날 필자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경호 교수의 역작 《아편전쟁》을 읽으며, 필자가 경험했던 다른 작은 ‘아편전쟁’을 떠올렸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깊은 뜻을 되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