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은 한때 검은 골드러시로 남한의 작은 서울 이라 불렀다.
광부가 되겠다고 수만명씩 몰려 들었으니 서울의 명동과도 같았다.
지금 2024년 그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광부들의 기억을 품은 애잔한 망각의 땅에 들어섰다.
산도 나무도 여울도 돌멩이도 모두 검은 색깔이다.
검은 도시 철암기차역에서 내려 바라본 탄광촌 풍광이다.
물가에 기둥하나로 버티는 까치발 집들이 있다.
개천가로 튀어나온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넘어질듯 불안하다.
1978~9년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좁을 땅에 많은 집이필요하다 보니 이런 집들이 생겨났다.
도로변에 세워진 애잔한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손에 아이를 안고 탄 캐러가는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이다.
생명줄인 가장이 오늘도 무사히 잘 다녀오라 기도하는 마음일 것이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 사이를 걸었다.
옛날식 다방 당구장 중국집 등 간판들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육십 년대 우리들의 생활모습들이다.
바닥에는 탄을 캐는데 필요한 벽에 구멍을 뚫는 드릴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고,
설명하는 글과 함께 일하던 모습 사진들이 벽에 걸려있다.
머리에 쓴 안전 모자에서 비추는 뿌연 먼지 불빛 속에 큰 삽 속에 들어있는 탄 더미를 두 손으로 밀어낸다.
몸과 땅속에서 나오는 열기로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시커먼 얼굴,
뾰족한 방진 마스크로 외계인 같은 모습, 삶의 고달픔이 느껴진다.
막장에 조그만 식사 공간이 있다. 검은 비닐봉지들이 천정에 걸려있다. 도시락이다.
쥐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매달아 놓았다한다.
지하900미터나 되는 깊은 곳에 쥐들이 있다하니 놀랍다.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있지 않으냐 물어봤다.
갱도가 무너졌을 때 쥐들이 제일먼저 알려주어 고마운 존재라 한단다.
살생을 하지 않은 게 이곳의 규칙이다.
자주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죽어 나간다.
같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태백지역탄광은 국내 최초로 일본강점기 때부터 운영되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에너지 다변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석탄이 대체에너지로 급부상되면서 정부정책에 힘입어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1977~8년대에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
1800년대 미국서부에는 골드러시가 있었다하면 1970년대 이곳은 검은 골드러시다.
거리는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대었다.
유흥가에는 예쁜 여자들이 넘쳐나고 강아지도 만원자리를 물고 다닌다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태백 탄전지대 사북 고한 철암 도계 에서전국의 30~40%를 생산했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경제발전에 초석을 이룬 것이 베트남 파병과 중동 건설이 있었다면,
이곳 검은 땅의 신화도 당당히 들어가야 할 것이다.
경제발전의 영광 속에는 광부들의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있다.
한해 100명이상 때로는300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도시락을 사줏밥 이라고도 불렀다.
목숨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생산이 중요했던 시절 이었다.
이때 여자광부도 생겨났다. 대부분 미망인 들이다.
여자들은 석탄을 고르는 일을 한다.
탄케는 일은 배움이 없어도 몸만 건강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탄가루와 늘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진폐증 환자도 많이 생긴다.
2021년 7월 기준으로 태백시에서 인정된 환자 수는 3629명이라고 한다.
광부들의 대우 또한 참혹했다.
수입은 탄을 캐는 양에 따라 월급이 지급된다.
어용노조 위원장과 사용자 간부 농간으로 60%밖에 받지 못했다.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사건이(1989년1월10일) 소위사북사태이다.
원만히 타협을 하나 했는데 신군부의 강재진압으로 노동자와 경찰의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
경찰이 부상을 당했고 일부 사망자가 발생했다.
주동자들은 심한 고문도 당했다.
[1980년] 사북사태 발발
격동의 80년대가 막 시작된 1980년 4월 21일.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에서 사북 노동자 총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북탄광촌 어용노조 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그해 노조원의 임금인상률을 노조측이 요구하던 42.75% 가 아닌 20% 로
몰래 서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회사와 어용노조의 담합사실이 전해지자 분노한 노조원들이 지부장에게 몰려가
임금인상 경위 등을 추궁하며 4월 17일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4월 21일 오후 5시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 나 지프차를 타고 도망치던 경찰이 수십 명의 노동자가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질주,
4명의 광부들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동료가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탄광촌에 퍼지자
흥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농성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 30% 인상과 상여금 400% 지급,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면서
거의 전원이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등을 점거했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장성·영월 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여 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저항하는 5,000명의 시위대를 당해내진 못했다.
하지만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과 광부 16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양측모두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4월 24일, 광부 측과 정부 측 대표는 밤샘 협상 끝에 노조 집행부 사퇴,
상여금인상 등 11개항의 협상안을 타결지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짧은 평화 후 그해 5월 17일, 사북파업이 끝난 지 3주일 만에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사북에서도 부녀자, 노동자들이 연행되어 이루 말 못할 고통을 겪어야 했다.
[글 출처] [1980년]사북사태 발발 |작성자 반가운
근대화의 영광 속에는 강자들 한태 짓밟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뚱어리 하나로 버티며,
두더지 삶을 살아야 했던 광부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1989년 정부의 석탄합리화 조치로 청정에너지가스로 전환되면서 이곳 탄광들은 거의 폐광되었다.
태백 탄전지대 345개광구중 철암탄광 1곳만이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탄광촌 전채가 거의 빈집들이다.
과거와의 대화 문화적 가치로 관광지로 계발하여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외부에서 온 관광객들만이 띄엄띄엄 눈에 보인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힘든 시기를 넘기면서 우리도 잘살아보겠다는 신념하나로 땀을 흘렸다.
그 보람으로 이제는 세계 속에 경제대국 10위라는 당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 밑바탕에는 천대받고 보잘것없는 풀과 같은 존재 노동자 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근대화의 초석을 이룬 업적의 영광과 아픔을 간직한 채 잠들고 있는 폐광촌을 둘러보았다.
광부들은 어둠의 세상이었었지만 경제발전에 희망의 싹을 틔워낸 나라의 영웅들이었다.
우리는 이분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잘나갔던 시절 까만 골목 가득 메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80년대초,어느 국민학생이 쓴
산도 까맣고 물도 까맣고~~란 글을 읽은적 있다.
지금은 다 외우지 못하지만 그때는 사북이란곳이 궁금하기도 했다.
1981년도인가 82년도 어느 여름날 사북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간적 있다.
열차가 산비탈로 느리게 달리는데 온통 까만 산이였다.
기어가듯 비탈길로 달려 사북에 내려보니 하얀 와이셔츠가 까만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아이가 쓴 글 그대로 산도 까맣고 냇물이 까맣다.
여름이지만 시원했는데 수돗물도 시간제로 나온다고 했다.
산좋고 물좋다는 강원도에서 이런일이~~
세월호,이태원은 주구장창 떠들어대면서도
사북사태얘기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란것도 거짓말,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아래 사람없다는 말도 빨간 거짓말,
직업에 귀천없다는말도 거짓말이다
나와는 아무런 추억도 없지만 그 시절에 자란 세대로써
철암에 한번 다녀온후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사북 다녀온 그때가 불과 3,40년전인데
이젠 역사속의 한 페-지가 되었다.
그때 그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무얼할까.
2024.4.16 미루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언제나 변함없는 마음입니다.
좋은 하루 행복하세요~
요즘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