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시인>>
<<이상국 시인 양력>>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 『동해별곡』『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등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강원문화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이상국 시인의 대표 시>>
뿔을 적시며/이상국
비 오는 날
안경쟁이 아들과 함께
아내가 부쳐주는 장떡을 먹으며 집을 지킨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 보냈는데
갈 데 못 갈 데 더듬고 다니다가
비 오는 날
나무 이파리만한 세상에서
달팽이처럼 뿔을 적신다
내 이름은 문학의 밤
내 이름은 문학의 밤입니다
친구들 모임 같은 곳에 가서
누군가 "어이, 문학의 밤, 한잔 받아" 하면
나는 "미친녀석" 하면서도 덥석 잔을 받습니다
나의 앨범 속에는 유난히 밤이 많습니다
별이 빛나던 밤이나 눈보라 치던 밤 혹은
너 아니면 죽고 못 살던 밤
그리고 시체 같은 밤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어둑한 길을 혼자 걷는 밤이 좋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학의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부지런해도 아직
문학의 아침이나 문학의 저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밤'은 '문학은 밤'과 같은 말이어서
시인들은 대체적으로 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차마 잊지 못할 밤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도 있기 마련입니다
많은 밤들이 물결처럼 왔다가는 스러져가고
나에게는 문학의 밤만 남았는데
아직도 그 어둑한 길을 혼자 다닌다고
친구들은 일부러 즐거운 술잔을 건네는 것입니다
나는 문학의 밤입니다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면에서 심은 코스모스 길로
꽁지머리 젊은 여자들이 달리기를 한다
그들이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마가목 붉은 열매들이 따라가보지만
올해도 세월은 그들을 넘어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가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 체 만 체다
지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지
나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떼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린다
산그늘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우리나라 백일장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불쌍한 어머니를 패고
할아버지는 벌써 옛날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아직도 골골하신다
이렇게 동란 이후
수십년 고난은 번창했다
그리고 다시 아이엠에프가 지나가자
아버지들은 드디어 픽픽 쓰러지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백일장에서는 지금도 이게 대세다
문학은 아는 것이다
슬픔만한 장사가 없다는 걸
그렇게 슬픔을 우려먹는 즐거움으로
백일장은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도하(Daha)에서
도하에 달이 떴다
서울에서 본 그 달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듯한 사내들이
공항 바닥에서 자고 있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놓고
새우처럼 잠들었다
몸이 나라다
아프리카에도 달이 뜨고
잠들면 꿈도 꾸겠지
반동가리 반도에서 온 사내도
그 옆에서 꿈을 꾼다
휘영청이라는 말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 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미시령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수십년 나는 미시령을 버리고 싶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집을 비우면 바다가 심심할까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서울 같은 건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도 더러 울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그 짐슴 같은 슬픔을 누가 거두겠냐며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해는 네가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냐며
남모르게 곁을 주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바람이나 나뭇뿌리에 묻어둔 채
영을 넘고는 하는 것이다
슬픔을 찾아서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느냐며
이런 나라 사람 아닌 것처럼 겨울 팽목항에 갔더니
울음은 모래처럼 목이 쉬어 갈앉고
울기 좋은 자리만 남아서
바다는 시퍼렇고 시퍼렇게 언 바다에서
갈매기들이 애들처럼 울고 있었네
울다 지친 슬픔은 그만 돌아가자고
집에 가 밥 먹자고 제 이름을 부르다가
죽음도 죽음에 대하여 영문을 모르는데
바다가 뭘 알겠느냐며 치맛자락에 코를 풀고
다시는 오지 말자고 어디 울 데가 없어
이 추운 팽목까지 왔겠느냐며
찢어진 만장들은 실밥만 남아 서로 몸을 묶고는
파도에 뼈를 씻고 있네
그래도 남은 슬픔은 나라도 의자도 없이
종일 서서 바다만 바라보네
사흘 민박
무청을 엮던 주인이 굳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해서
시 만드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으나
노는 가을 며칠을 거저 내주지는 않았다
세상의 시인이 그러하듯 오늘도
나 같은 게 있거나 말거나
주인 내외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읍내로 잔치 보러 가고 나는
지게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지나가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를 잘아는 건 없었으나
별로 해준 게 없었다
돌아가면 이 길로 지구를 붙잡아매든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
스승은 늘 분노하라 했으나 때로는
혼자서도 놀기 좋은 날이 있어
오늘은 종일 나를 위로하며 지냈다
이윽고 어디선가 시커먼 저녁이 와서
그쪽으로 들오리떼 폭탄처럼 날아간 뒤
나는 라면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땀을 흘리며 먹었다
● 고독한 시인의 탄생
이상국 시인은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에는 양양, 속초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동해바다의 그윽한 서정이 흐르고 있고, 윤색이나 과장, 언어 조탁 같은 인위적 색채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구성하는 시가 아니고 자연스럽고 간결하게 흐르듯이 쓰여진 맛이 깊다. 그는 시인 박목월 선생과 두 번의 인연을 떠올렸다. 먼저 스물여섯 살 때다. “강원일보로 등단했는데 그때 박목월 선생과 박남수 선생이 심사를 했어요. 돌아가신 이성선 시인이 박목월 선생이 ‘심상’을 만드셨으니 그리로 한번 나가 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해서 몇 해 후 ‘심상’으로 재등단했습니다. 그때가 1976년이니까 벌써 45년째네요.”
그 후 이상국 시인은 박목월 선생을 서울 원효로에서 한 번 봤고, 얼마 후 라디오에서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첫 시집 낼 때 강원일보에 연락해서 작품을 받았습니다. 신춘문예라는 허울을 쓰고, ‘문밖’이라는 상징으로 시대를 표현하기는 했는데, 난삽하고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결국 시집에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때 박목월 선생께도 죄송했지요.”
1985년에 첫 시집 ‘동해별곡’을 내고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농촌 사회를 재현하면서 거기서 살아가는 이들의 소박한 삶을 따뜻하게 옹호하는 시세계를 이어 간다. 해체 일로에 있던 농촌 현실과 농민의 삶을 형상화한 그의 초기작은 잘 절제된 핍진성으로 평단의 깊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심상’이 진하게 녹아 있어 저항적이고 사실적인 ‘농민시’와는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등에서 선생은 퍽 다채로운 소재와 어법을 통해 농촌 현실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고, 시적 형식의 완결성을 통해 전통 정서나 정신적 경지까지 아우르는 내밀한 욕망을 실현해 갔다. 이러한 지향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철저하게 고독하고 외따로운 곳에서 스스로 터득하고 심화해 간 기율 같은 것이었을 터다. 이상국 시인은 “스승이나 도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문학을 스스로 깨우쳐 갔다”고 떠올렸다.
“문학을 배워 갈 때 강원도에는 ‘갈뫼’라는 동인지가 있었어요. 고교 은사였던 소설가 윤홍렬 선생께서 1969년에 속초 지역 문인들과 함께 ‘갈뫼’를 창간하셨지요. 동인으로는 이성선, 최명길 등 선배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연이나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셨는데 저는 그때부터 조금 겉돌았지요.”
스러져 가는 고향 지역에 대한 애정이랄까. 엄혹했던 역사를 두고 스스로 문학을 만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사를 하거나 따끔한 말씀을 주실 분이 안 계셨다. “그게 오히려 제 나름의 방법과 생각을 정리해 가는 길도 되었으니 꼭 손해 보지는 않은 듯해요. 어쨌든 생래적으로 제 안에는 농경 정서와 산천에서 일하는 사람의 정서가 들어와 있었고, 거기에 현실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결합하면서 시세계를 일구고 지탱해 온 거지요.”
● 원만해진 마음과 품
초기 시에 담겼던 농경 사회의 리얼리티는 후기로 오면서 인생철학을 담은 실존적 세계로 이월해 간다. 삶의 근원에 대한 섬세한 사유와 자연 사물에 대한 미시적 관찰 같은 데로 흘러온 것이다. 이처럼 ‘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후로 근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시인 자신의 세계관이나 신념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과 풍경과 순간을 스스로의 내면과 견주고 어울리게 하는 과정에서 발원돼 간다. 그래서 손쉬운 의인화나 안이한 계몽적 알레고리로 떨어지지 않는 특유의 서정적 긴장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초기 시가 현실에 대한 부딪침과 기다림에서 나왔다면,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인생을 다르게 본 결과를 후기 시라고 했다. “누구는 불교에 바탕을 둔 관조나 달관으로 설명했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는 그저 나이 들면서 사물이나 순간을 편하게 바라보자 하는 생각으로 시를 썼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안에 선적 직관도 들어가 있게 된 거지요.”
쉰다섯에 절집에 들어가 10년 있었으니 알게 모르게 불교와 친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들도 비교적 원만해지고 마음도 편안해진 것 같다는 거다. “품을 키워 가면서 단정한 쪽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상국 시인은 10년 동안 만해마을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수많은 작가를 만나고 돌보고 그들과 함께했다. 작가들은 한결같이 외롭고, 소소한 일에 좋아하고, 대체로 고독이나 슬픔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 사람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고 술회한다.
그렇게 지역에서, 사람의 변방에서 살아온 선생이 이제 커다란 규모의 한국작가회의를 맡았으니, 그 느낌은 어떨까? 한국작가회의라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거쳐 권위주의 정부 때 저항의 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했지만, 지금의 민주 정부에서는 역할이 최소화될 가능성이 혹시 있지 않을까?
● 청정한 그만의 세계
“40년 전은 시절이 엄중했고 많은 작가가 감옥에 갔지요. 이제 많은 시간이 흘러 전선이 뚜렷하지 않고 작가회의의 정체성도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역’이라는 의제나 소통과 배려의 문제도 크게 대두했고요. 물론 반칙이나 불평등이나 폭력을 해소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억압들과 싸워야지요. 하지만 싸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겠는가, 당연히 좋은 세상을 향해 문학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유 때문에라도 이상국의 시는 초월이나 탈속 편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은밀한 성스러움과 인간 사회의 실물성을 동시에 탐침하면서 선생은 삶의 감각과 성찰을 끊임없이 결속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법을 온몸으로 긍정하면서 그 안에서 인간이 상실한 삶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하고 노래하는 것이 선생 스스로 한 세상을 건너가는 오래된 방법이 돼 줄 것이다.
“시집을 일곱 권 냈는데 6년 터울 정도였어요. 조만간 동시집이 나올 거예요. 무안하기는 한데, 모서리는 닳고 숨어 있던 부드러움이 나온 결과가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어쨌든 제 시가 가지는 촌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노래해 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상국 선생의 시를 통해 사라져 가는 것들의 잔영을 증언하는 시인의 따뜻하고도 고단한 운명을 만나게 될 것이다.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신성한 순간의 마지막 기록자로서, 선생은 늙어 가는 눈으로 보는 한계가 있겠지만 바로 그 한계에 충실하면서 청정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 갈 것이다. 분주하게 속초와 서울을 오가며 감당해 낼 작가회의 이사장으로서의 큰 행보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