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와코비아 챔피언십 최종일 18번홀. ‘앙팡 테리블’로 불리는 20대 영건 앤서니 킴이 또 한번 튀었다. 우승컵을 안은 뒤에 투우사처럼 모자를 벗고 갤러리들에게 화답했던 것. 길들여지지 않은 ‘황소 본능’을 잘 다스려 낸 노련한 투우사의 기질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장면 2
작년 닛산오픈 1라운드 때 갤러리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 선수의 양말이 눈에 띄었기 때문. 한쪽엔 검은 양말 한쪽엔 흰색 양말을 신고 나와 연신 싱글대며 갤러리들과 농담을 주고 받던 그 골퍼는 다름 아닌 앤서니 킴이었다. 정통의 골프 ‘드레스 코드’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옷차림. 그의 답변도 걸작이다. “골프 실력이 떨어지니 신발이라도 튀어보려 했다”며 농을 쳤다. 앤서니 킴 특유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타이거 우즈를 보유하고도 15년간 유럽에 끌려다닌 한을 풀었다”
“앤서니 킴이야 말로 ‘미스터 라이더 컵’이다. 그가 미국을 살렸다”
지난 22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바아할라골프장에서 끝난 라이더컵(미국-유럽간 골프대항전)에서 미국이 9년만에 감격의 승리를 거둔 뒤 언론들이 우승의 주역 앤서니 킴에게 쏟아낸 찬사다. 한국계 골퍼 앤서니 킴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골프 황제 우즈를 능가하는 분위기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앤서니 킴의 승리가 미국을 살렸다고 비중있게 보도하면서 “경기 판도를 좌우할 마지막 날 첫번째 대결에서 최강 세르히오 가르시아를 대파했고 특유의 쇼맨십으로 관중의 응원을 유도해 미국의 사기를 크게 올려놨다”고 극찬했다.
개인전에 강한 이기적인 분위기의 서양과는 달리 단체전 호흡을 중시하는 동양인 특유의 강점을 추켜세우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의 CBS스포츠는 “타이거 우즈는 불세출의 스타지만 개인 경기에서만 잘했다. 라이더컵에서 앤서니 킴 같은 선수는 없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올해 무릎 부상으로 앤서니 킴에게 출전권을 양보한 우즈는 라이더컵에서 10승2무13패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고 있고 필 미켈슨도 10승6무14패로 승률이 5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필드의 로드맨 “그가 가면 흥이 절로 난다”
라이더컵은 미국과 유럽의 자존심을 건 일전이다. 미국이 이번 승리에 흥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 세계 최강 타이거 우즈가 나서고도 번번이 물을 먹은 게 벌써 9년째다. 올해 분위기는 더 침울했던 게 사실이다. 우즈가 부상으로 빠진 자리에 20대 영건 앤서니 킴이 ‘대타’로 나왔기 때문. 하지만 꿩 대신 닭이 사고를 친 셈이다.
앤서니는 확실히 분위기 메이커였다. 마지막 날 싱글 매치플레이에서 미국의 1번 주자로 나서 유럽의 에이스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를 무려 5홀 차로 꺾고 기선을 제압했다. 압권은 파 4인 첫 홀. 세컨드 샷을 핀 75㎝에 붙인 앤서니 킴은 핀 90㎝에 떨어뜨린 가르시아로부터 ‘동시에 컨시드(OK)를 주는 게 어떠냐’는 제의에 콧방귀를 끼며 거절했고 기싸움에서 앞서간다. 결국 라이더컵에서 14승2무4패로 최고 승률을 자랑하는 가르시아를 완파하고 분위기를 완전히 미국쪽으로 돌렸다.
앤서니는 늘 이런 식이다. 폭발적인 장타만큼이나 말과 플레이는 거침이 없다. 이러니 그를 보는 시각은 늘 두 가지로 갈린다. 건방지다는 것과 저돌적이라는 것. 여기에 행동까지 튀니 그는 늘 언론 관심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때 코트의 독설가로 이름을 날린 미국 프로농구(NBA)의 찰스 바클리나 로드맨에 비교된 것도 이런 특유의 자신감과 저돌성 때문이다.
자신감만큼이나 골프 실력도 발군이다. 20대 초반인 그는 이미 ‘300야드 클럽’에 올라 있다. 평균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300.5야드. PGA투어 랭킹 공동 10위의 성적이다. 드라이브샷 평균 300야드는 PGA에서 스타로 인정받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일단 300야드 클럽에 들어야 최고가 될 싹을 인정받는다. 그러니 그가 라이언(사자) 유전자를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의사 어머니와 사업가 아버지를 둔 앤서니 킴은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골프채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어릴적 꿈은 골퍼가 아닌 농구 선수.
앤서니 킴은 “사실 농구가 더 하고 싶었지만 키 때문에 포기했다”며 “PGA투어에서 우승도 했고 라이더컵에서 미국에 승리까지 안겼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 같다”고 웃었다. 사실 그의 자신감은 피나는 연습에서 나온 것이다.
골퍼 앤서니 킴이 완성된 곳은 팜스프링스의 PGA웨스트(West). 골프코스가 7개나 있는 빌라타운이다.
이곳에서 앤서니 킴은 골프에만 매달렸다. 하루 7시간 연습은 기본. 손바닥에 굳은살이 떨어지고 박이기가 수십 번 반복되고 나서야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클라호마 대학에 진학한 이후 유혹은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다잡게 된 것은 역할모델 타이거 우즈 때문. 앤서니는 “늘 타이거 우즈를 떠올리며 그를 닮기 위해 노력했다”며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 선수가 되기까지는 집중력을 키운 우즈를 늘 존경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적 논란은 여전
앤서니 킴에게 마냥 칭찬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번 라이더컵이 끝난 뒤 대형 미국 국기를 들고 필드를 뛰던 그를 지켜본 한국 골프팬들에게는 섭섭함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긴 하지만 앤서니의 국적은 미국이다.
LPGA에서 뛰고 있는 미셸 위나 크리스티나 김을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미국인은 단 한명도 없다. 그들에게 앤서니 킴이나 미셸 위 크리스티나 김은 얼굴색만 다른 미국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쪽은 한국인이다. 엄연히 한국인 부모를 뒀고 또 한국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성조기 세리머니’ 만큼은 좀 자제를 했어야 하지 않았냐는 따가운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골퍼는 “차세대 우즈로 불릴 만큼 최고의 기량을 가진 것은 인정을 한다”면서도 “하지만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인들 앞에서 분위기를 돋우는 장면만큼은 스스로 자제를 했어야 한다. 아직 어린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앤서니 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뛰는 ‘반 한국인’들은 늘 논란의 대상이다. 한때는 박지은이 “반은 미국인이고 반은 한국인이다”는 발언으로 도마에 오른 적이 있고 크리스티나 김 역시 한·일 대항전에 한국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국적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다.
KLPGA 협회 관계자는 “골프가 국제적인 스포츠가 되긴 했지만 국적 문제는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다”며 “스스로 잘 조율해서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앤서니 킴이 ‘타이거’를 키웠다고?
전세계 스포츠계가 발칵 뒤집힐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그의 애완견 이름이 ‘타이거’다. 앤서니 킴의 어머니가 골프로 꼭 타이거 우즈의 벽을 넘으라며 강아지 몰티즈를 사주며 붙여준 이름이다.
앤서니 킴의 한 측근은 “당시 강아지를 사 줄 때 세계 최고 골프선수인 타이거 우즈를 잊지 말고 함께 하면서 그를 능가하는 선수가 되라고 주문했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바람은 현실이 되고 있다. 22살에 Q스쿨을 통과했고 올해 PGA에서만 벌써 2승째를 거두고 있다.
우즈의 벽을 넘겠다는 그의 각오는 허리띠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허리띠 버클에 영문 이름 이니셜을 딴 ‘AK’를 새기고 다닌다. 우즈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인 ‘나이키 TW’ 라인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의식한 행동이다.
그의 목표는 단연 그랜드 슬램. “2등은 잊힐 뿐이다. 반드시 최고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 앤서니 킴은 “모든 메이저 타이틀을 한 번 가져보는 게 꿈이다”고 잘라 말한다.
함께 라운드를 했던 98년 브리티시오픈 챔피언 마크 오메라는 “앤서니는 우즈 이후에 나타난 가장 뛰어난 선수다. 기술도 뛰어나고 재능도 많은데다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격투기. UFC를 즐겨 보는 앤서니 킴은 우승을 차지한 AT&T 대회 당시 심야까지 TV를 보고 6시에 일어나 경기를 했을 정도.
그는 독특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PGA 2승을 거두는 동안 8번의 라운드에서 모두 첫번째 홀 버디를 기록한 것이다. 저돌적인 앤서니 킴다운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