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다 날리고 멈춰지면
거긴 어딜까?
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 한 마리
덜컹거리는 차창 너머로
거리는 흘러라, 덜컹거리며 책을 읽다가
피곤하여 눈을 감고 졸다가
꿈길 따라
정말 새가 되어 날아간다
좋구나 하늘나라에서 굽어보니
내 살던 자리
웃지 않는 서울도 아름다운 것을
어둠 속에 총총히 박혀 있는
오만가지 불빛은
별로 살아 반짝이고
머리로 걷는 사람들
발바닥으로 길을 보며
두 팔과 발을 높이 흔들고 가는 것을
하늘나라 옥상에 누워서 쳐다보니
즐겁구나 한강을 따라
언덕이 흐르고
언덕에 달라붙은 집들이 흐르고
집들마다 따뜻이 품고 있는 전등불이 흐르고
별이 흐르고 달이 흐르고
그 아래 줄지어 뜬 가로등 갈도 함께 흐르고
나도 흐르고
"다 왔습니다, 손님"
누워서 흐르는 차들의 머리에 달린 불도
별이 되어 흐르고
오리온좌 빌딩좌 아파트좌
"어서 내리세요, 손님, 네?"
내 살던 자리
바람이 잦은 서울이 흐르는 것을
꿈을 덜 깬 얼굴로
선들한 바람 속 종점을 둘러보는 새 한 마리
마음의 집 한 채 - 감태준
바다를 건너 간 친구한테 편지를 쓰다가
바다를 밀어 오는 쓸쓸함에
밀리고 밀리다가
마음 혼자
아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밤 열한 시
나는 가네, 서울을 나간 사촌은
고향 근처에서 벽돌을 찍고 있을까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구두쇠 박씨는
지금도 문패 대신 맹견주의표를 붙이고 있을까
처음 보는 집을 나화
2층 3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집을 나와
담장 안에 숨어 있는 집을 나와
주인 없이 문만 열린 집을 나화
좁은 골목에서 서로
어깨를 밀고 있는 집을 나와
어제도 갔던 집
염치는 없지만 안심하고 머무는 집
소주를 마시고
죽은 멸치 몇 마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은 잘못 밖에 없는
시인의
홑옷 한 벌이 빨래줄에 널려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시인 한잔 마음 한잔
신문지를 깔고 잠든 마른 멸치도 한잔
셋이서 구겨진 몸들을 펼쳐 놓고
자거라 자거라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 우는 소리를 재운다
* 강 - 감태준
쉬지 않는 것이 강이다
떠나면 이어서 오고 떠나면 이어서 온다
우리 곁에서 서러워하는 세월의 희망이 저기에 있다
우리 곁에서 서성거리는 눈물의 뿌리가 저기에 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버스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내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을 닮은 아이들이 저 강가에서 놀고 있다
* 흔들릴 때마다 한잔 - 감태준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꿈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그어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 해탈 - 감태준
해탈이 어찌 내 품에 안기기를
바라겠는가
남한산성 가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바람에 가지 씻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본다
아무 미련 없이
남은 단풍잎을 털고 있는 느티나무 고목한테
해탈이 찾아와 노는지
빈손을 흔들어 보이며
허허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몸 가뿐하게
버릴 것 버리고 나면
해탈이 찾아와줄까?
눈 반쯤 내려 감고
무릎 위에
두 손 가볍게 올려놓을 수 있을까?
* 철새 - 감태준
바람에 몇 번 뒤집힌 새는
바람 밑에서 놀고
겨울이 오고
겨울 뒤에서 더 큰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한번…”
우리 사는 바닷가 둥지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고향을 바꿔 보자”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는
달려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때,
아버지는 바람에 묻혀
날로 조그맣게 멀어져 가고,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온몸에 날개를 달고
날개 끝에 무거운 이별을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환한 달빛 속
첫눈이 와서 하얗게 누워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내 마음의 한가운데
아직 누구도 날아 가지 않은 하늘을 가로질러
우리는 어느새
먹물 속을 날고 있었다.
“조심해라, 얘야”
앞에 가던 아버지가 먼저 발을 헛딛었다
발 헛딛은 자리,
서울이었다
* 인식의 한 때 · 1 - 감태준
사람들이 마음을 어디에 넣고 다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지금
등뒤에 숨기고 있는 것은?
바람이 한 차례
공허한 가슴을 흔들고 지나간다
* 우리 앞의 겨울 - 감태준
길 막고 가로누워 있는 산
골짜기에
발소리 죽이고 몰려다니는 가랑잎
산 밖에도 산이 가로누워 있다, 보이는 것은 비탈에 뼈 묻고 떠는 나무들, 한 떼의 연기 낀 바람에 혼(魂)인 잎 쫓겨 발아래 깔린 우리들도 쫓겨,
아직 덜 꺾인 패랭이, 혹은 갈대에게도 매달려 몸 사리는 새 끝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저 산에서 저 산으로 새끼 물고 떠다니는 열두 달 겨울, 방금 샛길로 나간 무리도 눈물짓고 돌아와 같이 눈을 받는다
눈이 웃는다 허옇게 웃는 주봉(主峰) 아래 엎드리고 둘러선 돌산도 웃어, 더불어 막막히 웃는 무리, 틈틈이 웃지 않는 놈도 있다, 마른가지에 둥지 틀고 울 것은 울어,
산골에 간간 겁 없이 얼룩지는 울음, 위에 눈은 여전히, 아직 이른 눈발까지 웃고 있다 밤이 깊었다, 자 이젠 갑시다, 우리는 어느덧 길 없이도 뿔뿔이 헤어진다
『 밤새 안녕들, 다시 만납시다』
*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 감태준
철 믿고 손 내민 참나무 새순이 얼어 있다
작은 새 한 마리, 또 한 마리
참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틀다 말고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죽지에 부리를 묻은 채……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
살아야 한다 - 감태준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 아래 새들은 서러워라 발목에 채인 긴 그림자를 풀고 날다가 날다가 끝내 하늘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면 변두리 허공을 맴돌다가 서러워라 긴 그림자를 다시 차고 고향으로 골목으로 공사판으로 떨어지고, 더러는 예배당 십자가에 매달려 기도하고 더러는 곧 비가 될 구름을 쳐다보며 막연히 밤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이 새 저 새,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도 마지막으로 가는 길은 하나
살아야 한다?
* 몸 바뀐 사람들 - 감태준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 소리가 간간이 흘러 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
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고 한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갈 사람은 그러나, 못 하나 지르지 않고도 가볍게 손을 털고,
더러는 일찌감치 풍문(風聞)을 따라 간다 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생(生)이 뒤틀린 산길, 끊이었다 이어지는 말
매미 울음 소리에도 문득문득 발이 묶이고,
생각이 다 닳은 사람들은,
거기 다만 재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현대 사회는 한 마디로 산업사회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발이 이루어지고, 그 발전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의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떠돌이 신세로 만든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는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미 다른 어느 곳에서 정착하고 있다가 개발에 밀려 또다시 떠나가는 도시영세민들이다. 1연은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가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신세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그들의 유랑이 일회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1연 2행의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의 `다시'라는 말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일련의 계속되는 뿌리 뽑힌 삶은 그들로 하여금 삶의 터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바, 폐허의 집에서 흘러나온 구부러진 못에서 집을 연상하는 행위라든가 못을 집어들어 간직하는 행위들이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행위들이 그들로 하여금 안식의 터전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집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신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상처만을 주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삶의 터전에 대한 집념으로 생각은 닳게 되고 얼굴은 앙상하게 되어 메마른 빨래의 모습만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삶의 토대를 잃고 도시 변두리로 쫓겨나는 사람들의 마음 붙일 수 없는 삶을 감정의 적절한 절제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해설: 조남현]
* 떠돌이새 ·1 - 감태준바다를 나온 갈매기는
새벽기차에서 내린 잡새들 틈에 끼어
언 얼굴을 내밀었다 표정 없는 새들과
새들이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서울역 뒤편으로
아니면 너와 나의
따뜻한 추억 속으로……
* 달래의 子正 - 감태준열 아홉 生前, 넝마塵에서 품팔아 별을 헬 줄은, 청량리 三番地에서 분분히 밀리는 안개 속 냉돌 위에서, 속곳 찢기고 내내 부끄러운 내 一年, 꽃 엮어 짜올린 꿈 치렁치렁 머리에 땋고 집 떠난 지도 一年, 세상의 희고 검은 손들은 알게 모르게 건너와 내 어릴 때 되고 싶었던 새들을 후려가고, 토담집 엄니 엄니 울엄니는 깨 터는 밤에, 산골 깨밭을 매다 버린 호밋날로 안개를 맬 줄은, 다시 한번, 막다른 골목 한가운데 날아온 돌 되던지면 거기, 그러나 무섭도록 고요한 波紋, 죄없는 골목만 집들 사이에 갇혀 있다
*
내게 묻는 말 - 감태준신사동 산마을에 누가 길을 닦겠니, 발붙일 데 없는 사람들, 아니면 손발이 짧은 뜨내기끼리 서로 손발이 되어주며 주저 앉은 동네, 허리 휘어진 골목에는 끝내 이름 없이 가을이 된 풀꽃 두엇, 우리도 두엇, 마음을 한나절 여린 햇볕에 말린다
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장마에서 덜 마른 사람들, 늘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웃음으로 만들어진 얼굴과 얼굴, 밤이 되어도 눈시울에 해가 걸려 며칠째 밤이 되지 못한 채 오늘은 등 뒤로 하루를 제쳐놓고 노을 속에 가라앉은 사람들, 앞서 가라앉은 몇몇은 몸만 남고 마음은 한길에 한길을 잇대는 사람들
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밤 깊도록 길을 묻다 돌아오는 한 젊음, 아니, 다수의 젊음, 뒤에는 눈 뜬 채 구겨져 뒹구는 약도, 그 위에 많은 불빛을 밟고 지친 발자국들이 떨어져 쌓인다, 하나씩 둘씩, 풀어져 흐늘거리며 오는 마음들, 눈 비비고 새로 보아도 어떤 몸이 내 것인지, 골목에 띄엄띄엄 널려 있는 몸들은 그예, 선도 하나 색깔도 하나, 대체 내가 지금 어느 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시는 분 없습니까, 내가 어디 있습니까?
* 내 갈 곳은 - 감태준내 갈 곳은
바람 자는 집, 사람들의 따뜻한
피가 도는 가슴속
가자
뒤돌아보지 말고
거리의 사람들
서로 사람을 잊은 듯 무심히 헤어지고
차들마저 사람들을
길 양쪽으로 갈라놓고 달리는 꼴
더 보고 싶지 않으니
가자 가자
뒤돌아보지 말고
마음 둘 데 없으면
마음 끝까지
* 나에게도 - 감태준길을 물을 때
가을이 와서
단풍든 이파리들 하나씩
낙엽져 뒹굴며
뿌리로 돌아가는
길을 물을 때,
극락정토(極樂淨土)……
이파리들 가운데 몇이는
서쪽으로 가고 있을 때,
이미 바람을 따라간 가랑잎은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바람이 멎기를 기다린다
바람은 어서 멈춰
갈 길을 가게 하라
바람 안에 떠 있는 낙엽에게도,
뒤돌아보며 우는
어리석은 잎에게도,
나에게도
* 귀향(歸響) - 감태준서울역에서, 한번은 영등포 굴다리 밑에서 잠깐 스치고 흘러흘러 너를 다시 만났을 땐 눈이 오고, 그해도 저물었다 말이 없는 친구, 손에는 넝마줍기 삼 년에 절도이범(竊盜二犯), 기차표 한 장,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불구(不具)의 조각달이 떠 있다, 되는 것은 안 되는 것뿐이라고 한없이 쓸쓸해 하는 네 얼굴에 눈은 날아가 앉고, 눈은 날아가 앉고, 우리는 타관 불빛을 맞으며 하룻밤 강소주에 혹한을 녹였다, 머리에 채 남은 눈을 떨면서, 살아도 곱게 살자 꽃같이 살자, 흩어진 마음을 챙겨들고, 우리는 갈라섰다, 끝없이 몰리고 풀리는 행렬 속으로, 너는 이제 기적소리에도 가볍게 떠밀리고, 떠밀리는 너의 등에서, 아니, 너의 물결소리가 들리는 머리 위 공간(空間)에서, 나는 그때 새들의 고향을 얼핏 보았다
* 지금은 - 감태준짧은 겨울해는 빌딩 밑으로 가라앉고
돼지갈비집 드럼통 안에 빨갛게 타는 숯불이 그리워질 때
버스정류장 약국 앞에서
언 귀를 부비며
오지 않는 한 사람을 기다릴 때
* 역 - 감태준
오늘 밤에는
별에 가지 않으리라
어느 별에도 가지 않으리라
그대가 역이기에
* 사모곡 - 감태준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멀리 걸었다.
* 사람의 집 - 감태준- 구름의 집은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있고, 사람의 집은 마음이 머무는 데 있다
하루종일 아는 길만 따라다니다
나는 또 어제 그 자리,
바람이 불어와서
아무도 한자리에 서 있지 않는 거기,
저녁이 오며
저녁이 재빨리 깊어진다
장난감 곰은 지금도 그 가게에 있을까?
건강하고 마음이 비었으니
마땅히 행복할까?
횡단보도에 빨간불이 켜지면
나는 갑자기
생각 밖으로 목이 길어진다
목이 더 길어지기 전에
그래, 한번은 달라져야지
잘 움직이는 기계
언제 보아도 한 가지 웃음을 띠고
북을 치는 반달곰
너는 태엽이 풀리는 그때까지
되풀이 북을 칠 것이고
나는 아침에 마신 물을
저녁에도 마신다
저녁에는 술도 마신다
우리 나라 나이로 올해 서른넷
얼굴을 너무 많이 허용하고
힘의 안배에 실패한 것일까
벌써 다리가 풀리고
허전한 저녁에는 술을 마신다
홍형과 나는
흩어진 구름을 한자리에, 바쁘게 잔을 바꾸고
서로 잔이 되어
잔의 주인도 바꿀 때,
그때에도 바람은 문득문득
등뒤에서 불어가고
우리는 또 처음부터 잔을 바꾼다
바람이 멎지 않을 때는
술집도 바꾼다
바꾼 잔을 다시 바꾸고 담배를 바꾸고
얼굴을 바꾸고 여자를 바꾼다
잠자리도
꿈도 바꾼다
어제는 섣불리 꿈을 바꾸었다
발랄한 아가씨와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때,
언덕 위 숲 속으로
짐짓 수줍은 듯 나를 태우고 달리는 흰 말의
엉덩이를 눈앞에 보았을 때,
나는 몇차례나 마음에
무덤을 파곤 했다
이진 스스로 빛나리라
삽을 쥐고 돌아서면서
마음에도 큰 삽을 쥐어주고 돌아서면서,
저녁하늘을 찾아나선 어떤 샛별처럼
이진 무덤 밖에서 빛나리라
‘인간은 약하며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십자가를 높이 단 교회의 매부리코 전도사가
또 찾아오기 전에!
바꿀 것이 없을 때는
우리 별이 됩시다
구석에서 구석으로 몰리는 사내는 끝내
구석에서도 모로 쓰러지고,
네에, 역부족입니다
안됐군요
한마디로 완전히 실망입니다
나는 무엇이며
마음에 도는 이 풍차는 무엇인가?
옆구리에 봉투를 낀 채
혼자서 잔을 기울이는 아저씨,
당신의 눈에 구름은 무엇인가?
천장에 목을 매단 전등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며
예수는 무엇인가?
생각하면, 시간은 늘 얼굴을 가린 채
내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구름은 언제나
머문 곳이 집이었지, 과연 그럴까?
내 귓속에는
뭔가 지나가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이제도 막 자리를 뜨는 한 패거리 꾼들이
학도가를 부르며 지나가고
돌아보면 벽인데
누가 철책 너머로 나를 기웃거리며 지나가고
오늘의 새소식
17세의 정신이상자가
간호원을 살해하고 달아났습니다
시오리 밖에는 안개가 끼이는데
여러분들께서는 밤길을 밤길을……
조심하시길, 술집 밖에는
안개비가 낮게 깔리는 밤 아홉시
어린이 여러분,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술집 밖에는
이십층 빌딩이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내 꿈의 머리까지 보이는 듯
공중에 철근을 감추고
철근 위에 벽돌과 타일을 붙인 너는
정말 늠름해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점점 작아진다
너무 작아져서
오늘같이 마음이 흔들릴 때는
내가 안 보인다
웃기지마, 홍형이 말했다
내릴까지는 아직도 긴 밤이 우리 앞에 가로누워 있고
여기는 사람이 만든 도시,
눈 감지 마
안 보이면
뒤를 봐,
넌 뒤에 있을 거야, 언제나
발로 차면 굴러가고
던지면 날아가는 돌들처럼
우리 걸어온 자리,
사람과 차가 뒤섞이고
집이 없는 곳,
바람이 불어와서
아무도 한자리에 서 있지 않는 거기,
행인을 보고
한없이 꾸벅거려 절을 하는
기계인형 옆에서
고개를 비스듬히, 북을 치는 반달곰은
마땅히 행복할까?
가을보다 먼저 단풍든 가로수가 나를 보고
생각난 듯 잎이 진다
잘 가게, 안개비 속으로
홍형은 허리를 구부정히
사람들과 한 물결이 되어 흘러가고,
단풍잎 틈틈이
아직 파랗게 살아서 안개비를 맞는
이 잎은 시인의 딸
이 잎은 시인의 둘째딸, 밀림의 곰을 타고 아프리카로
가는
이 잎은 시인의 아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방금 바람을 따라간 가랑잎은
내가 아는 얼굴인데,
곰은 아니고
이름 앞에 번호를 단 여자
35번 미스 정도, 전도사도, 17세의
정신이상자도 아닌데,
나는 아닌지
내가 아는 누구인데
누구인들 어때
여기는 사람이 만든 도시,
철근과 벽돌을 섞어
빈터에 교회를 짓고
빈터가 없으면 아파트에
아파트의 벽면에 예수를 걸어놓고 꾾어앉아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비는, 하느님의 종들이
언제부턴가
자신을 더 믿어온 도시,
나는 아직도 마음보다 발이 먼저 머무는 곳,
장난감 곰은 지금도 그 가게에 있을까?
집을 짓다 말고, 밤에는 나도 구름처럼 바람을 따라가는
한 마리 곰이 아닐 것인가
* 약한자를 읽어내리는 의리의 시인 - 강준용
문단 생활 십오년 동안 감태준 시인 만큼 문인들의 피담에 오른 문인을 보지 못했다.지금은 잠간 낀 물안개가 햇살에 흩어져 버린 듯이 사라져 버린 먼 이야기이지만 한때 감태준시인은 문인들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 화제의 대상이었다.신인 중견을 막론하고 대다수 문인들이 그를 질타하고 변형적인 산술로 그를 매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 됐다.원망과 야유와 증오로 충만된 된 원성은 감태준 시인을 매장시키지못해 안달난 소리로 들렸다.
높은 나무에 오르면 떨어트리려는 사람들이 많다.자신한테 유익되지 않으면 그런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상대를 아예 말살해 버리려고 한다.문학잡지의 으뜸 꽃이라고 할 수있는 현대문학지의 주간으로 다년간 재직한 감태준한테는 응당한 시련이었다.그러나 듣고 보면 그모두다 다 현대문학지에 원고를 넣었다가 반환된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고,작품게재의 생살여탈의 힘이있는 주간한테 그불만을 발화시킨 거였다.
사실 작품을 넣어 반품되거나 자신의 작품이 홀대 당할때 문인으로서 그 치욕은 대단하다.비록 작품이 형편없을지라도 본인이 받는 감정은 수모의 도를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유무로까지 비약된다.그런 사감은 수긍하지만 작품의 질에 대한 문제성만은 이해를 할수도 타협대상이 될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에 내게 비치는 감태준에 대한 타론은 감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감태준을 현대문학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소리도 만만찮게 들렸다.
감태준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호기심 속에 나는 신인으로서 원고 한편을 들고 그를 처음 대했다.운동으로 다져진듯한 단단한 몸에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감태준시인은 마치 내게 형처럼 느껴졌다.그의 말은 부드럽고 정중했으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다감했다.그는 나를보고 간단하게 한마디 말했다.
"강준용씨,신인이니 한마디 하겠는데, 문단을 쑤셔다니지말고 글만 쓰세요.좋은 글을 쓰면 가만히 있어도 작품 청탁이 갈겁니다. 찾아다녀 발표하는 그런 소설가가 되지말고 앉아서 청탁받는 그런 소설가가 되세요"
그는 두말않고 힘없고 배경없는 한 신인의 작품을 현대문학지에 게재해 주었다.미래의 문필생활에 막막한 신인한테 감태준의 조언은 광열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나는 그때부터 정말 그의 말처럼 들어앉아 글만 써댔다.그리고 감태준을 형이라부르게 이르렸을때 나는 그가 많은 문인들한테 박해받는 이유를 인지했다.수준 이하의 작품을 들고와 발표해달라고 아부및 공갈 협박하는 문인들이 많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작품이 실리면 입을 다물고 안실리면 욕을한다.정말로 간단한 감정 표현이다.
감태준시인은 그생활에 이미 숙달되어 있었다.남이 무슨말을 하든 자신의 처신을 지켜나가는 눈치였다.그러나 나는 뭇 문인들이 행하는 감태준의 타도에 조력할 수는 없었다.누가 뭐래도 그는 내게 다정하고 의리있는 형으로 여겨졌다.그는 언제나 약한 사람편이었다.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은적이 있는 걸로 안다.물론 도움이라야 원고료를 몇 푼 쥐게하거나 출판을 해주는 일이 고작이지만 문인한테는 대단한 힘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감태준을 대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내 개인 생각으로는 모두들 그때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지내는 문인이 많은줄로 안다.그가 문예지에 손을 놓자 더 이상 필요하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감태준을 다시 거론 하는 것은 그와의 사이가 남달랐기 때문이다.내가 그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이유는 뚜렀하다.그는 내어려운 생할을 알고 있다.혹가다 내가 현대 문학에 들리면 그는 때가 되면 점심을 사준다.점심을 사주려 온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앉은 그였지만 내게 만큼은 점심을 사주었다.
신인때 어느날 나는 현대 문학에 그를 만나려 갔다.그가 마침 시내에 모임이 있었어 택시를 잡았는데 명동에 볼일이 있는 나도 접붙어 탔다.택시안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몇번 묻던 그가 느탓없이 지갑을 꺼내 들고 속에 있는 돈을 다 거냈다.대략 칠만원쯤 된 것 같았다.그는 서슴없이 반으로 갈라 한쪽이 기우는쪽인 사 만원
을 내게 내밀었다.
"갈라쓰자."
생활에 어려웠던 내게 그돈은 거액이었다.그러나 나는 그돈에서 감태준의 가슴 한쪽을 떼어 받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그가슴은 봄볕처럼 따스했고,삭풍같은 강렬한 의리가 담겨 있었다.얼마뒤 나는 원고료를 타면 감태준 시인한테 보답이라고 하려고 작정을했다.원고료가 나오는날 현대문학으로 원고료를 타려갔다.겸사 겸사하여 감태준시인한테 점심이라도 대접할 요량이었다.원고료를 정산하여 그의 책상앞으로 갔을때 감태준은 내게 어서 집에가라고 했다. 나의 눈치를 알고 그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결국 그는 미적거리는 나를 그대로 돌려보냈다.고료에서 축날 내 생활 자금에 대해 그는 읽고 있었다.
이젠 흘려간 먼 이야기지만 그시절 감태준시인한테 밥얻어먹고 용돈 타 쓴자는 아마 나 뿐일 것이다.내가 감태준과 각별한 사이임을 아는 자는 내게 감태준 욕을 하지 않는다.물론 어던 일에 대해서는 감태준시인이 잘못하는 행동이 있는걸로 안다.그러나 나는 그의 편이 됐다.누가 뭐래도 감태준은 내게 의리있는 형으로 여겨진다.
내 문단생활도 꽤나 익었다.아직도 감태준 시인이 한말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작품을 팔려다니지 않고 남한테 타협하지도 않고 오직 좋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한다.그것이 실행되지 않아서 탈이지만.
이제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키고있다.언젠가 한번본 그의 모습에서 교수티를 느꼈다.나는 감태준 교수가 아닌 시인으로서 모든 문인들한테 가깝게 남겨지길 바란다.그리고 내 신인시절 들려주었던 그 문학 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켜주길 바란다.웃기고 더러운 작자들이 많은 이코메디같은 문단생활에 그의 말은 절실한 필요를 요한다.
" 작가는 작품만 잘쓰면 된다.찾아다니는 작가가 되지말고 청탁받는 작가가 되어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