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 도월화
산책길에 핀 진달래가 아침 햇살에 고운 미소를 머금는다. 꽃은 어젯밤 별빛에도 방긋대며 반짝이지 않았을까. 달빛 아래 수줍게 웃음 짓는 가녀린 꽃이 떠오른다. 여린 꽃잎은 최치원이 지은 <진달래>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한(恨)의 정서에 닿은 것만 같다.
나 어릴 때 엄마는 진달래 필 무렵, 아껴 둔 고운 한복을 꺼내 입었다. 들로 산으로 아낙네들끼리 화전놀이를 가면, 나는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녔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면, 울 엄마 고울 적의 연분홍 치마를 온통 산천에 펼쳐 놓은 듯했다. 나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먹을 수 있어선가 싶었다. 참꽃으로 꽃전을 부치면 풍미가 쌉싸름한 듯 향긋하다. 진달래 화전, 두견화 전이라고도 한다. 먹거리를 베푸는 여인네들은 넉넉한 인정으로 한풀이를 하지 않았던가.
김소월의 숙모가 쓴 『내가 기른 소월』이란 책이 있다. 그 속에 소월 시인이 <진달래꽃>을 쓰게 된 사연이 나온다. 김소월의 외삼촌은 7년 연상의 소녀와 어린 나이에 혼인하게 된다. 일본 유학 후 교사가 되었으나, 고향 집의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다. 본처는 미움도 원망도 없는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며느리의 도리를 지켰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후략)'라는 <진달래꽃>은 외숙모의 한 많은 삶을 보며 지은 시라고 한다. 시인의 눈에, 한을 포용하는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시는 발걸음마다 뿌리는 길이야말로, 외숙모가 한풀이를 다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또한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 <진달래>도 여리고 소외된 진달래꽃에 작가 자신의 처지를 비춰 본 애틋한 한시이다. 최치원이 지은 <진달래(杜鵑두견)>를 읽어 본다.
'돌 틈에 박힌 뿌리 위태로워 잎이 마르기 쉽더라
풍상에 시달리어 병이 든 듯 보이네
가을 풍요 자랑하는 들국화야 부러워하리오만
바위 위의 소나무 강추위 이겨냄을 부러워하네
가여워라 고운 향 머금고 외로이 바닷가에 섰건만
뉘라서 좋은 집 난간 앞에 옮겨 심을까
뭇 초목과는 품격이 다르련마는
다만 지나가는 나무꾼이나 한번 봐 줄는지
(石罅根危葉易乾 風霜偏覺見摧殘 已饒野菊誇秋艶 應羨巖松保歲寒
可惜含芳臨碧海 誰能移植到朱欄 與凡草木還殊品 只恐樵夫一例看)'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18세에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대륙에서 문명을 떨친 최치원인들 이방인의 외로움이 없었으랴. 신라에 돌아온 후 그가 내놓은 개혁안은 진골 귀족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게다가 아찬 이상은 오를 수 없는 것이 그가 속한 6두품의 신분적 한계였다. 최치원이 한을 달래는 길은 자연과 문장을 즐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최치원은 돌 틈의 진달래를, '지나가는 나무꾼이나 한번 봐 줄는지' 두렵다고 썼다. 하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추앙받는 최치원은 진달래의 한풀이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산책길의 진달래꽃을 보며, 최치원이 살던 고대부터 현대까지 면면히 흐르는 한국적 한(恨)의 정서를 떠올린다. 진달래 핀 풀밭을 지나 하천가를 거닌다. 작은 물고기와 오리가 보인다. 몇몇 사람들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오리 떼가 거의 가로채서 먹어 치운다. 힘없는 물고기들은 슬금슬금 피해 다니는 것 같다. 어류들은 속으로 쫑알거릴지 모른다. 오래 참은 약자의 넋두리가 랩뮤직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소리쳐 말 못한 억울한 것들. 표현하지 않아도 사실이고 진실이었어. 단지 진달래꽃과 같이 연약하기에 발언권을 주지 않았어. 오히려 교묘하게 상황을 속이거나(gaslighting) 윽박질렀지. 별 수 없이 소금 단지에 빠진 미꾸라지 신세가 되었지. 심지어 비웃으며 모멸감을 줄 때도 없지 않았어. 결정적인 고비에 마녀재판을 하는 거야. 위기의 의무는 건강을 지키고 책임감을 잃지 않는 것뿐이야. 애처로운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을 잊어선 안돼. 강추위를 이겨내는 헐벗은 나무의 생명력만이 겨울나기를 하고 새봄을 맞지. 아홉 개 가진 쪽이 열 개 채우려는 낯선 세상에서, 여린 진달래처럼 버텨온 자신을 칭찬해야 해.
진달래꽃과 같이 힘없는 물고기의 노래를 들으니, 숨 쉬는 공기가 한결 시원한 기분이다. 나도 덩달아 속이 후련하다. 오늘따라 막연히 부대끼던 마음이 한풀이를 한 듯 편안해진다. 가녀린 진달래와 물고기를 통해 치유 받는 아침 산책길을 나는 사랑한다. 그제야 나는 모두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난다. 이 땅의 모든 진달래처럼 여린 삶을 저마다의 한풀이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수필과 비평 2022.7월호 수록)
-도월화 약력-
수필집 『최치원 향내』 『여월여화』 『달처럼 꽃처럼』 출간
창작수필 등단(2000)
한국수필문학상 수상(2014)
선수필 편집위원
너섬 시니어아카데미 수필강사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前)중등학교 사회과 교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계수필동인회 회원
창작수필문인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이메일] ssopia7@naver.com
오늘의 수필감상 180 ▶ 도월화 수필가 ⇒ 《최치원 향내》 ⇔ 〈연꽃 만나러 가는 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수필감상 15 - 도월화 수필가 《선수필 2019 봄호》 -<최치원의 향내를 따라 1,하늘향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