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7 강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2:1-12:21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태복음 12장부터는 예수님에 대한 반대와 핍박이 공개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두 파트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1-8),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 둘째(9-21),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참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1-8)
1-8절에서는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그에 대해서 제자들을 변호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밀을 추수하는 추수기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밀알의 탐스러운 열매가 향긋한 냄새를 피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대를 받았을 때는 배가 부르도록 많이 먹고 또한 음식이 없을 때는 한끼 두끼를 쫄쫄 굶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는 불안정한 사명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피교육생들은 항상 춥고 배고프고 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제자훈련을 받고 있는 피교육생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먹어도 항상 배고프고 졸렸습니다. 우리 장막 형제 자매님들은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의 배고픈 사정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우 시장한 제자들이 마침 한 밀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밀밭에서는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밀의 열매들이 보이고 그곳에서 향긋하고 매우 구수한 냄새가 제자들을 유혹했습니다. 배고플 때는 양반도 체면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체면도 차리지 않고 밀밭으로 가서 밀이삭을 손으로 잘라 비비면서 훅훅 분 다음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이 고소한 맛은 정말 꿀맛이구나' 제자들은 서로 그 맛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종교 경찰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일행을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현행범으로 걸리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떻게 비난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자기 손으로 그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되었습니다(신23:25). 이웃의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29개의 안식일 유전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 전날에 기차여행을 하다가도 해가 지면 그 즉시 내려서 도보로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어떤 병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지혈은 해도 약을 바르거나 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추수나 타작, 키질은 물론이요 음식준비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안식일 유전은 사람들의 행복을 억압하고 위축시켰으며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없도록 얽매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안식일에 자르는 것은 추수를 하는 행위요 손으로 밀을 비비는 것은 타작하는 행위요 입으로 껍질을 부는 것은 키질을 하는 행위로서 안식일 유전법에 위반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 유전법을 어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양도 없고 예의도 모르고 야만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법을 지키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건달처럼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른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배가 고픈 자에 대한 사랑과 이해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기초는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중심 사상은 첫째 계명으로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1-4계명),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5-10계명).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할 때 판단하기보다는 그 입장에 서서 이해해 주고 적극적으로 사랑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 심령에 생명력이 말라버리고 박물관에 표본과 같이 굳어져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를 했으나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태에 있는 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7)
예수님은 그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음으로써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변론하셨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이는 사무엘상 21:1-6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 콤플렉스로 죄없이 쫓기며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 매우 궁핍하고 곤고했습니다. 그런데도 수백 명이 다윗을 좇았습니다.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심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거룩한 떡만이 있었습니다. 제자장 아히멜렉은 심히 배가 고픈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 그 거룩한 떡을 주어서 먹도록 했습니다. 안식일 법에 의하면 다윗과 그 부하들은 성소의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안식일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로 인해 다윗을 정죄하거나 징계의 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 제사업무를 위해 많은 일을 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5)라고 책망했습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비하는 일에 속한 모든 것은 무엇이나 다 허용되는 날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에 제사업무를 위해 일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에 쉬라고 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일까지 쉬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생명을 위해 먹고 마시는 모든 수고가 거룩한 일, 곧 성전을 섬기는 일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통해 안식일에 대해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첫째, 안식일에도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1,12). 안식일일지라도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는 전인 자기 육신의 생명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정상적으로 의식주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생명과 양들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6,8). 성자이신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창설하시고 안식일을 주관하시고 안식일을 통해 인간들로부터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자기 생명을 위해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결코 죄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만 무지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성전보다 크시며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안식일의 근본 창설의도를 잘 아시고 안식일을 그 정신에 따라 잘 지키는 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안식일 법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한국에는 바리새인들은 없고 오히려 사두개 신자들과 같이 세속화되어 안식일에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법을 어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식일에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고 오락을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도 서구와 같이 5일 근무제가 완전히 시행되면 금요일 오후부터 즐기기 위해서 산과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그들이 안식일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을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겠습니다. 안식일에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열심히 해야 겠습니다.
2.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9-21)
9-14절에서 안식일의 온전한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사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9). 그런데 거기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한 손 마른 사람은 일상 생활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예배보러 회당에 와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반갑게 악수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오른손을 내밀 때 자신은 왼손을 내밀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아주 은혜스러운 소감을 들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박수를 치지 못하고 자기 가슴을 쳐야만 했을 것입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학교성적이 아무리 좋고 시험점수가 우수하더라도 항상 면접시험에는 낙방이었습니다. 남들이 다른 문제로 웃기만 해도 자기 때문에 비웃는 것으로 오해하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또 그 문제로 인해 싸움을 하게 될 때는 다른 사람이 원 투 스트레이트로 두 대를 때릴 때 자기는 한 대밖에 때릴 수 없어 항상 분통이 터지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한 손 마른 장애로 인해 정신적인 장애인으로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깊은 운명주의와 자학 가운데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은 사랑이 필요했고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이 어느날 은혜를 받고자 회당 뒤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자의 내면의 슬픔과 비참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불쌍하고 어려운 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덫을 놓고 기다리는 비정한 사냥꾼과 같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을 잡는 덫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손을 내놓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불쌍한 양은 덫에 걸어 놓은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유전상 안식일에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경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자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한 손 마른 자를 고치는 것은 분명한 위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주님은 유대인들의 의도를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피해 회당에서 잠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 마른 자에게 안식일이 지날 때 오도록 하여 그를 고쳐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손 마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한 손 마른 자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의 병을 고쳐주고자 마음 먹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주님은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었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한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목자의 심정에서 그를 죽음에서 구원코자 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그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캠퍼스 새 양들을 마치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양의 생명을 구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이번 여름수양회에 초청해야 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로 그당시 교권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얼마나 불리한 일인가를 주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호심탐탐 노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쳤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근본 율법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안식일의 율법 조항은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카비 시대에 항거했던 유대인들은 이 약점을 이용한 안티오쿠스 군대의 안식일 공격에 무참히 학살당하고 패배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하고 규칙 준수에만 얽매였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율법의 근본정신도 사랑으로 보셨습니다.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22:40).
율법의 근본정신은 금지하고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율법은 인간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의 율법 정신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12).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도전했습니다. 이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만 안식일 법이 면제된다는 그들의 율법사상에 근거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유전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금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분명하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b)" 라고 대답했습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의 귀한 생명의 가치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칙에 얽매여 인간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마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과 행동으로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 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 그당시 바리새인들의 유전에는 안식일날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죽지 않을 형편에 있으면 그것을 꺼내지 말고 그 상태에서 먹을 음식만 주어서 안식일 해가 진 후에 구덩이에서 그 짐승을 꺼내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양보다 더 귀하므로 안식일지라도 그의 병고와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지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불사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행한 병고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한 손 마른 자를 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한 손 마른 사람의 아픔을 더 큰 문제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치료는 완전합니다. 한 손 마른 자는 즉각적으로 한 손 마른 것이 치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건강을 회복하여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유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소극적으로 옷을 정장으로 입고 예배 시간에 나와서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보며 안식일을 의식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잘 지킨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악한 생각과 정욕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안식일을 잘 지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는 거룩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사죄의 역사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심히 양들이 거듭나 사죄의 은혜를 덧입도록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심방을 하여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도와야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선이란 한 손 마른 자와 같은 불쌍한 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장애인이 되어 고민하며 소외되어 방황하는 지성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이런 연약한 자들의 편이 되어서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해야겠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창 2:2-3, 출 20:8-11). 다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영적인 쉼을 얻도록 하는데 있습니다(신 5:12-15).
15-21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모략을 받으시고 일단 후퇴하사 피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때가 이르기 전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고 계심을 아시고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15).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후퇴하셨습니다. 이는 용기가 부족하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혈기나 자존심으로 인하여 무모한 일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참된 용기와 만용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고치는 일로 인하여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도록 당부하셨습니다(16).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며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시면서도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사도 마태는 이사야 42:1-4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참 종이십니까?
첫째, 겸손하고 온유하십니다(17,19). 예수님은 다투지도 않으시고 외치지도 않으십니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19). 이와같이 예수님의 성품은 겸손하시고 매우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8,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완벽하여서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한다(고후 10:1)"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할 때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주님은 곤욕과 심문을 당할 때도 끝까지 겸손과 온유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20,21).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이(왕하 18:21) 저주스러운 우상숭배의 죄와 자신의 부도덕한 죄로 인하여 상한 갈대와 같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좌절로 인해 상처를 입은 갈대와 같은 인간들을 말합니다. 인간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풍파와 환난과 고통을 받고 실패와 좌절로 인해서 상처를 받아 고통하며 절망과 운명주의의 소용돌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외모로는 든든하고 성해 보이지만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누구나 많은 상처를 입고 시커멓게 멍들어 있습니다. 소생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한 갈대들입니다. 자기 스스로 바로 설 수 없는 갈대와 같습니다. 조그만 바람만 불어도 완전히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꺼져가는 심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지금과 같이 밝은 전기가 없던 약 40년 전 한국 시골 마을에는 등잔불을 밤에 켰습니다. 조그마한 호롱에 석유 기름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겨우 사물을 분간할 정도로 밝지 않은 불이 켜집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에 문제가 있어 그 불마저 꺼져가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불은 오히려 연기만 내고 좋지 않습니다. 주인은 꺼져가는 불은 바로 꺼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꺼져가는 불마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양심의 빛을 잃고 타락해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을 공급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양심의 빛, 영혼의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 가운데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젊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바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 나라 형편이 바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한 갈대는 여지없이 꺾어버리고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하시사 상한 갈대마저 꺾지 않으시고 싸매고 다시 용기를 복돋워 주십니다.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인간들을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상한 갈대와 같은 자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싸매 주시고 용기를 복돋워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참으시고 기름을 공급하여 더 밝고 환한 불빛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 위로자요, 참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꺾는 분이 아니라, 용기를 복돋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갈릴리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마태란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불이 꺼졌고 영혼의 불마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도저히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의 심령은 상한 갈대와 같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소외로 인하여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감당하사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넣으시사 더 밝고 환한 불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말씀의 불빛을 비춰주는 사도로서 구속역사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21).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캠퍼스에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우리도 이번 여름 수양회에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을 많이 초청해야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