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미카엘 신부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3일 내내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빵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오늘 복음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해야겠습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뤄집니다. 지금까지 성찬의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오늘 복음은 말씀의 전례에 관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언론매체, 대중매체에서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 중에는 진리를 거역하고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거짓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지요. 물론 평화방송은 예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육적인 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좀더 편리하게 살고, 삶을 좀더 윤택하게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살찌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은연중에 세상의 지식들은 돈이 최고라고, 건강이 최고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육적인 지식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년 전 <다빈치 코드> 같은 반그리스도교 서적들이 유행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짓종교로 몰아세우는 뉴 에이지 계통의 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가 팔렸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들도 접하고 나서 반신반의한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거짓된 말씀에 속아 넘어가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적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논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복음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는 사람들입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믿음으로 듣는 말씀은 용서를 가능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며, 내적 평화와 사랑이 넘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게 이끌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실천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데 어찌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천주교 부산교구 김영훈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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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과 함께 머뭅니다. 제자들이 갈라지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그 빵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때로는 힘들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힘든 경우는 상대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고, 위로가 될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빵이 먹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배고파야 빵을 먹고, 배고픈 삶을 살아야 빵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로보다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에 배고파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돈, 명예, 권력에 배고파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돈을 배고파하되 어떻게 쓸 것인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되 그 명예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되 그 권력을 더욱 올바로 힘 있게 사용하려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신앙적 배고픔은 돈과 명예,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을 하느님 안에서, 이웃들과의 나눔 안에서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험합니다.
나를 위한 배고픔을 ‘우리’를 위한 배고픔으로, 하나의 빵이라도 함께 먹는 만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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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생명의 빵”(35절, 48절),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순명으로 실행하는 사람,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들 안에 머무를 것”(54절, 56절) 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케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대담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활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 “성령으로 기름칠 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는데,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음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임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먹는 ‘말씀의 영성체’를 알아듣게 됩니다. 곧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에제키엘서(3,1-3), 예레미아서(15,16), 요한묵시록(10,8-10)에는 명령에 따라 말씀을 ‘먹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쪼개진 말씀을 먹는 것”으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히에로니무스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뿐 아니라, 성경 독서 중에도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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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제가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ㅡ 부활 제3주간 생명의 빵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