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구주보패시의 간큰 소매치기

<STYLE>P{margin-top:2px;margin-bottom:2px;}</STYLE>   제 6 장 구주보패시의 간 큰 소매치기 두 개의 시커먼 구슬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호두알만한 흑구슬인데, 그것은 기괴하게도 해골의 모습이었다. 그 해골 구슬의 이름은 흑룡마주(黑龍魔珠)였다. 떨어지는 흑룡마주를 움켜쥐는 손이 있었다. 크기로 보아서는 분명히 사내의 손이다. 굵은 손가락 마디와 두툼한 근육이 붙어 있는 성인 남자의 손이다. 그런데 이 손의 색깔과 매끄러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백옥처럼 희고 유리처럼 매끄럽고, 수정처럼 투명한 손……. 그 어떤 여자도 이보다 더 곱고 매끈한 피부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그 손의 주인이 험한 산을 타면서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엽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황당한 일인 것이다. 그 소수의 주인은 커다란 상수리 나무 아래의 풀밭에 한 손으로 팔베개를 한 채 누워 다른 한 손으로 흑룡마주를 잡은 채 보고 있었다. 그 눈은 검은 동공이 없는 백안이다. 이상의 표현은 이 청년의 오른쪽에서 보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왼쪽에서 보자면 그 정반대라는 것을 천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흑백역사라는 해괴한 별호를 가지고 있는 인물. 구바우의 호피를 걸친 당당한 체격 옆에는 중간 크기의 고동색 나무 활이 보인다. 제3회 천궁영웅대회가 막을 내린 것도 어느덧 두 달이 되어간다. 그동안 구바우는 숱한 사람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천궁대영호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은 그와 친교를 트길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구바우는 비로소 유명해진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이 네 명의 약혼녀가 한꺼번에 생긴 것도 그 와중에 벌어진 불상사(?)다. 다행히 그 네 명의 여자들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새로 사귀고 탐색하고 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매일 매일을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지낸다는 것은 원래 고독한 생활이 몸에 배인 사냥꾼 출신인 구바우에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세월이 약인 법이다. 석 달 정도 시간이 지나자 처음같은 열광은 서서히 가라앉게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보면 환대하지만 무작정 열광하고 달려들지는 않는다. 덕분에 이제는 혼자 조용히 쉴 여유도 찾게 되었다. 헌데 구바우가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쉬고 있을 때였다. 쿵! 쿵……! 지축이 울리는 굉음이 들리면서 거대한 몸집에 상체를 훌렁 벗은 구리 동상 같은 거인이 나타났다. 그는 청동일도룡 철목풍이었다. “하핫! 대형! 이젠 명실상부한 유명인사가 되셨는데 한가하시구려?” 철목풍은 구바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헌데 그의 어투는 뭔가 이상했다. 대형이라니? 철목풍은 분명 구바우보다 나이가 십년은 연상이다. 또한 그가 지닌 신분 엄청나다. 그런 그가 구바우를 대형이라 부르는 것이다. 대형이란 호칭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부르는 존칭이거늘!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궁영웅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철목풍도 당연히 참가했다. 모든 관외 사람들은 그의 우승 확률이 십 중 아홉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막강했고 그만한 자부심도 있었다. 승승장구하여 4강에 올라서고 나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패배의 쓴잔을 맛보았다. 그는 오십 년 만에 개최된 천궁영웅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철목풍은 일년 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하였으며, 재물을 아끼지 않고 명궁(名弓)을 구했다. 그리하여 필승의 신념을 안고 천궁영웅대회에 또다시 출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4강전에서 구바우와 맞붙어 패배했고, 3위 자리를 유지했다. 속 좁은 위인 같았으면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목풍은 대인(大人)이었다. 그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수긍했다. 철목풍이 지난 일년 간 기울인 노력은 실로 뼈를 깎고 살이 축나는 극한의 수련이었다. 앞으로도 다시는 이만한 수련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졌다는 것은 그릇이 다르다는 반증임을 철목풍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철목풍이 그의 애병기인 청동언월도(靑桐偃月刀)를 들고 대막폭풍탑의 절기를 사용하여 죽기살기로 싸운다면 그가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철목풍은 그런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는 졌고 상대는 그보다 강했다. 천궁영웅대회의 3위 입상자로서 철목풍은 나이를 떠나 구바우에게 대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구바우다. 그는 철목풍이 대형이라 부르는 것을 방관하고 자연스럽게 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구바우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 자네야 어딜 가든 대접을 받겠지만 나야 어디 그렇겠나?” 철목풍은 싱긋 웃었다. “천산비연 담 낭자는 참으로 운이 나쁜 여자요. 작년처럼 대형과 내가 준결승에서 붙었으면 내가 3등을 하고 담 낭자가 전처럼 준우승 자릴 차지했을 텐데 말입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자네가 그래서 3등을 했잖아. 올해에는 결승에서 나와 붙어 만년 3등이란 오명을 씻고 준우승을 했으니 다행이 아닌가?” 구바우는 천산비연 담옥상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담 낭자라…… 만만하지는 않았다네. 다시 붙는다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발전하는 사람이지. 지금 아무리 강하다 해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이 정체된 사람이라면 무서울 것이 없다네.” “하핫! 그럼 대형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외다. 볼 때마다 강해져 가니 그 끝을 모르겠소이다.” 철목풍은 일어나며 옆에 뒹굴고 있는 구바우의 활을 잡았다 “자～ 이제 그만 사냥을 가봅…….” 그러다가 그는 입을 다물며 눈을 부릅떴다. 활의 엄청난 무게 때문이었다. ‘작아 보이거늘…… 이천 근이 넘는다! 삼 갑자의 내공이 있어도 쉽사리 다룰 수 없는 무게이거늘…….’ 가볍게 활을 들려던 철목풍은 떨어뜨릴 뻔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려 두 손으로 활을 받쳐들면서 경이로운 눈길로 구바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껏 무수한 무사들이 병기를 사용해 왔다. 그중에는 무거운 중병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렇지만 병기의 순수한 무게만 이천 근이 넘는다는 것은 무도(武道)의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공력이 고강한 고수자라면 들고 휘두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수련 과정이 아니라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생사의 결전을 치를 바보는 없을 것이다. 구바우는 그런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냥꾼이니까 위험하지 않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천산의 맹수들은 다른 곳의 짐승과는 다르다. 단순히 체격만 큰 것이 아니라 더 빠르고 더 힘이 셌다. 무공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무인이 아니고서는 천산에 사는 범이나 곰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사냥을 당하기 일쑤인 것이 그동안의 불문율이었다. 천산대호의 빠르기는 강호인이 사용하는 평범한 경공신법은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 천산설웅의 앞발질에 버틸 수 있는 무사는 금종조 같은 절정의 외가기공을 극성으로 연마한 철인의 경지에 올라선 사람이나 감당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호신강기 정도는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사람의 인육을 북북 찢어 간식으로 먹어 버리고 마는 것이 천산에 사는 맹수들이었다. 열 살 때부터 구바우는 천산의 맹수들을 사냥한 천산제일의 엽부였다. 천궁영웅대회에 들고 나온 활도 분명 철목풍이 힘겹게 들고 있는 이 활이었다. 즉, 실전용이지 연습용 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말은 구바우에게 걸리면 무림고수라 할지라도 짐승처럼 사냥당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바우는 활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가 보세나. 오늘은 자네가 창잡이를 하면 천왕호(天王虎)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군.” 철목풍은 새삼스런 눈으로 구바우를 바라본다. ‘저렇게 가볍게……?’ 그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우고는 앞서가는 구바우의 뒤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제길～ 관외무림에서 사냥하는 데 청동일도룡을 창잡이로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형밖에 없다는 사실만 알아주쇼!” *** 구바우와 철목풍이 활을 들고 눈 덮인 천산 최고봉인 승리봉의 산등성이를 타고 있었다. 철목풍은 긴 장창(長槍)을 비껴 쥐고는 앞서가는 구바우에게 소리쳤다. “대형! 이젠 호랑이 사냥 따윈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천궁대영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새외무림의 많은 호걸들이 따를 텐데 말입니다.” 구바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 나갔다. “세상은 자네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게야. 세상 사람들도 자네처럼 좋지만은 않을 것이고…….” 철목풍은 앞서가는 구바우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땐 저 사람이 정말 이십 세밖에 안 된 사람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문득 앞서가던 구바우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세세히 살폈다. 철목풍은 그의 등뒤에 다가가며 물었다. “천산대호의 발자국이라도 발견하셨소이까?” 구바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이상하군.” 그가 바라보고 있는 눈 덮인 바닥에는 호랑이 발자국이 보이고 있었다. 고양이 발자국을 수십 배 부풀려 놓은 크기였다. 철목풍은 되물었다.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 구바우는 계속 발자국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놈은 천왕호(天王虎)야.” 철목풍은 흠칫했다. “천왕호라면?” 천산산맥에는 만 삼천 개의 봉우리가 있다. 그 산봉우리는 각자 천산대호의 영역이다. 천산대호가 다른 천산대호의 영토에 침입하는 법은 없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범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한번 싸우면 대개 두 마리가 다 죽는다. 하지만 천왕호는 다르다. 일반 천산대호의 몸무게는 85관(340Kg) 정도로 일반의 범보다 한 둘레는 컸다. 그래서 천산대호의 호피 값은 일반 범의 두 배 이상이다. 천왕호는 그런 천산대호보다 한 둘레가 더 큰 천산산맥의 제왕인 놈이다. 천산산맥 전체가 천왕호의 영지로써 뭇 범들은 놈이 나타나면 꼬리를 말고 피신한다. 구바우는 일어서며 멀리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몸무게가 백 관(400Kg)이 넘고 한 번의 도약으로 십 장을 뛴다네. 놈의 청각은 십리 밖의 소리도 감지할 수 있고, 발톱에 걸리면 철판도 뚫어 버린다네. 평지에서라면 모를까, 산중에서라면 자네 같은 일류고수도 당해 낼 수 없을걸세.” 철목풍은 짐짓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대형은 놈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니오? 대형에겐 당할 수 없지만 소제가 이래봬도 천산대호 열세 마리를 잡은 당당한 호렵부(호랑이 사냥꾼)외다!” 구바우는 그런 철목풍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호오～ 그런 사람이 일전에는 천산대호에게 쫓겨 도망갔나?” 철목풍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그거야…… 놈들이 세 마리나 한꺼번에 덤비는지라…….” 구바우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됐네, 이 사람아.” 철목풍은 헛기침하며 얼른 화제를 바꾼다. “천왕호나 잡으러 가시지요?” 구바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지 모르지만 천왕호가 쫓기고 있으니 잡기가 어렵겠는걸?” 철목풍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천왕호가 쫓기다뇨? 천산은 물론이고 세상 그 어떤 동물도 천왕호가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는뎁쇼?” 구바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천왕호의 보폭을 보라구.” 그의 손짓에 따라 보니 눈 덮인 산등성이에 호랑이 발자국이 멀찍이 보이고 있었다. 철목풍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굉장한데요?” 구바우는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천왕호의 여유로운 보폭은 항상 삼 장을 넘지 않지. 천산에서 천왕호에게 최대의 힘을 사용하여 뛰게 만들 짐승은 없는데…… 지금 이놈은 거의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있어. 즉,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단 말이지.” 철목풍은 반론을 폈다. “먹잇감을 쫓고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구바우는 피식 웃었다. “먹잇감이 뒤에 있나 보지?” 철목풍은 얼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구바우는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천왕호의 앞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네. 그 말을 뒤집으면 천왕호가 먹잇감이라는 소리겠지.” 철목풍은 입을 쩍 벌렸다. “천왕호가…… 먹잇감?” 구바우는 천산 전역에서 엄청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이 아무리 높은 강호의 고수라도 느낄 수 없는 사냥꾼만의 육감이었다. 구바우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철목풍과 함께 바람 방향을 피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풍향(風向)과 지형(地形)이 안 좋으니 피하세. 이곳에 있다간 사냥을 하기 전에 사냥을 당하기 십상일걸세! 바람이 바뀌려면 삼 일은 걸리겠고, 천왕호가 삼 일 동안 잘 버텨 주었으면 좋으련만…… 삼 일 후에 다시 오세나. 그땐 참으로 보기 힘든 일을 겪어 보게 될 테니까 말일세.” 구바우는 산을 걸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잘하면 금 노인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겠군.” 철목풍은 뒤를 따라 내려오면서 되물었다. “금 노인이라면?” 구바우는 바람 방향을 살피면서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소유했는데도 여전히 황금에 미친 낙타 노총각이라네.” 철목풍도 그 이름은 알고 있는 듯했다. “황금에 미친 낙타라면…… 황금귀타(黃金鬼駝) 금적산(金積山)?” 구바우는 풍향을 따라 서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웃어 보였다. “그 웃기는 노총각이 일전에 어떤 짐승 한 마릴 사로잡아 주면 황금 십만 냥을 준다더군.” 철목풍은 입을 쩍 벌렸다. “짐승 한 마리에 황금 십만 냥? 그 황금귀신이 말입니까? 설마…… 용이라도 잡아오라는 것은 아니겠죠?” 구바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슷하군. 사신(四神) 중 한 마리니까…….” *** 천산남로와 천산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하나의 시장이 있음을 천하의 상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구주보패시(九州寶貝市). 천하의 모든 보물이 모이는 시장이란 뜻이다. 서역과 중원을 잇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비단길이다. 그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의 교차지점에 있는 이곳은 철저한 이방지대였다. 세상의 모든 인종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서로가 사고 파는 장사에는 문화나 언어, 피부색의 차이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오직 황금으로만 대화가 오고가는 곳이다. 이곳의 치안은 천산파가 맡고 있었다. 천산산맥으로 들어오는 서역의 대상들과 중원에서 오는 상인들은 마적(馬賊)집단과 녹림채(綠林寨)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안전한 통과와 구주보패시까지의 안전은 철저하게 천산파의 무사들에게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그 대가로 천하의 상인들은 일정액의 황금을 규모에 따라 보호비로써 천산파에 지급하고 있었다. 그 금액이 얼마인지는 오직 천산파 장문인 무적철도 담천강밖에는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그 금액이 상당하다는 것은 요 삼년 사이에 드러나고 있었다. 천궁영웅대회를 삼년이나 연속하여 천산파 단독으로 개최한 것만으로도 그 재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관외무림 전체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앞으로는 오년마다 열기로 했지만 천궁영웅대회의 개최권자에게 대회 비용의 절반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강호무림에 무수하게 난립해 있는 강호방파들의 생활에 대해서 얘기해 보아야만 한다. 칼 한 자루 옆구리에 차고 강호를 활보하면서 무공 수련하는 강호인들은 돈이 필요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도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세상에 혼자서 떠돌면서 낭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 큰돈은 필요 없으리라. 하지만 자기 사람을 부리고 세력을 키워 강호무림의 명문방파로 이끌기 위해선 사람보다도 황금이 우선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구파일방 중에서도 태산북두라고 알려진 소림사를 예로 들어보자. 제아무리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 스님들이라지만 돈이 없으면 산나물이나 캐고 칡뿌리나 씹으면서 불경을 외고 무공을 연마해야만 할 것이다. 불상이 낡거나 대웅전이 부서져도 고치거나 수리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단청이 보기 싫게 벗겨져도 새로 칠할 물감이나 붓을 어디서 장만할꼬? 다른 이단의 무리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막아야 하는데, 무기인 계도나 선장은 무엇으로 장만한단 말인가? 적수공권으로 싸우거나 각목을 휘두르는 도리밖에는 없는 일일 것이다. 다 해진 천으로 기워 만든 가사를 입은 스님을 고승이라고 우러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그게 소림사이고, 중원불문의 성역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돈은 세속에 있지 않은 소림사 같은 사찰에도 반드시 필요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른 일반의 강호방파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무공만 높다고 해서 문하생이 몰리고 세력이 확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제각각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강호방파들은 일정한 수익금이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호에서 명문정파로 명망이 높은 곳에서는 문하생들이 밖으로 나가서 각 도시에 무술도장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무술을 배우고자 하는 문하생들은 적당한 입관비와 수련비를 지불하고서야 입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익금 중 일부는 본 파(本派)로 진상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런 수익금이 명문정파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 있었다. 이름없는 별볼일 없는 군소방파일수록 자금 조달에 있어서 애를 먹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 대저, 광명정대한 백도정파와 잔인독랄한 흑도사파의 차이는 바로 조직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자금을 어디서 차출하는 것이냐에 따라 갈라진다. 정당한 방법으로 무리 없이 자금을 조달하면 정파무림에 속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조직 자금을 채워 넣는 인물들은 흑도사파에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맞는 말이다. 정당하게 노력해서 돈을 벌어 정당한 곳에 쓰면 그게 좋은 일이고 좋은 사람이다. 타인을 핍박해서 강제로 돈을 빼앗아 흥청망청 유흥비로 날린다면 그게 좋은 일일 수는 없고, 그런 사람은 마음이 검은 것이니 흑도사파가 아니고 무엇이랴. 여하튼, 결론을 내리자면 황금이란 것은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다. 돈 없이 강호무림에서 세력을 키워 보려는 자는 미친 사람이거나 바보 천치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주루나 객잔, 전장, 표국, 그외 돈을 벌 수 있는 상업은 싫든 좋든 강호의 세력이 비호해 주거나 직접 운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천산파는 지리적으로 볼 때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꾸라지도 흙탕물이 있어야만 사는 법이다. 판잣집만 즐비한 빈민촌에서 제아무리 고급 장사를 해봐야 그네들에겐 동화책 속의 만찬일 뿐이다. 황금도 돈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비단길을 따라 천산산맥을 왕래하는 상인들이야말로 황금덩어리 재신(財神)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네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니, 무엇이건 최고급으로 소비하고, 최고급으로 입고, 최고급 침실에서 잠을 자야만 한다. 천산산맥 인근 이백 리 이내에는 마적집단이건 녹림도당이건 철저히 토벌해서 씨를 말려 버리고 보호비를 받으니 그 수입도 막대하건만 천산파는 요소요소에 주점과 기루, 객점, 다실까지 차려 운영하니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아주 쉽게 황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고 황금이 출렁거리는 곳에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황금이 몰려들게 마련이다. 구주보패시라는 시장은 그 결정판이었다. 이곳에는 세금을 매기는 세무관리도 없고, 천산파 덕분에 날강도 같은 건달패도 없다. 달리 뜯기는 곳이 없으니 장사해서 남긴 돈은 몽땅 상인들의 순수입이 되니, 장사꾼들의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설시장이라면 명나라에서도 아무리 천산이 멀다 한들 세무관리를 파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 일에 한 번씩 열리는 뜨내기 시장이니 이곳은 어느새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한 달 전에 평온하던 구주보패시에 난리가 났다. 서역과 중원을 오가는 대상인들이 장사를 하는 곳이니만큼 평소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진귀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에는 상인들끼리 모여 도매상을 차린 것인데,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천하에서 돈푼깨나 있는 부자들이 그런 물건을 직접 구입하려고 구주보패시까지 오게 되었다. 장안(長安)에서 사는 것보다 값이 쌌으며, 우선은 신용을 우선하는 대상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가짜나 불량품은 발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주보패시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소매상들이 더 많아지게 되어 버렸다. 여기 오는 손님들이 또한 평범하지가 않았는데……. 영락제가 일으켰던 ‘정난의 변(靖難之變)’에서 그의 연왕부(燕王府) 소속의 막하부장이었던 이경국(李經國)이란 위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젊은 소장파였지만 주인을 잘 만나 출세를 거듭하여 당금에 이르러선 유주자사(柳洲刺史)의 자리에 올라 있는 고관이다. 그가 물건 좋다는 소문을 듣고 거금을 마련하여 애첩을 끼고 구주보패시에 들어왔다가 가진 돈주머니를 몽땅 소매치기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명나라 황실의 인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장이었는데, 그런 불상사까지 일어났으니 상인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관리들이 조사를 한답시고 들이닥쳐 추궁한다면 조세포탈 혐의는 물론이고, 국가간 교역시에는 황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으니 그것도 걸고넘어진다면 황실불경죄에 해당될 수 있다. 까짓 거 장사 안 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워낙 이익이 남는 장사다 보니 때려치우기가 쉽지 않다. 상인의 근본이란 원래 이익금이 남는 곳이면 전쟁터라도 마다하지 않는 속성이 있는 족속이 아니던가 말이다. 명나라 조정에 밉보였다간 중원과 서역을 오가는 대상교역(隊商交易)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해서, 결국에는 잃어버린 금액의 두 배를 물어주고 이경국이 사고자 했던 물건마저 덤으로 안겨주어 무마시켰다. 그러고 나서 시장 입구에 팻말을 써 붙였으니……. <소매치기 주의. 돈이 털려도 책임지지 않음.                      구주보패시 시장 연합 상인 일동> 그런 웃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는데, 상인들이 어떤 위인들인가? 자기 수중에 제아무리 많은 황금이 있다 해도 동전 한푼의 이익이 남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장사를 해서 이문을 챙겨 오고야 마는 사람들이다. 손해를 보고 가만있을 리가 없다. 황금 오백 냥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각출하여 소매치기 현상수배를 내리게 된다. 잡힌 소매치기에겐 두 배의 금액을 보상받거나 아니면 해적선의 노를 젓는 노예로 팔아 버리겠다는 극언까지 부연 설명되어 있다. 황금 천 냥이나 있는 부자가 뭐가 아쉬워서 소매치기를 하겠는가? 잡히는 소매치기는 천상 해적선 노 젓는 노예로 팔려가야 할 텐데 그거야말로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다. 햇빛도 들지 않는 컴컴한 선실의 밑바닥에서 두 발은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을 맞아 가면서 노를 저어야 한다. 하루에 주는 음식이라곤 주먹밥 세 개와 된장국이 전부라고 한다. 탈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세상의 그 어떤 감옥보다 더한 곳이 바로 해적선 노 젓는 노예들이 있는 곳이다. 거기서 나왔다 한들 망망대해(茫茫大海)니 물고기 밥밖에 더 무엇이 될 수 있으랴. 그런 현상포고문이 나붙자마자 그나마 존재하던 좀도둑까지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도둑질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 잡혀 봐야 징역 몇 년 살든가 매맞고 내쫓기는 것이 다이니, 도둑이건 소매치기건 직업으로 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걸리기만 하면 아예 인생을 종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 사는 곳이 여기밖에 없고, 훔칠 물건이 여기밖에 없는 것은 아니니 차라리 덜 위험한 곳으로 옮겨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난 한 달 간은 아주 평온했다. 작은 절도 사건조차 아예 없었던 것이다. ***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에 못지 않게 구주보패시는 북적대는 인파로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구주보패시를 유유자적 누비며 기웃거리는 특이한 사람 하나가 있었다. 청년은 이제 갓 이십 세쯤 되어 보였는데 일신에는 호랑이가죽옷을 걸치고 있고 손에는 중간 크기의 활을 들고 있었다. 긴 장발은 허리께까지 치렁이는데 뒤로 넘긴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해괴하다. 정확히 머리카락의 반은 검고 반은 희었다. 드러나 있는 손도 오른손은 희고 왼손은 시커멓다. 그는 다름아닌 구바우였다. “자…… 고양이 중에서도 대왕 고양이를 잡으려면 보통 화살 갖고는 어림도 없겠고…… 재질이 강철로 만들어지고 화살촉이 금강석같이 단단한 것이어야만 그놈을 어찌해 볼 수 있겠는데 말씀이야.” 무슨 일인지 구바우는 특별한 사냥을 위한 특별한 화살을 구입하려고 시장에 내려온 듯했다. 그도 여기선 꽤나 유명한 듯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알은 체를 하고 있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 여자들은 구바우의 오른쪽에 서 있는 여자들이다. 남편과 지나가던 부녀자들도 얼굴을 붉히며 구바우를 곁눈질하기 바쁠 정도였다. 천궁대영호! 저 위대한 북방대초원의 영광을 되살리는 명성은 구바우만 별볼일 없이 생각할 뿐이지 천산 일원과 관외 북방무림계에선 살아 있는 신화로 추앙할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칭기즈 칸 테무친의 재래(在來)라고 목청을 돋우어 말할 지경이었다. “어이그～ 한 달 전에는 소매치기를 잡는답시고 그런 야단법석을 떨어 사람이 없더니만 오늘은 웬 사람이 이렇게 많냐?” 건성으로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해보이던 구바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구바우의 시선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후후, 소매치기가 없어졌다 했더니…… 하필 내 눈에 보이다니…….’ 눈가에 서리는 푸른 안광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바우가 목표로 한 사냥물을 발견했을 때의 눈빛이었다. ‘소매치기한테 걸린 현상금이 황금 오백 냥이렷다? 천산에서 호랑이 열 마리를 잡으려고 고생하는 것보다 나을라나?’ 구바우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앞발가락으로만 옮겨지는 그의 발걸음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 한 명의 빼빼 마른 금포노인이 조용히 옷깃을 여민 채 지나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구주보패시에서 적당한 비단옷에 수수한 치장을 한 금포노인의 모습은 눈에 확 띄지는 않았다. 조용한 발걸음과 조신한 행동과는 달리 금포노인의 신체 중 한곳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흰자위는 빼고 검은 동공만이 재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던바, 눈동자가 한곳에 멈춰지면서 금포노인의 입술에 미묘한 회심의 미소가 서렸다. ‘물건이네…….’ 금포노인의 오른쪽에는 여자들의 장신구나 노리개를 파는 상점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뚱뚱한 체구의 중년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금포노인의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기에 그의 시선이 옆의 뚱보부인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살집이 터져 나올 듯하게 살이 찐 중년부인의 얼굴은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데 체격만큼의 넉넉함이 보이는 부잣집의 마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상하게 치장된 진열대 위의 물건들은 결코 평범한 쇠붙이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금은으로 주조된 데다가 각종의 보석이 치장되어 있는데, 그 보석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목걸이, 팔찌, 반지, 귀고리, 옷에 다는 노리개 등이었다. 단순히 보석의 가치만이 아니라 세공(細工)의 미적 감각이 더해져 예술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품격 높은 고가품인 것이다. 아무리 작은 보석반지라 할지라도 황금 열 냥의 값어치가 있었다. 그것을 고르는 중년부인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여섯 개의 반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진아(眞兒)의 결혼 예물을 맘에 드는 것으로 고르려 했는데…… 정말 오길 잘했는걸? 소문 이상이야. 물건이 완전히 특상품만 있군 그래. 그노무 영감탱이가 첩년이나 끼고 다닐 줄 알지, 나한텐 이렇게 좋은 곳은 구경도 시켜 주질 않으니…… 청지기 방 서방이 말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이리 물건이 좋은데다가 값까지 싸니…….” 중년부인의 얼굴에는 흐뭇함의 기색이 역력하다. 구주보패시에 대해서 그동안 소문만 듣다가 처음 온 손님임에 분명했다. 나중에 알게 될 일이지만 이 뚱보 마나님은 유주자사 이경국의 본마누라, 정실부인이다. 이름은 장엽방(張葉芳)이라 하거니와 전형적인 내조형 알뜰살뜰 주부다. 유주자사 이경국에겐 딸이 하나 있던바, 나이가 꽉 차 시집갈 때가 되었다. 얼굴 이쁘고 몸매 우수하다면 까짓 거 최고권력자의 반열에 있는 아비의 이름만으로도 혼처가 줄을 설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 딸 하나 있는 것이 외모가 영 시원치가 않았다. 얼굴은 마마곰보에 몸은 아름드리 절구통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돈이나 왕창 써서 황금으로 도배하여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금액이 만만치 않으니 안방마님께서 고민하고 있던 차, 청지기를 맡고 있는 하인 우두머리 방 서방이 넌지시 아뢰는 말씀에 귀가 번쩍 뜨인다. 한 달 전 주인님과 첩년을 모시고 천산에 갔다온 얘기를 했던바, 물건이 매우 우수한데다가 값이 상당히 싸다고 희희낙락하던 주인님과 첩년의 말을 전해 올렸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번화한 시진을 물어 본다면 세 곳을 말할 것이다. 전통적인 보수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이라면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꼽을 것이다. 지금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년인들은 남경(南京)이 최고라고 말할 것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거기에 도읍을 정해 활동했기 때문이다. 지금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물어 본다면 주저 없이 북경(北京)을 꼽게 된다. 과거에는 북평(北平)으로 불렸던 중원강북의 요지로, 원나라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락제가 연왕(燕王)이었을 시절, 그의 근거지인 연왕부가 있던 곳이다. 한창 제국의 수도로 자리를 굳혀 가는 북경의 번화함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곳은 그 세 곳인데, 중원의 서북방 끝인 옥문관을 넘어서 구주보패시 같은 시장이 있다는 것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설혹, 소문을 들었더라도 과장됐거나 싸구려 물품만 취급하겠지 하고 짐작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와 본 사람은 알게 된다. 단 일각만 돌아다녀 본다면 깔려 있는 물품의 품질이 뛰어남에 경악을 하게 된다. 도무지 한 가지라도 싸구려나 질 나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주자사 이경국의 안방마님도 북경에 비해 같은 품질의 물건이 삼 할이나 싸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랬는데……. ‘딸년 혼수를 준비하러 왔나 본데…… 전대는 두둑하겠지?’ 금포노인의 내심은 흐뭇함에 절로 훈풍이 감돌고 있었다. 한 줄기 무형잠력이 일어나 진열대 앞에 늘어선 채 물건을 고르고 있던 일곱 명 정도의 사람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밀어 버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이쿠!” “어어…… 밀지 마!” 촘촘히 몸을 밀착시킨 채 물건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던 일단의 행인들은 한쪽이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젊거나 건강한 체력을 지닌 사람이야 얼른 일어설 수 있었지만 뚱뚱한 중년마님 장엽방은 제 힘으로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 몹시 힘겨운 일인 듯싶었다. “이런…… 괜찮으시오?” 부드러운 인상의 금포노인이 손을 내밀어 잡아 일으켜 주자 상대의 나이와 훈훈한 인상에 장엽방은 긴장감을 버리고 말았다. 아주 눈 깜박할 사이였다. 오른손으로는 장엽방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왼손이 그녀의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나온 것은 가히 찰나적인 일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어르신.” 오히려 장엽방의 깍듯한 절까지 받으면서 금포노인은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