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고 한다. 한강, 임진강 물과 예성강물이 합쳐지는 물길 어귀에 교동도는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래서 섬의 중심은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가 이루고 있다. 이 평야는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지금은 휴전선 때문에 고립돼 있지만 교동도는 예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바다와 강을 잇는 풍성한 물자가 모여들던 곳이었다. 자연히 돈이 많이 모였고 벼슬아치와 부자들이 다수 교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개성의 송악산이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고, 황해도 연백평야는 강화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교동도는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고려,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 그리고 경기, 황해, 충청 삼도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됐던 중요 섬이다.
교동도는 드넓은 간척지 들판 위로는 철새 떼가 몰려다니고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모습이다. 풍년이 들면 교동 주민이 10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의 섬이다.
교동도 추억여행 두 번째, 강화나들길 10코스 머르메 가는 길이다. 머르메 가는 길의 머르메란 두산부락에서 자연부락 단위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두산이라는 글자 풀이로 머리 메로한 것이 지금 머르메로 전해오고 있다.
2024년 싱그러운 여름의 관문인 6월, 어서오시겨 대룡시장을 뒤로 나들길은 6.25 전란 때 활주로로 사용했다는 교동서로를 따라 걷는다. 좌우로 모내기를 끝낸 교동평야, 개시미벌이 펼쳐진다. 지금은 국내 최상급 명성을 얻은 쌀, 고시히까리의 곡창지대인 교동평야에서 한 해 생산되는 쌀은 풍년이 들면 강화 주민이 10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의 섬이다.
교동농협미곡종합처리장 못 미쳐 양갑교를 만나면서 나들길은 우측으로 들어서서 끝이 없는 것 같은 길고 긴 농로를 따라 걷는다. 예전에 이 길을 걸을 때면 누군가 박인희의 "끝없는 길"을 부르던 생각이 난다. 끝없이 펼쳐지는 교동평야는 푸르른 벌판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양갑교에서 40여분 달려가다 보니 난정저수지에 물을 끌어올리는 난정양수장이 마중 나온다. 난정저수지는 강화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저장량이 620만 톤이라고 한다. 지난 2006년 준공된 이 저수지는 3대의 엔진양수기(30마력)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호수를 연상케하는 난정저수지 제방에 올라선다. 제방에서 내려다보는 교동평야 그리고 한가로운 난정리가 정겹다. 난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서면 난곶리에 구정동의 일부를 합하고 난곶리와 구정동에서 한글 자씩 따서 난정리라 하였다.
겨울에 통과하면서 물이 만수위를 보곤 했는데 모내기를 끝낸 난정저수지의 수위는 많이 내려가 있다. 제방길에 올라 약 20분 정도 걸어 끝 지점에 서면 난정해바라기정원이 마중 나온다. 지금은 정원에서 해바라기를 볼 수 없다.
난정저수지가 만들어 지기 전에 삶을 꾸려오던 마을 사람들이 난정저수지를 만들 수 있도록 그 터를 내준 공에 감사해서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난정저수지수몰헌정기념비를 지나면서 해바라기정원을 걷다 보면 언제나 변함없이 오가는 나들꾼들을 마중하는 나홀로 나무가 반갑다.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베어지지 않고 작은 흙무덤 위에서 홀로서서 오가는 나들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예전과는 달리 풍성하게 자라나 당당하게 서있다.
수정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잠시 언덕을 올라서면 조선시대 전통한증막이 마중 나온다. 수정산 오름길에서 만나는 전통시대의 한증막은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반까지 동네사람들이 사용했었다. 소나무에 불을 지펴 밀폐된 한증막을 가열시키고 일정한 온도가 괴면 물을 뿌려 불을 끈 후, 헝겹이나 가마니를 두르고 들어가 땀을 내는 방법으로 한증막을 즐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