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산이랑 어울림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10 우리 산 하....... 스크랩 사북읍의 지명 유래
야생화 추천 0 조회 82 07.10.30 23: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북읍 지명 유래


 1. 연 혁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읍으로 읍사무소 소재지는 사북리이다.

  본래 동면 관할지역으로 1962년부터 동면 사북출장소가 사북, 고한, 직전 등 3개 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태백산지의 탄전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성장하여 1973년 사북출장소 관할구역이 사북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인구 급증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이 불가피하여 1985년 사북리 일원과 고한리 지역이 고한읍과 사북읍으로 각각 분읍 승격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지대로 밭이 약간 있을 뿐이며 주요산업은 사북일대가 석탄산업이다.

  1951년 임산물 반출을 목적으로 임산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처음으로 자동차가 운행되었고, 1959년 동고광업소(東古鑛業所)가 무연탄개발에 착수하면서 비로소 민가가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개발이 부진하다가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태백선이 개통되고 아울러 전철화 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한 신흥탄광도시가 되었다. 특산물로는 백전리의 잣이 유명하며 도로교통은 국도, 지방도로가 확, 포장되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 지  세


  태백산맥의 함백산(咸白山), 화절령(花折嶺), 백운산(白雲山), 노목산(櫓木山), 지장산(地臧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한읍, 북으로는 동면 백전리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남면, 남쪽으로는 영월군 상동읍과 경계해 있다.

  지형이 높은 고랭지역으로 농산물의 작물 성장이 잘 되지 않아 농경지는 비교적 없는 편으로 고한 갈래산에서 발원한 지장천이 시가지 중심부를 지나 남면으로 유입된다.



    3. 지역특성


전형적인 광산 지역으로 한때 연간 무연탄 200만 톤 이상을 생산 고한읍과 함께 국가 산업의 일익을 담당하는 태백탄전지대의 중심부로 국내 최고의 채탄시설을 자랑하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자리하고 있다.

  석탄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의 보고로서 석탄산업이 본격화되면서 산업 인구가 날로 급증한 탄광도시이다.

  1962년 동면 사북출장소가 설치되었으나 지역 발전에 행정력이 따르지 못하여 1984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사북읍이 신설되어 법정리수 3개리, 행정리수 15개 리의 새로운 광산도시로 출발하였으나 󰡑�93년 이후 석탄 산업이 사향길로 접어들자 많은 인구가 떠나고 지역경제가 침체되었으나 󰡑�96년 탄광 지역개발 특별법이 시행됨에 따라 관광도시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95년 말 현재 총면적 47.15㎢, 인구 10,123명, 가구 2,990호, 농가 89호, 경지면적 4.71㎢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사곡 계곡이 유명하며,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사북(舍北), 직전(稷田)등 2개 동리가 있다.




    4. 지명의 유래


  ◎ 사북읍(舍北邑)


  사북읍은 조선시대에 동산면 관내로, 사음대, 북일, 고토일, 물한리, 발전, 수출등 7개 리였다.

  그러다가 광무 10년(1906년)에 동상면과 동중면을 합해 동면 관내로 바뀌었고,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84년 7월 사북읍으로 되었다.


  (1) 사북리(舍北里)


현재 사북읍 소재인 사북7리 12, 3, 8리 지역인데 조선시대 때 방좌수(方座首)라는 부자가 있어 이곳에 그의 땅을 관리 경작하면서 마을산턱에 소작권도 주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옛마을 지명인데 사음(舍音)이란 사자와 북일(北日)의 북자를 합쳐서 사북이라고 칭한 지명이다. 속칭 사복(蛇伏)이라고도 한다. 또한 북쪽에 정암사가 있다하여 사북(舍北)이라 하였다 한다.


노른가리 : 사북1리 지역에 해당하며 옛날지명인데 이 마을에 노른가리 속칭 황가리(黃家里) 부자 마을인데 곡식을 말(斗)로 나누어주는 후한 인심과 많은 곡식을 여러 날 말로 되어야 한다는 뜻에 기인 되 생긴 지명이다.

  일명 노음곡(老陰谷)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밀양 박씨, 정선 전씨, 평창 이씨 3성씨가 거주하다가 약 50년 전 박씨는 원주로 정선 전씨는 타지로 이주하여 그후 평창 이씨만 거주했다고 한다.


사음대(舍音垈) : 조선조 때에 방좌수라는 부자가 있어 토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사음(舍音)을 두었다. 사음을 일명「마름터」라고 부른다. 마름이란 지주의 땅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명 사음대(思蔭垈)라고도 한다.


사음(寫音) : 사음은 사음대와 노음곡의 글자를 따서 사음이라고 생긴 말이다.


북일(北日) : 북일은 일명 두일(斗日)로 두일은 북쪽 마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평창 이씨의 28대손 광제, 광동, 광행 3형제가 살다가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하고, 광행은 울진 송씨와 결혼하여 살다가 단종(端宗)이 성왕으로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따라 낙향하여 영월군 상동면 법곡실에서 살다가 이곳에 이주 순흥 안씨와 임진왜란 때 황씨, 이씨, 풍기 진씨가 살아온 마을이다.


범바위 : 사북중, 고등학교 뒷편에 거대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흡사 범과 같아서 범바위라고 부른다. 이 범바위는 20년 전 지역개발로 깨어져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옛날에 이 바위 밑 굴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아 길렀다해서 이 고을을 범바위골이라고 생긴 지명이다. 범바위는 사북 자생단체 협의회에서 발간한「범바위 문화」(창간호)표지에 게재한 바 있다.


말개이골 : 사북 12리 지역으로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유리 거울 같이 맑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속칭 말이 여물 먹다가 남겨놓고 왔다하여 밥 남은 소(沼)라 했는데 지금 사북시장 뒤편이다.

 

화절령(花折嶺) : 사북 6리에서 영월군 상동면으로 통하는 험준령치인데 진달래, 철쭉꽃  등이 만발해 오가는 길손을 즐겁게 하는 봄철의 경치가 장관이래서 붙여진 지명이고 사북 8경의 명승지이다. 이곳 정상에는 100평정도의 큰 연못이 2개소 있다.


지장산(地藏山) : 지장산은 동원탄좌 동원광업소 뒷산으로 지장산은 글자 그대로 땅에 지하자원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다고 붙인 지명이다. 이곳은 광원들의 사택 단지로 개발되어 있다.


골 말 : 지장산(표고 931m)과 노목산(표고 1,150m) 산의 사북 10, 11리 지역으로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이란 지형에서 유래됨.


도사곡(道士谷) : 사북 4리인데 항일전적이고, 동학란 때 평양에서 선비 50여 호가 정감록을 보고 이곳에 피난을 와 생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천도교인들과 의병 활동을 하던 주민들이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경상도 풍기 쪽으로 모두 떠났다. 이곳은 항일전적지로도 유명하다. 두위봉 동쪽 계곡에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예속 부대 의병단 백 여명이 퇴소한 대오를 다시 정돈하며 재거의 준비를 진행 중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악전 고투하였으나 왜병의 신무기에 당할 길 없어 의병 80여명이 천추의 한을 품고 장열한 최후를 마친 격전지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6. 8. 15일 도사곡 입구에 사북라이온스클럽에서 김시중(金時中) 의 병장의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도사곡전투에 김시중 의병장 동생 김시백(金時伯) 의병도 함께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시중 장군이 전사하자 형의 시신을 거둘 수 없어 현지에 가매장하였다가 후일 동생 김시백이 형님의 시체를 영월군 하동면 내래앞골 뒷산에 산소를 모셨다고 하나 현재 그 묘소는 찾을 길이 없다. 그의 후손인 김시백 아들 김병진은 충북 제천 송학면 입석 1리에 현재 살고 있다. 이곳은 서출동유북향수(西出東流北向水)하여 도사가 탄생할 수 있는 지역이라 하여 도사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직전리(稷田里)


 본리는 조선조시대 동상면에 속하던 무낼(水出) 피내(㮨川, 鉢田), 사부랭이(沙浮浪)골 배랑터, 삼부자(三富者)골, 옥실(玉室), 먼지골, 이스내, 잿말랑 등 마을인데, 피내(㮨田) 또는 발전(鉢田)의 뜻인(피작물) 피직자와 발전(鉢田) 밭전(田)자를 따서 지은 지명으로 추측된다. 속칭 승여(僧侶)의 바랏대 그릇을 놓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250년 전 화전민촌으로 형성된 고산마을로 옛부터 난을 피해서 은둔생활을 하여오던 금성 나씨(羅氏), 제주 고씨(高氏), 밀양 박씨(朴氏)가 정착하였다.


피내(㮨川) : 직전리 2반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 직전분교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지명을 세분하면 피내골, 옥실골, 이슬래골, 제작재가 있다. 약 200년 전 쌓은 돌탑이 있는데 높이 4m, 둘레 10m 돌무덤 안에는 백말을 묻고 쌓았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무시무시한 도깨비가 출연하여 마을에 재앙을 일으키니 이를 막기 위해 돌탑을 쌓았다고 한다.


무넬 : 무넬은 불당곡(佛堂谷), 사양곡(賜陽谷), 회곡(回谷), 천지곡(天地谷) 등을 합하여 무넬 또는 수출(水出)등이라 하였다. 불당곡은 옛날에 절이 있는 곳이다. 사양곡은 음지가 아닌 양지로서 햇볕이 잘 쬐는 골이고, 천지곡은 다른 곡 보다 비교적 높아 천지골이라 한다. 무넬은 말 그대로 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무네󰡑�라 유래된 지명이다.


발전(鉢田) : 직전 3,4반을 통틀어 발전이라 부른다. 이 지역 사부랑곡(沙浮浪谷)에는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서 고랭지 채소가 잘되는 곳이고 옛날에는 갈대 숲이 무성한 평원지라고 해서 바리대 밭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3) 사북8경(舍北八景)


사음대부평(舍音垈 浮坪) : 사음대부평은 사북리와 직전리 사이에 있으며 그 옛날 풍류객들이 사음대(舍音垈)의 고대(高垈)에 올라 음풍영시(音風詠詩)를 하며, 즐기던 곳이다.


호암동청풍(虎岩洞淸風) : 호암동청풍은 사북중, 고등학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랑이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호암동이요, 맑은 바람이 시원하여 여름에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화절령방춘(花折嶺芳春) : 화절령방춘은 사북에서 영월군 상동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고개로 진달래, 철쭉꽃이 만발해 오가는 길손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봄철에는 그 경치가 장관이다.


마산평목적(馬山坪牧笛) : 마산평목적은 현 사북역 뒷산의 평원지로서 넓게 개간된 초원에서 옛 사람들이 소를 먹이며, 피리를 불며 노래하던 곳이다.


주초산지가(朱草産芝歌) : 주초산지가는 두일(斗日) 뒷산에 주초(朱草)인 약재가 많이 있어 그 주초를 캐는 채약꾼들이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는데 유래한 곳이다.


불암소약수(佛岩沼藥水) : 불암소약수는 사북과 고한 사이에 있는 부처소(沼)의 이름이고, 약수는 소의 옆에서 솟고있는 약천(藥川)으로 옛날에는 유명했던 곳이다.


효상봉설원(曉襐峰雪月) : 효상봉설원은 효상봉에 백설이 쌓이고 명월이 흰눈 위에 비치면 그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어서 옛 사택은「월백설 백천지백(月百雪 百天地百)이라고 노래한다.」한다.


도사봉쌍부(道士艂雙鳧) : 도사봉쌍부는 두위봉(斗圍峰) 동편의 도사곡(道士谷)의 맑은 물에서 물오리(원앙새)가 쌍쌍이 짝을 지어 놀았던 곳이다.

  이상의 8경에 대하여 국운 황문흠(菊운 黃文欽), 송죽 이세백(松竹 李世伯), 두옹의 영운(詠韻)이 있다.

  또한 동남천(東南川), 춘하절(春夏節) 폭포에 뛰어오른 물고기, 그 중에 열목어(熱目魚)는 참으로 가경이였으나 맑은 물 아닌 검은 석탄 물에는 볼 수 없으니 아쉽다.



  (4) 태나무골 굴


 사북읍 직전리에 소재해 있는 이 동굴은 길이 220m정도, 직선거리 140m 들어가서 다시 오른편으로 꺾어 80m 들어가다 40m 되돌아 나오면 길이 왼편으로 뚫려 있는데 끝머리  50m 깊고 긴 절벽이 있다. 굴속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대석회암층의 암석층이다. 벌레 낀 화석 석회암과 이질석회암으로 된 지층은 검은 초록색과 검은 색의 점판암으로 되었다.


  이 굴 입구에서 70m되는 곳에서 초식동물인 말의 아래턱 뼈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보존 상태가 좋다는 것이다. 또 입구로부터 100m지점에서 육식동물인 여우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된바 있는데 놀라운 것은 아래턱 부분에 청동제 장식고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아 청동기 시대 약 기원전 100~500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밖에 굴속에서 약20개 조각의 토기 파편이 발견됐는데 갈색의 경질 무문토기로 알려졌다.


  (5) 불공씨(孔氏)


  지금부터 약 90여 년 전, 어느 해 봄날에 한 사람이 무심코 버린 담배불이 번져 큰불이 되어서 삼척 하장면을 거쳐, 강릉, 양양, 간성까지 번져서 산림과 가옥을 모두 태워 버리는 큰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불의 발원 지점은 이곳 사북읍 사음대(舍音垈)이고 불을 지른 사람은 사음대에 살고 있는 공모씨다.

  공모씨는 이날 두일동(斗日洞), 남망곡(南望谷)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무심코 버린 담배불이 춘삼월 마른 낙엽에 인화되어 삽시간에 번지어 오백여 리나 떨어져 있는 간성까지 번졌으니 어찌 큰 화재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당시의 수사기관에서는 방화자를 잡으려고 몇 달을 사음대에서 수사를 벌렸으나 끝내는 잡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수사가 진행 중이던 때 실화자(失火者) 공씨는 두일동에 거주하는 李均이라는 사람집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씨의 덕분으로 잡히지 않았다 해서 공씨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덕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며 실화자인 공씨를 그후부터는 불공씨라고 불렀다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6) 천석지기 방좌수


  조선시대 자신의 토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마을에 마름(舍音) 지금의 사북읍 사북리 시장(마름터) 위치에 천석지기 부자가 있었으니 그가 방좌수이다. 그는 원래 남의 집 머슴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북일 남망곡(南望谷)에 꼴을 베러 갔는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 풀을 베고 있는데 난데없이 쉬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큰 뱀이 아닌가, 방좌수는 깜짝 놀라 일을 멈추고 자세히 뱀을 보니 뱀은 뱀인데 꼬리가 없는 뱀인지라 하도 신기하고 이상스럽다고 생각되어 머리에 쓰고 있던 하얀 수건을 펼쳐 놓으며 나에게 도움을 줄 테면 수건에 오르고 해를 주려하면 수건에 오르지 말라고 외치니 그 꼬리 없는 뱀이 슬금슬금 수건 쪽으로 다가와 하얀 수건에 오르고 있다가 숲으로 사라졌다. 그 후부터 살림이 차차 불어나기 시작하여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었으나 자식이 없어 자식을 얻고자 부인을 8명이나 거느리고 살았는데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자식을 소망하던 중 하루는 백발노인이 현몽에 나타나 보섭을 하나주며 농사에 힘쓰라고 하며 보섭을 주니 받던 도중 실수하여 보섭이 깨어졌다. 그후 네 번째 부인이 지식을 잉태하였으나 사산하여 손이 끊어졌다 한다. 방좌수의 저택은 현 사북리서 배나무 뒤에 거주하였으며 현 사북 주유소 위쪽에 방씨의 묘소가 있었으나 산간도로 공사로 분묘이장을 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