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에 걸친 고구려-발해 유적 답사 소개 마지막 편입니다. 서고성 답사를 마치고, 백두산과, 화산폭발로 생긴 아름다운 호수인 경박호를 둘러 본 후, 162년간(756~785, 794~926) 발해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답사합니다. 상경용천부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경성은 외성, 내성, 궁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은 전체 둘레가 약 16.3㎞나 됩니다. 현재 남아있는성벽의 기단부는 약 14~18m, 상부의 너비는 1~3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5m 됩니다. 발해 당시에는 성벽 높이가 6m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외성에는 4면에 10~12개의 문이 있고, 남쪽 정문으로 이어진 주작대로라 불리는 너비 110m의 큰 길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너비가 92m, 78m, 65m, 28~34m 되는 11개 큰 길이 있는데 모두 흙을 다져 만들었습니다. 이런 길들로 구획된 82개의 방(坊, 동서 465~530m, 남북 235~370m)이 있었는데, 1개 방은 다시 4개의 작은 방이 田자 모양으로 한 단위를 이루어 구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상경성 내에는 비교적 완벽한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생활용수를 도랑을 파서 성 안으로 끌어들였고, 음용수는 우물을 파서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성 밖에는 해자를 둘렀고, 외성 네모소리에는 각루의 흔적도 있습니다.
외성 내의 중심에서 북으로 치우친 곳에 내성(황성)이 있습니다.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벽과 서벽은 450m 내외, 남벽과 북벽은 1,050m 전체가 2,996m 크기인 황성은 3개의 구역으로 나누져 있고, 그 안에 3성 6부와 같은 관청 건물이 있었습니다.
궁성은 북쪽 중앙 부분에 있는데, 동벽과 서벽은 900~940m, 남벽과 북벽은 1,050~1,090m로 전체 3,986m 크기입니다. (참고로 북경의 자금성은 동서 760m, 남북 960m입니다.) 궁성 정문을 오봉루라고 하는데, 현재는 높이 6m, 동서 60m, 남북 20m 크기의 기단만이 남아있습니다. 궁성 내부는 4개 구역으로 나눠지며, 중심구역에는 5개의 궁전터가 있는데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구역에는 부속 건물과 금원 등이 있습니다. 특히 동쪽 구역에는 어화원이라는 궁궐의 정원터가 있습니다.
제1궁전 터는 오봉루 북쪽 200m 거리에 있고, 높이 3m 기단 위에 대형 원형초석 40개가 있습니다. 제2궁전 터는 1궁전 터로부터 북쪽으로 150m 거리에 있는데, 동서 96m, 남북 28m의 초대형 건축물입니다. 2009년 중국에서 제2궁전 터를 발굴한 결과, 전면 19칸, 측면 4칸의 거대한 건물이 세워졌음이 밝혀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현재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선전합니다. 그런데 당나라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정면이 큰 것은 장안성의 함원전이 전면 11칸인 것과 비교하면, 도리어 당나라가 발해의 지방정권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발해 제2궁전의 규모가 더 거대합니다.
그래서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편저한 『발해상경성:1998~2007년도고고발굴조사보고』,(북경, 문물출판사, 2009)에서는 발해 상경성 궁성을 규모면에서 당나라 대명궁에 미치지 못하며, 당나라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 왕성을 축조할 때 규정을 어길 수 없어 규모를 축소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거대한 제2궁전에 대해서는 예제를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 일종의 특수한 현상에 속한다는 모순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발해 상경성은 고구려 안학궁을 모델로 만들어진 태왕(황제)의 궁전이지, 당나라 지방정권의 궁전이 아닙니다. 안학궁의 제2궁전은 폭이 87m나 됩니다. 또한 전면 19칸, 측면 4칸입니다. 발해 상경성 제2궁전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왕궁을 따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는 경쟁국이던 북위, 당보다 더 큰 궁전을 만들어, 자존심과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의 근정전이 전면과 측면이 5칸인 것과는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발해 유적지에 가서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 중국이 아무리 왜곡하려고 해도 왜곡할 수 없는 발해의 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상경성 일대에는 남호두고성을 비롯한 약 20개 성이 있으며, 인물상과 꽃무늬 장식벽화가 있는 삼령둔(三靈屯)2호묘를 비롯해 많은 무덤들이 있습니다. 또한 거대한 사찰도 많았는데, 발해 시대 사찰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발해시대에 만들어진 석등과 불상이 현재 상경성 외성 내 흥륭사에 남아있습니다. 발해시기 가장 뛰어난 조각품인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가 6.3m나 되는 거대한 규모입니다. 특히 상대석과 하대석에 표현된 연꽃 표현 방식은 고구려 조각양식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밖에도 상경성 일대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으나 다 둘러 볼 수 없는 만큼, 상경성박물관에 들려서 발해의 유물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올해 답사를 가지 못하시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직접 현장에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 현장을 직접 보는 것과 사진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쓴 글은 퍼 가셔도 좋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구려, 발해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고, 고구려와 발해를 알리는 것은 저의 임무이니까요. 다만 인용하실 때는 글의 출처만큼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0번에 나눠 연재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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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에 어떻게 저길 알고 찾아 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넓은 궁성 터를 보면서 정말 경복궁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을 했고, 성안에 민가도 있고 옥수수를 재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곳은 저희 처가집에서도 가까운 곳인데, 예로부터 조선족이 살고있는 집단 거주지도 있고, 집성촌 마을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한국으로 떠난 터라 그저 황무지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토양이 좋아서 화산석 쌀이 아주 품질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갈때마다 느끼지만 발해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