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면 선원마을
학가산(鶴駕산 下柯산) 보문사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에 등장한다.
담연당 도명 대선사
의상대사
보조국사 지눌 (상 보문사 하 송광사)
주련은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한
지눌스님의 수심결에 실린 게송
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나
다생의 습기가 깊고,
바람은 멈췄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상이 그래도 침범한다.
돈오점수
돈오돈수
성철스님은 돈점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반야용선 타고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고해를 건너 아미타부처님
맞아주는 피안의 극락세계로 간다.
요사채가 이층으로 방이 많은 일종의
아파트. 문중 재실 닮은 건축.
송재중 선생님 촬영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앞에는 금모래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소월
무지막지하게 4대강을 파헤치고 보를 막아 물의 흐름을 막고 정체시켜서 강력한 독소를 발생시키는 녹조로 억조창생을 죽였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은 세계적으로 찾기 어려운 모래 하천이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여도 좋은 강이다. 4대강 토목공사로 필터 기능을 하는 모래를 파혜쳐 영남 사람이 마시는 강물이 썩고 물고기가 떼죽음하였다. 심지어 강 주변에서 생산된 쌀에도 녹조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독소가 검출되었다. 상류로부터 토사 유입을 막으려고 영주댐 건설로 수량이 줄고 모래가 내려오지 않고 토사가 쌓여 억만년 선경인 모래강, 내성천의 경관도 많이 훼손되어 간다. 지율(知律)스님이 외로이 저 강을 거닐며 모래강 내성천을 사진 기록으로 담았다. 택리지에 상주의 다른 지명이 낙양이고, 낙양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서 낙동강이라 한다고 했다. 봉화의 옛지명이 내성이기에 내성천이라 했다. 낙동강 최상류의 석포, 내성천의 회룡포, 낙동강의 하회마을은 산과 강이 어울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태극을 이루는 지형이다. 나의 처가가 있는 석포에는 아연제련소에서 독성 물질을 낙동강에 흘려보낸다. 낙동강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상주의 경천대도 낙동강의 대표적인 경관인데, 모래가 많이 파헤쳐졌다.
1563년 퇴계선생 63세 글씨
한음 이덕형 9세손 용궁현감 이의익 1831년
동원 정호선 6세손 정재원 시
15. 삼가 선몽대 시에 차운하다 謹次仙夢臺韻
옥 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누대에 비치는데, 瓊雲璇月映臺虛
끼친 글씨를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遺墨新劖畵裏如
매양 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짓고자 하니, 每欲登臨仙夢做
주인이 나를 기다려 성근 주렴을 걷어치도다. 主人待我捲簾疏
*나의 9세조 한음공(漢陰公; 이덕형)의 시가 있지만 현판에 새기지 않았다. 마침 이웃 고을에 원으로 왔기에 비로소 현판을 거는 까닭으로 제2의 시를 짓는다.
-신묘년(1831) 4월 용성(龍城; 龍宮縣) 원 이의익(李宜翼, 1794-?; 여주목사, 강화부유수, 경기관찰사)
16. 又
속인이 이에 이르니 자연 마음이 허명하는구나, 俗人到此自靈虛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夢一場中羽化如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退老先題吾祖和
예로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홀하지 않았지요. 風流從古不曾疏
*나의 6세조 동원공(東園公; 정호선)의 시가 걸려 있어서 추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끝에 시를 붙인다.
-용성(龍城; 龍宮縣) 객 정재유(丁載裕)
약포 서애 학봉: 세 분 모두 임진왜란 극복에 앞장 섰던 퇴계의 제자들이다. 학봉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우의정 약포는 모함으로 고문을 당하였고 처형되기 직전의 충무공 이순신을 선조에게 차자를 올려 구해냈다.
4. 퇴계선생의 선몽대 시에 삼가 차운하여 조여익曺汝益에게 보이니 다섯 마리이다
敬次仙夢臺退溪先生韻。示曺汝益。五首。
先生仙夢已成虛。선생의 선몽대 꿈은 이미 사라졌지만,
追誦遺詩拜謁如。남긴 시를 오늘에 읊자니 선생을 뵈옵는 듯하여라.
書法至今應似昨。선생의 선몽대 글씨는 지금도 어제 쓴 듯하고,
分明字密又行疏。글자 복잡한 것이 분명치만 또한 성글도록 쓰셨네.
主人自能卜淸虛。주인은 스스로 맑고 텅 빈 곳에 터 잡았고,
朗苑玄都此不如。밝은 동산은 신선의 나라보다 좋구려.
夢罷幾回臺上臥。누대에 누워 몇 번이나 꿈에서 깨어나는데,
滿天明月看星疏。명월이 하늘에 가득하고 별들은 성글구려.
巖畔孤臺控八虛。강가 바위 벼랑의 외로운 누대는 여덟 하늘을 당겨오고,
赤松蟠屈老蚪如。서리친 붉은 솔은 늙은 규룡을 닮았다.
曉風山市喧還靜。새벽바람 부는 산동네 고요하다가 다시 떠들썩하고,
暮雨江郊密復疏。강마을 저녁 비 쏟아지다 다시 성글다.
百歲光陰轉眄虛。백 년의 세월 눈동자 굴려 보아도 비었고,
一臺淸興浩難如。한 누대의 맑은 흥은 끝없이 넓구나.
晩來始覺塵寰夢。늘그막에야 와서 세상의 헛된 꿈을 비로소 깨지만,
歸去田園計未疏。전원으로 돌아갈 계책은 아직 성글다.
謝却簪纓世慮虛。벼슬살이 물러나니 세상 시름 비어지고,
仙臺一夢問何如。신선 누대 한 꿈이 묻노니 어떠한가.
春風秋月溪郊路。봄바람 가을 달에 강마을 길을 걸어서,
鳩杖相隨只自疏。지팡이 짚고 서로 어울리는 일이 다만 절로 성글구나.
一作亦豈疏 (‘어찌 성글겠소’ 라고도 한다.)
己亥秋。曹參奉汝益。因鄕解。自嶠南。訪余終南之寓舍。一日。語及仙夢臺事。蓋其氷舅李使君所構也。謄示退溪先生所題七言絶。整襟三復。驚歎悲感。謹次若干絶。首絶。寓追慕先生之意。其餘。或道臺中游賞之景。或道田園隣好之事。時兵革甫定。琢將退休田園。田園實與臺爲隣。茵草錦花。可以藍輿往來。故末二絶及之。噫。汝益之請。實爲先生遺韻而發。其意有在。不敢以詞俚爲辭。遂題以贈之。萬曆二十七年八月二十四日。淸城後學鄭琢。謹題。
기해년 가을에 조참봉 여익이 향시 때문에 영남에서 서울 남산에 있는 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하루는 말이 선몽대 일에 미쳤는데, 대개 그의 장인 이사군(우암 이열도)이 선몽대 정자를 지은 것이다. 퇴계 선생이 붙인 7언 절구 시를 베껴와 보였다. 소매를 여미며 세 차례 읊조리니 경탄하고 비감하였다. 삼가 약간의 절구를 차운하였다. 첫 절구는 선생을 추모하는 뜻을 담았다. 나머지는 대에서 노닐며 감상한 풍경을 말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이웃과 지내는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겨우 안정되는 시점이라서 탁은 장차 물러나 전원에서 쉬고자 하였는데, 전원이 실제로 선몽대와 이웃하였다. 향기로운 풀과 비단같은 꽃 속에 가마가 왕래할 수가 있었기에 끝의 두 절구는 이런 일을 언급하였다. 아, 여익의 청은 실로 퇴계 선생이 남긴 시로 인하여 나온 것이다. 나는 그 뜻이 있으나 말이 천박하여 글을 감히 짓지 못하겠다. 그래서 시를 써서 주노라.
만력 27(1599)년 8월 24일 청주 후학 정탁 삼가 붙인다.
-약포 정탁(藥圃 鄭琢, 1526-1605)
*정탁: 1526(중종 21)∼1605(선조 3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백곡(栢谷). 예천 출신.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탁 [鄭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우인(曺友仁, 1561-162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경상도 예천 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자이다. 저서는 <<이재집>>, <<이재영언>>이 있다.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혔다.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5. 선몽대 퇴계 선생의 시를 차운하여 仙夢臺。次退溪先生韻
高臺登眺若憑虛。높은 대에 올라 조망하니 허공에 매달린 같고,
漁釣生涯我不如。낚시하고 고기 잡는 생애 나는 여의치 못하네.
花落半庭春事晩。꽃이 져 뜨락의 반을 덮고 봄날은 깊어만 가는데,
碧簷松影更蕭疎。솔 그림자에 처마 푸르고 다시 성글고 고요하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6. 퇴계 선생의 선몽대(仙夢臺) 운을 공경히 차운하다. 謹次仙夢臺韻
반 무의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으니 / 半畝松陰倒碧虛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 / 玉壺今日興何如
그대로 인해 유선의 시구 다시 들으니 / 憑君更聽儒仙句
속세 인연 그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 / 便覺塵緣立地疏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7. 이 찰방(이굉)의 선몽대 시를 차운하여 次李察訪仙夢臺韻
主人心池自沖虛。주인의 마음 못 절로 비었고,
斷峽平川縱所如。끊어진 벼랑 평탄한 하천이 너르다.
鶴夢幾回仙作侶。학은 꿈속에 몇 번이나 돌아와 신선의 벗이 되지만,
一生須却萬緣疏。일생에 모름지기 온갖 인연이 성글다.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
*권호문, 지산 조호익 진성 이씨 외손으로 진성 이씨 시조공 묘갈에 등장한다.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8. 선몽대에 부친 퇴계선생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선생의 조카 굉이 지은 선몽대는 예천의 모래내 위에 있다. 題仙夢臺。敬次退溪先生韻。先生姪子宏所築。在醴泉沙川上
一夢飄颻眼界虛。꿈에 표표히 오니 시야가 훤하고,
溪臺霽月興何如。냇가의 대에는 달이 밝게 떠올랐다.
覺來身在風塵路。꿈 깨어 온몸은 풍진의 길에 있고,
恨望山林迹也疏。한스럽게 숲을 바라보니 발자취 또한 성글구나.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
9. 선몽대 퇴계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仙夢臺。次退溪先生韻。
山橫蒼壁地凌虛。산은 비껴 있고 절벽은 푸른데 땅은 허공을 능지르고,
水釣林耕盡自如。강물에 낚시하고 시골에서 밭 가니 절로 할 일 다 한다.
未到此臺名已好。이 대에 오기 전에 이름부터 좋았으니,
賞情飜動世情疏。경치 감상하는 정이 일렁이고 세상인심 성글어진다.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
10. 삼가 선몽대 시에 차운하다 敬次仙夢臺韻
沙白川明澹若虛 모래는 희고 강물은 밝으니 맑기가 하늘과 같고,
玉山瓊圃較何如 군옥산(群玉山) 선계(仙界)의 밭을 무엇에나 비교할 것인가.
仙區萬里應難到 만 리 밖 신선의 나라에는 가기가 어려울사,
來往斯亭且莫疎 이 정자에 내왕하기를 성글게 하지 말아야 하리.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
11. 선몽대 시에 차운하다 次仙夢臺韻
小臺超忽八牕虛。작은 대는 홀연히 오르니 여덟 창이 트였고,
水色山光畫不如。물빛 산 풍광은 그림보다 좋구나.
仙枕夢回聞鶴唳。신선 잠에 꿈을 꾸니 학 울음 들려오고,
石間松老影蕭疏。돌 사이에 노송 그림자 소슬하고 성글하다.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 1587-1667)
*김응조는 여헌 장현광의 제자로 선산부사 시절 화공을 데리고 가서
영천(지금은 포항) 입암에 머무는 스승의 영정을 그렸는데,
입암서원에 이 영정이 소장되어 전한다.
퇴계 시 선몽대로 명명하며 지어 보낸 시
1. 선몽대 현판
가정(嘉靖) 계해(癸亥, 1563년) 도산(陶山, 퇴계) 선생 63세 친필.
2. 선몽대에 붙이는 시를 부치다. 寄題仙夢臺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솟아있고 松老高臺揷翠虛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白沙靑壁畵難如
내가 이제 밤마다 신선의 꿈을 꾸니 吾今夜夜凭(憑)仙夢
예전에 감상을 소홀히 한 것을 한탄하지 않노라. 莫恨前時趁賞疏
遇巖之勝。多魔不遇。至今夢想不已。聊以一絶寄意。因以名臺云。
우암의 승경을 여러 일로 만나지 못하여 지금은 꿈에서 그려보기를 그치지를 못하다가 문득 절구 한 머리에 뜻을 담아 부친다. 이런 일로 누대의 이름을 선몽대로 명명하였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3. 엎드려 종조부 퇴계선생 시에 차운함 伏次從祖祖父退溪先生韻
시렁처럼 높이 솟은 작은 정자가 물에 비쳐 한가로운데 小亭高架鏡中虛
멀리 갯가와 긴 내를 바라보니 속이 탁 트이는구나. 遠浦長川望豁如
외로운 무수리 노을 진 저녁에 여러 형상 드러나니 孤鶖落霞呈百態
저녁 바람에 흩날리는 비가 쓸쓸하게 내리는구나. 晩風飛雨又疎疎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
*이열도(1538-1591): 본관이 진성(眞城). 조부는 퇴계의 2째 형인 이하(李河-潛/河/瑞麟/瀣/澄/滉). 아버지는 기린도 찰방을 지낸 이굉(李宏)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수량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미묘한 말과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종조부인 퇴계가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1576년(선조 9) 과거에 급제, 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박사, 사헌부감찰, 예조정랑을 거쳐 은계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585년(선조 18) 외직인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이어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상도 경산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대신들이 우암을 천거했다. 사비를 들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학교를 세우고, 농업을 장려했다. 세금을 골고루 부과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등 불과 1년여 만에 고을을 안정시켰다. 어느 날, 감사(監司)가 보자는 연락이 왔다. 급히 달려갔더니 기껏 한다는 부탁이 책의 표지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사적(私的)인 일로 바쁜 공직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직위가 높은 감사라도 부당하다며 관복을 벗어 던지고 물러나와 그 길로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은 1563년(명종 18) 선몽대를 짓고, 원림을 조성해 평생 동안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다가 1591년(선조 24) 향년 54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중원 최진방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다산 정약용이 예천군수 아버지 정재원을 모시고 선몽대에 와서 선조인 정호선의 시판을 보고 지었다. 글씨 예천 서예가 초정 권창륜
다산 정약용 선조인 경상감사 동원 정호선
12. 삼가 벽 위의 시에 차운하여 선몽대 주인에게 드리고 아울러 자리의 사람들에게 보임 敬次壁上韻拜呈仙夢臺主人兼示席上
물속에 드리운 아름다운 누대 보배로운 거울을 무색케 하고 一水瑤臺寶鑑虛
주인이 품은 마음씨 또한 담백하기 이를 데 없네. 主人襟抱淡相如
이틀간을 오르내리면서 선몽대와 함께 하니 登臨兩日同仙夢
천길 위에서 세상 티끌이 내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구나. 千尺紅塵念己疏
시를 읊던 난정(蘭亭) 유적은 이미 빈터가 되었으니 蘭亭遺跡已成虛
좋았던 일 지금에 누구에게 물어보리오. 勝事今辰問孰如
거북과 학이 다시 노니니 참으로 다행일 뿐이니, 龜鶴重遊眞幸耳
가을이 왔으니 편지를 성글게 보내지 마오. 秋來莫遣信音疏
-다산의 7대조 경상감사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 1571-1632, 자 士優)
13. 부친을 모시고 선몽대에 올라 陪家君登仙夢臺
높은 언덕 자리 잡아 허공에 솟은 누각 中天樓閣枕高丘
술 마시며 유람하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杯酒登臨散客愁
꽃잎에 닿은 산중 비 방울져서 떨어지고 山雨著花紅滴瀝
솔숲에 든 시내 바람 우수수 들려온다. 溪風入檜碧颼飅
사신(관찰사 丁好善)이라 관개(冠蓋)는 낡은 자취 서글프고 使臣冠蓋悲陳跡
승상(鄭琢)이라 의건(衣巾)은 예전 노닒이 떠오르네. 丞相衣巾憶舊游
단약 부엌 연기 없어 신선의 꿈 싸늘한데 丹竈無煙仙夢冷
강물과 구름 고금이 절로 한가로워라 水雲今古自悠悠
*대는 예천 고을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의 별업(別業)이다 *7대조 감사공(監司公)께서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에 오셨는데 벽상의 시가 있고 별도로 기문(記文)이 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14. 선몽대기 仙夢臺記
醴泉之東十餘里。得一川焉。泓渟而演漾。紆餘而邐迆。深者深靑。淺者淨綠。川邊皆明沙白石。風煙妍媚。照映人目。沿流至數里。有峭壁削立。緣厓而上。得一榭焉。牓之曰仙夢之臺。臺左右皆茂林脩竹。溪光石色。隱約蔽虧。洵異境也。蓋自太白山而南。溪山之勝。唯奈城榮川醴泉爲最。而仙夢特以奇瓌名數郡。一日從家大人行。旣祗謁于藥圃鄭相國之遺像。轉而至是臺。徘徊瞻眺。旣而見壁上諸詩。其一卽吾祖觀察公所嘗題也。板壞宇(字)裂。偏旁或觖。而字句無闕。家君手拂塵煤。令余讀之。曰公嘗奉使嶺南。登此臺矣。公之距今且二百有餘年。吾與若又登臨爲樂。豈不奇哉。命余移摸。付工翻刻。易其繪采而懸之。旣而召余而記之。
예천(醴泉)에서 동쪽으로 10여 리(里) 되는 곳에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모두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었으며, 바람에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따라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으며 그 정자에는 ‘선몽대(仙夢臺)’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太白山)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柰城)ㆍ영천(榮川)ㆍ예천(醴泉)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약포(藥圃) 정 상국(鄭相國 명종(明宗) 때의 문신인 정탁(鄭琢))의 유상(遺像)을 배알(拜謁)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徘徊)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는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공(公)이 일찍이 영남(嶺南)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백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공장(工匠)에게 번각(翻刻)하고 다시 단청(丹靑)을 입혀 걸어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
-다산 정약용
선몽대
진성이씨 예천파
우암선생 후손 李五敎 어른과
아내는 송재파 난은선생 7대손
난은선생은 선몽대 건너편 고미 출신으로
봉화 법전으로 이거했다
축을 담당한 이오교, 이한방(진성이씨 대종회지 열화 편집 담당, 교수, 열화에 기고하며 통화했다.)
병은 연적
12지신 중 토끼/
나는 계묘생이다.
토끼는 별주부 등에 엎혀 용궁에 다녀왔다. 별주부전 이야기의 원조는 자타카(본생담)이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탈출할 때 옥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토끼는 방위로는 정동쪽이고, 해가 뜨는 동쪽이고
장부로는 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용왕은 토끼의 간을 얻으려고 하였다.
용궁현(용궁면) 지명의 유래는 낙동강이라고 하는 용이 감아도는 지형인 회룡포를 용궁으로 본데서 생겼다.
개심사지 5층 석탑
용궁 막걸리 상표에도 용궁인 회룡포가 등장한다.
용왕은 이 막걸리를 날마다 마셨으니 간에 병이 들었고
별주부에게 간이 좋은 토끼의 간을 구해오라고 한 것이다.
모래강 내성천의 맑은 물이 흐르니 이 물로 술을 빚으면
맛있는 술이 된다. 예천醴泉은 맛있는 술이 솟아나는 샘물이란 지명이다.
실크로드 입구의 주천酒泉에서 번안한 지명이기도 할 것이다.
용문사 대장전
영산재 천도재 등에서 영혼을 모셔오는
가마 시연侍輦
대수미지중미진찰토
주역 64괘 중 地澤 臨괘
윤장대
법련 김경수 거사님 촬영
배영자샘 오카리나 연주
정자 난간 모퉁이 아래 바위에 네모나게 파고 초간정이라고 새긴 글씨가, 박공 아래 처마 밑에 석조헌이란 편액이 보인다.
예천 권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醴泉 醴泉權氏 草澗公派 宗宅)은
초간(草間) 권문해(權文海:1534~1591)의 조부 권오상(權五常)이 선조 22년(1598)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가옥 중 하나이다.
풍수의 명당에 자리한 이 가옥에는 보물(寶物:457호)로 지정된 별당(別堂) 사랑채를 비롯해,
별당 뒤의 남쪽으로 치우쳐 본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채에 계단을 설치해 건물이 높고 웅장해 보이도록 했다.
별당 안에는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에 희생된 권오상(權五常)의 형제가 심은 수령 500년의 향나무가 있으며,
본채에는 예천권씨종가문적 다수가 보관되어 있어 가옥과 더불어 중요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醴泉 醴泉權氏 草澗公派 宗宅)은
마을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위치하고, 오른쪽에는 백마산(白馬山), 왼쪽에는 아미산(娥眉山)이 반달처럼 죽림리를 감싸 안고 있다.
이 산비탈에 8필지(2,798㎡) 면적의 넓은 대지 위에 예천권씨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종택 입구에는 수령 500년의 향나무가 고택의 고즈넉함을 느끼게 한다.
종택에 들어서면 우측에 동북 방향으로 자리잡은 바깥 사랑채인 별당이 있다.
별당의 좌측에 위치한 백승각(百升閣)은《대동운부군옥(大東韻部群玉)》목판각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전질 120권,
14대째 내려오는 옥피리가 보관되어 있다.
별당 우측의 광명대 역시 문중의 귀중한 유물을 보관하던 공간이다.
별당은 영남지역 사대부가 즐겨짓던 별당식 건물로,
바깥사랑채로 이용되었다.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醴泉權氏 草澗宗宅 別堂)은
현재 종택과는 별개로 보물 제457호(1967년 6월 23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쪽에서 보면 오른쪽 3칸은 대청마루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인데 온돌방은 다시 2개로 나뉘어 있다.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열려 있지만 옆면과 뒷면은 2짝 널문을 달았으며,
집 주위로 난간을 돌려 누(樓)집과 같은 모양으로 꾸몄다.
일반 주택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건물 안쪽을 장식하여 꾸민 수법이,
뛰어난 조선시대 별당 건축이다.
[출처:역사문화유산]
봉소
예천 권씨의 서예가
초정 권창륜 글씨
초간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책판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총 20권 20책으로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의 체제를 본떠 만들었다. '운부군옥'이란 여러 가지 항목을 한자음의 높낮이에 따라 분류했다는 뜻으로,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약 190종 가운데 우리 나라에 관련된 주요 내용들을 단군부터 선조 때까지를 다룬 내용들을 가려 뽑았다. 선조 22년(1589년)에 완성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펴내지 못하고, 후손 권진락(權進洛)이 순조 12년(1812년)에야 간행하기 시작해 헌종 2년(1836년)에야 완간했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임진왜란 이전의 책들을 망라하여 사료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16세기 한글의 모습을 알 수 있어 국어학에서도 중요하게 쓰인다. 최근 남명학연구소 경상한문학연구회 주도로 2007년에 총 20권으로 완간되었다.
편찬 및 전승 과정[편집]
권문해가 대구부사로 있던 1589년에 20권 20책으로 집필 완료. 치밀하게도 세 질을 미리 베껴두었다.
1591년에 김성일이 국학에서 간행하고자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발. 가져간 한 질은 소실되었다.
한강 정구가 빌려 가서 또 한 질을 잃어버리다.
마지막 한 질만이 남아 권문해의 아들인 권별이 한 질을 더 필사해 두다.
7대 손인 권진락이 출간하기 위해 정조 22년(1798년) 정범조(丁範祖)에게 서문을 부탁하다.
1812년 간행 작업이 시작되어 1836년에 판각이 완료되다.
1913년 최남선이 재간행을 시도하다 중단하다.
1950년 정양사(正陽社)에서 영인되다.
1977년과 1990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되다.
2003년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에 의해 국역 시작되다
2007년 20권으로 국역 완간되었다.(민속원 출판사 20권/색인 상하권).
의의[편집]
권문해는 '신라의 기록에는 신선이 놀던 기록이 많다. 이런 괴이한 것을 말하는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그 이름을 밝힌다.'는 이유를 대며 신선이 놀던 곳들의 이름을 적어둔다거나, 참람되게 중국의 연호가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신라와 고려의 연호들을 다 적어두었다. 이는 그가 우리의 것을 기록하면서 중국을 존중하는 사대부의 문화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묘안을 낸 것이다. 이것은 권문해가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면서도 유교국가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서, 박지원이 열하일기와 같은 책을 쓸 때도 이어진 태도였고 이후 박지원과 북학파의 글들은 문체반정에 걸리게 된다.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쓰면서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준은 아래와 같다.[1]
1.민족 자존의 입장 고려 : 방언, 속명 등 우리 고유의 것들을 그대로 기록
2.원본에 충실하게 :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원 사료의 것을 그대로 기록
3.자료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수집
4. 후대의 감계가 되도록 : 권장할만한 것들은 더욱 중요하게 다룸
유학을 존숭함
같이 보기[편집]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 - 보물 제457호
봄바람 닮은 큰 아량은
만물을 품어내고,
가을물 같은 인품의 무늬결(文章)은
세상 티끌에 물들지 않네.
의성 김씨 애국지사
창암蒼庵 김후병(金厚秉, 1874-1954)이 1929년 기사년 중양절(음력 구월 구일)에 쓴 글씨
청 등석여 대련
이 대련은 추사 글씨로 유명하다.
나릉진안설로 유명한
화계 류의건의 친구이자 사위가
활산 남용만
활산의 아들이 치암 남경희(경주 보문에 지연정사와 묘소가 있다.)
남경희 맏딸과 혼인한 정하은의
양자가 정백휴로 치암에게 배웠다.
정백휴의 막내동생이 정도휴.
정도휴의 외손이 창암 김후병
치암 남경희의 2째 딸 외손이
정헌 이종상(경주 양동마을).
종부님은 진성이씨
방당方塘- 주희의 시 관서유감
울릉도 향나무
황금빛 들판
산과 하늘
예천 권씨 종택
내성천 회룡포 마을
토끼와 거북이가 용왕님을 만나고 온
용궁이다.
안내문에 용궁이란 말이 등장한다
회룡포 전망대 장안사 파초
꽃누르미 책갈피 송재중샘 선물
진성이씨 이가원 선생은 학자이며
서예가이다.
학가산 보문사 반야용선도
아미타 부처님 계시는
극락세계
호명면虎鳴面 백송리白松里
선몽대
옥황상제 있는
신선계
내성천
회룡포
용왕님 있는
용궁
예천 맛있는 술이 샘솟는
산과 강과 들이 어우러져
불교 유교 문화가 발달한
복된 고장이다.
첫댓글 멋진 풍경을 보면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나 봅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사진 너무 좋습니다.
선생님 학문의 깊이와 부지런함도 존경합니다.
누구도 감히 따를수 없습니다.
올~가을에 참 멋진 하루를 추억합니다
잔영의 기억들이 멋진 사진과 글이 함께 오네요ㅡ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답사였네요.
저도 동참하고 싶은 간절하였으나 아직은 경주교사모임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내년부터는 두껍게 붙어다니겠습니다.
아니!
현장 사진과 자료를 집대성했네요
하나의 책자입니다
보배시네요..... !!!!
언제나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이 보아도 손색이 없는 마치 함께 다녀온 듯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