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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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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흐른다 스크랩 고구려사
호젓한오솔길 추천 0 조회 18 07.11.23 18: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모수 유화 주몽 고구려 유리 소서노 비류 백제 온조 연개소문 대조영 발해 신라 가야... 역사속의 시대과정 알아보기...
 

해모수 유화 주몽 고구려 유리 소서노 비류 백제 온조

연개소문 대조영 발해 신라 가야...

역사속의 시대과정 알아보기...

 

방송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드라마를 시청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해당 채널을 돌리기에 요즘 바쁘다.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는 저 드라마 내용이 진짜 맞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드라마속 흘러가는 내용이 왜 꼭 저렇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과 미칠것 같은 흥분으로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하면서 항상 다음회 방송 시간을 기다리게 합니다.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방송국들이 만들어 내는 사극들은

천편일률(千篇一律

 )로 조선왕조에 관한 것들만 드라마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현존해 오는 고대의 기록들은 대부분 전쟁의 화염속에서 사라지고

몇 안되는 역사서들 중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만이 우리의 고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로 각본하기엔 그 자료가 심하게 부족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3대 방송사에서 각축하듯 방영하고 있는

MBC드라마 주몽,

SBS드라마 연개소문,

KBS드라마 대조영,

이 드라마를 보다가 보면 재미를 위해 작가의 편향대로

우리 스스로 역사를 해석하여 흘러가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고대 사극 드라마속의 역사가 진짜 맞는 것일까? 하는 이해를 돕기위해

그 시대과정을 좀 더 확대해서 알아보고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을 관련글을 참고하여 

사극에 관련되어 나오는 나라와 인물, 그 시대 역사속의 변천과정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를 한 내용입니다.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도 신들이 자주 등장하고 신들의 아들이 인간을 지배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도 주몽신화, 박혁거세 신화 등....

나라를 세운 성왕들을 신격화 한데는 백성들에게 왕이 특별하고 하늘에서 내린 존재,

즉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보면 '설화'에 가까운 고대의 역사이지만,

설화의 탄생의 원초석은 역사와 맞물려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고 인기드라마 주몽(80회 종영)

 

주몽의 출생과 관련하여 궁금증?

해부루의 아버지와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라는 인물인데...

해모수가 해부루의 아버지와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 인지는 알 수가 없다.

 

먼 옛날 조선(고조선)이 멸망하고 조선의 유민들이 각 부족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한나라의 세력이 커져 조선의 땅을 복속하고 유민들은 한나라 노예가 되어 고초를 겪던 시절이 있었다.

 

천제인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늘로 부터 내려와

홀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그 나라의 이름을 북부여라고 하였다.

이후로 해모수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해부루였다.

해부루는 왕이되어 나라를 통치하였으나 아들이 없었고,

아들을 얻기위해 산천으로 기도를 하러 다니던 중  곤연이라는 연못 근처의 커다란 바위 아래에서

왕이 타고 있던 말이 눈물을 흘리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은 바위를 파 보았다.

빛이 나는 황금 개구리 형상의 어린 아이를 얻는다.

해부루는 아이의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아들을 삼는다.

해부루가 나라를 다스릴때 재상 아란불에게 해모수가 꿈에 새로운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할 터이니 북부여의 도읍을 옮기라 명한다. 해부루는 아란불의 말을 따라 가섭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라 국호를 정한다.

 

그후 금와가 왕위에 오른뒤 말을 타고 우발수라는 곳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유화라는 아리따운 여인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와왕이 이유를 묻자 여인은 스스로를 물의 신 하백의 딸이라 칭하고,

자매들과 놀러 나왔다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해모수라는 자가 나타나

유화를 유혹한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그 뒤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 일을 알게된 하백은 딸을 내 쫒았다고 고한다.

 

이유야 어쨌든 금와왕은 유화의 말이 의심스럽기도 하여 유화를 궁으로 데려와 별궁에 두고 감시한다.

유화가 별궁에 머무는 동안 빛이 들지 않았던 방에 갑자기 찬란한 햇볕이 들어온다.

유화가 몸을 피하는 곳으로 빛이 따라다니더니 몇달이 지난후 유화는 커다란 알을 낳게 된다.

 

이를 괴이히 여긴 금와왕은 알을 짐승의 우리에 던지라 명한다.

그러나 짐승의 우리에 던져진 알을 짐승이 품고 해하지 않자 다시 길가에 버리라 명한다.

길에 다니던 말이나 가축들이 다시 알을 피해 다니자, 이번에는 들판에 버리게 한다.

그러자 들판을 날아다니던 새들이 날아와 알을 품어준다.

 

금와왕과 신하들은 다시 알을 가져와 깨뜨리려 하지만 알은 깨지지 않자,

금와왕은 더이상 알을 없애는 것을 채념하고 알을 유화에게 돌려준다.

 

그후 유화의 품에 돌아온 알이 깨어나면서 건강하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사내아이는 7살이 되던 해부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 정도로 활솜씨가 뛰어 났으며, 머리가 명석하고 총기가 넘쳤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으며, 아이의 이름도 주몽이라 불리게 된다.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아들들과 함께 자라면서 단연 돋보이고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금와왕의 첫째아들 대소는 이를 심하게 못마땅하게 여겨 왕에게 간언하여

"주몽은 장차 부여를 해할 인물이니 속히 죽이십시오"라고 하지만 주몽을 어여삐 여긴 금와왕은

대소의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말을 길들이는 양마원으로 보낸다.

 

주몽은 양마원에서 좋은 말 한마리를 골라 잘 먹이지 않아 야위게 만들고

나머지 말들에게는 여물을 주어 살찌게 만들었다.

왕과 왕자들이 사냥을 하는 날 금와왕은 말을 잘 키운 주몽을 칭찬하며 가장 야윈 말을 주몽에게 내린다.

마침내 사냥이 시작되고 주몽은 금와왕보다 훨씬 많은 짐승을 잡게 된다.

 

대소와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왕에게 주몽이를 죽일 것을 간언한다.

이를 눈치챈 유화는 아들에게 금와왕과 대소태자가 주몽이를 죽이려고 하니 부여를 떠나라 명한다.

 

주몽은 오랜 친구인 오이, 말이, 협보와 함께 부여를 빠져 나간다.

이를 눈치챈 대소는 병사를 모아 주몽을 잡으려고 뒤를 쫒는다.

주몽이 압록강 동부의 엄사수라는 곳에 당도하였지만, 배도 없이 압록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주몽은 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 쳤다.

"나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이다. 나에게 길을 열어라"

라고 명령하자 물속에서 갑자기 자라와 온갖 물고기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준다.

이렇게 주몽은 세 친구와 함께 무사히 엄사수를 건너가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몽과 세 친구는 졸본부여에 이르게 된다.

졸본부여는 5개의 부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주몽은 이곳에서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주몽의 비범함을 안 연타발은 그의 둘째딸 소서노와 주몽을 혼인 시키고,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얻는다.

 

주몽은 스스로의 성을 고구려의 고를 따 고주몽이라 칭하고,

주변의 소수국가들을 복속시키며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다.

이때 주몽의 처 소서노는 주몽의 조력자로 지대한 공을 세운다.

 

훗날...주몽이 부여를 탈출하기전에 혼인했던 예씨부인(예소야)과 아들 유리가 찾아온다.

7각의 바위위에 세워진 소나무 밑에 숨겨진 부러진 칼날을 들고 찾아온 유리에게 주몽은 태자로 책봉한다.

그후 동명성왕 주몽이 붕어(崩御)하고 새로이 유리가 왕위에 오른다.

 

비류와 온조는 아버지 주몽이 부여에서 온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에 크게 실망하여 어머니 소서노와 두 왕자를 따르는 백성과 신하들을 데리고 남하한다.

온조는 위례(지금의 강동구 길동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하나,

훗날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이 합해져 백제라 연호를 정하게 된다.

 


고구려(高句麗) 건국

임인년(B.C. 79),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고주몽)는

해모수의 3대 손인 고모수(高慕漱 : 본명은 불리지(弗離支), 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와

하백녀 유화(宥和) 부인과의 사이에서 동부여(가섭원부여 : 해모수계)에서 태어났다.

 

임술년(B.C. 59), 동부여의 사람들이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죽이려 하자

졸본부여(卒本夫餘 : 동명계)로 도망 오게 된다.
고무서(高無胥 : 북부여 6세 단군)의 사위(둘째 딸 예씨(禮氏)와 결혼)가 되어 대통을 잇게 되나

하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므로 다시 동남쪽으로 도망, 비류수 상류에 이르니

이곳에 있던 소서노(召西奴)가 아버지 연타발(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은 후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고추모(고주몽)와 결혼하였다.

B.C. 58 고추모(고주몽)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高句麗) 성장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연호는 다물(多勿)이었다.

다물(多勿)이란 땅을 되물린다는 의미의 고어이며,

단군 조선의 잃어버린 정신과 영토를 다시 찾는다는 염원이 서린 말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조선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건국초기부터 고토 회복을 위해 주변 소국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통합에 나서,

동명성제 대에는 비류국(沸流國), 해인국(海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2대 유리명제 대에는 선비족(鮮卑族)과 양맥(梁貊)을,

대무신제 대에는 개마국(蓋馬國), 구다국(句茶國), 낙랑국(樂浪國)을 차례로 병합하였다.

소국들을 병합하여 세력이 신장된 고구려는

단군 조선 멸망 시에 요동지방에 진출했던 한(漢)의 세력을 물려받은 후한(後漢)과 세 대결을 시작했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후한은 서기 28년 대무신제 때

요동태수가 이끄는 10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명재상 을두지의 지휘아래

일치단결 하여 싸우는 고구려 군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일이 있다.

또한 태조제대에 갈사국(曷思國 : 남동부여), 조나국(藻那國), 주나국(朱那國),

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면서 세력이 크게 팽창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후한(後漢)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강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후한의 요동지역을 선제 공격하여 6개 현을 정복하였고,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여 후한의 세력을 위축 시켰으며,

요동지역 일부를 점령하였고, 남으로는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며 산동반도는 물론

그 너머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명실공히 대륙의 맹주로 등장했다.

또한 태조대제 이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종주국임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고구려(高句麗) 흥망, 의의 

고구려는 광개토경호태왕(광개토대제), 장수홍제호태열제(장수왕),

문자호태열제(문자왕)등의 치세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국가들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더 강성해졌다.
그리고 백제의 세력권이었던 제, 노, 오, 월나라까지도 병합하고,

평원왕(평강상호태열제), 영양왕(영양무원호태열제)등을 거치면서

그 세력은 더운 커지고 번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300년 가까운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인 수(隨)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수(隨)나라는 대륙을 통일하자 고구려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연전연패 한 후 결국 멸망하고,

수의 뒤를 이어 중원을 통일한 당(唐)나라 역시

고구려를 제압할 필요를 절감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외침에 강했던 고구려는 내부의 분열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함으로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서한, 신, 동한, 위, 촉, 오, 서진, 동진, 5족의 16국

남북조의 9국, 수, 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개의 나라가 명멸하는 동안

천년왕조 고구려는 북방의 방파제, 그리고 겨레의 맏형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백제(百濟) 건국

백제(百濟)는 고주몽의 적자(嫡子)인 유리(琉璃)가 고구려로 오자

소서노(召西奴)가 장차 자신의 아들들에게 이로움이 없다고 판단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과 함께 B.C. 32년에 고구려를 떠나 요동반도의

대수(帶水)와 패수(浿水) 사이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는데

B.C. 19년에 소서노가 죽고 비류(沸流)가 섰다. 이것이 바로 비류백제이다.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동생인 온조(溫祚)는 마여, 오간 등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B.C. 18년에 마한의 미추홀에 이르러 한산의 부아악(負兒岳)에 이르러 지형을 살핀 후

한수(漢水 : 한강)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그 후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들이 백제로 귀순해 왔는데
아마 A.D. 25년에 해성(海城) 부근의

남옥저인들이 백제로 투항해 온 것은 사실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본다.

또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같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비류백제가 한(요동)과 고구려 사이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는 A.D. 9년에 마한을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백제(百濟) 발전

온조는 부여출신 이라 하여 스스로를 부여씨라 했다.

그리고 고비류의 백성들을 통합하여 백제가 건국될 당시 비류 왕족의 일부는

백제의 왕족이나 외척, 또는 귀족이 되면서 백제 8대성의 하나인 진씨나 우씨가 되었고

일부는 왜국에 건너가 지배층이 되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영도적 국가였던 목지국 까지 병합하면서 세력이 강성해 졌다.

고이왕은 국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단기 2579년 (서기 246년)에는 위나라의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낙랑과 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려할 때

백제의 좌장 진충을 파견하여 요동반도에 있는 낙랑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분서왕 때에 이르러는 낙랑의 서현을 점령하였고,

비류왕은 요서군(지금의 하북성)과 진평군(지금의 하남성)의 2개군을 점령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한반도의 남가라국, 안라국, 다라국등의 6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소국을 병합하였으며 대방지역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당시 왜국(倭國)은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대국 이후 가야 계열 신공황후의 사후 분열 상태에 있었는데,

근초고왕은 단기 2699년(서기 366년)에 왕자 (후일의 근구수왕)을 候王으로 삼아

이때부터 백제왕이 왜국을 직할통치하기 시작했다

백제(百濟) 멸망과 일본의 독립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전 지역에서 일어난 백제의 복국운동은 바다건어 倭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며 왜국의 37대 천황이었던 寶皇女(齊明女帝)는

백제의 복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왜국 군대가 백촌강에서 당군에 패해 군선 400여 척을 잃고,

백제 본국의 주유성에서 지휘부의 내부분열로 주유성이 함락되어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주유성 함락소식에 왜인들은 "주유(주유성)가 이미 항복하였다. 어찌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끊어졌다.

이제부터 조상의 묘소에도 갈 수가 없다"(일본서기의 기록)라고 하였다.
이후 본국을 잃은 왜인들은 새로운 이름의 나라와 정통성을 뒷받침 해줄 새로운 역사,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의자왕의 동생인 齊明女帝가 죽자 왜의 지도층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을 받들어 텐지천황(38대 天智天皇)이라하고

나라 이름을 日本이라고 붙였다 (단기3001년, 서기668년)

나라이름을 바꾸면서 가야, 신라, 백제 등의 혈통적, 문화적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서기(日本書記), 고사기(古事記), 신라성씨록(新撰性氏錄) 등

이른바 일본의 3대 사서 편찬 작업이다.
이때부터 왜 열도는 한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왜국의 역사는 한민족사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역사로 독립해 나가게 된다.

신라(新羅) 건국  


신라(新羅)는 부여왕(동부여(가섭원부여)의 해부루)의 딸 파소(婆蘇)가

남편 없이 애를 배어 의심을 받자 눈수(嫩水)로부터 도망하여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내을촌(奈乙村)에 이르러 박혁거세를 낳았다.

이에 소벌도리(蘇伐都利 : 고허촌장)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B.C. 57년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서간(居西干 : 居世干)으로 추대하여

서라벌에 도읍하고 국명을 사로(斯盧)라 하였는데 진한(辰韓)은 만주에 있던

진조선의 유민이며 동부여 또한 진조선→북부여→동부여로 이어지는

진한의 왕통이기 때문에 박혁거세를 그들의 왕으로 세운 것이다.


신라(新羅) 흥망, 의의

박혁거세의 자손이 계속 왕위를 이어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으로 내려가다가

바닷가에 상륙한 석탈해가 4대 왕인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또 김알지의 6대 손인 김 미추는 초대 김씨 왕이 되었다.

서기 2-3세기를 거치는 동안 신라는 우시상, 거치산국, 음즙벌, 비지, 실직국, 압독국 등을 병합하였고

박, 석, 김, 세씨족에서 지배세력이 교체되어 나왔다.

그러나 서기 4세기 내물 마립간 때에는 김 씨족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부족연맹적 성격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 때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는 등

국력의 급격한 신장을 맞이한 신라는 진흥왕 때 백제의 성왕과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에 진출한 후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연맹의 전지역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사국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민족의 눈으로 볼 때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

즉 외교를 통해 당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와 백제가 있던 지역을 점령하고 신라까지 통치하려다가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결사항전을 펼치자 결국 신라 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배신의 역사를 통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그후 영역이 확대되고

백제, 고구려의 견제 없이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 시기를 후기신라라 하며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260년을 말한다.

가야(伽倻)

가야(加羅)는 A.D. 42년에
김수로에 의해 금관(김해)에 건국되는 데

김수로를 흉노 휴도 왕의 후예로 보는 견해와 마한의 후예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한의 후예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단서대강(檀書大綱)>에 A.D. 9년에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하자 그 왕인 영왕(寧王 : 學)이 동쪽이 낙동강가로 달아나

가야(加羅)라 칭하고 구비봉 밑에 거하며 가야왕이라고 하고

그 아들 이비가지로 세자를 삼았으며, A.D. 16년에 영왕이 9간(九干)을 쳐서 그들을 차지했으며

A.D. 17년에 가야의 영왕이 죽고 이비가지가 섰으나

A.D. 42년에 가양의 이비가지가 죽자 그의 둘째아들인 뇌실청예(惱室靑裔)가

9간의 추대를 받아 금관에 도읍을 정하고 가락(駕洛)이라 하였으며 수로(首露)왕이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형인 뇌실주일(惱室朱日)은 고령에 대가야를 세웠다.

6대 좌지왕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된다.

A.D.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대진국

고구려가 망한 것은 A.D. 668년이요, 발해의 건국을 A.D. 699년이라고 볼 때

고구려가 망한 지 불과 31년 사이에 만주에서 고구려족은 사라지고

마치 말갈의 7부족이 만주 전체를 뒤덮은 것으로 오도(誤導)하고 있고

이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진국본기>에는 발해(大震國)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건국자는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인 대중상(大仲象)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중상(大仲象)은 발해의 1대 세조(世祖)로 휘(諱)는 중상(仲象) 혹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시호(諡號)는 진국열황제로 A.D. 668년 국호를 후고구려, 기원은 중광(重光)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2대 태조(太祖, A.D.699)의 휘(諱)는 조영(祚榮)이며, 시호(諡號)는 성무고황제로 A.D. 699년에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하였다가 A.D.713년에 국호를 다시 발해(연호는 천통)로 변경한다.

원래 진국(震國)은 단군 조선을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다.

대진의 영토는 5000리 번성기에는 9000리에 이르렀으며 역사는 229년간 지속되었다.

지나인들은 대진국이 발해만의 저쪽에 있다하여 발해(渤海)라 불렀다.

2대 성무고황제의 아들인 3대 무황제는 말갈족 중 독립을 끝까지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대진의 연맹에 복속시켰고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 냈다.

4대 광성문황제 때는 한단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다시 설립하고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단기고사를 강의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지배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9세기에 들어 대진국은 크게 융성하였으며 11대 선(宣)황제 때는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게된다.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대진국의 문화가 꽃피운 시기이다.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발해의 4대 왕인 광성문황제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되었는데

그 묘비에는 '大興寶歷孝感000法大王之二女也'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흥(大興)은 4대 광성문황제(世宗)의 연호인데, 이것을 기록한 사서는

<태백일사>밖에 없으니,『한단고기』<태백일사>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게 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그리고 이 연호의 발견으로 지나(중국)에서 주장하는 대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이 아니라 건원 칭제하는 황제국가였음이 드러났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 4대 세종(世宗), A.D.738∼794)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이는 대외적으로 당과 대등하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며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것 이기도하다. 그러나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대진국은

고구려, 백제와 비슷한 경로로 쇠망해 갔다.

당나라식 문물과 불교의 수용으로 대진의 주체성이 흐려져 갔다.

그리고 11대 선(宣)황제가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화 과정은 다른 종족들을 존중해 오던

대진국 연맹체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거란은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 집권화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서기 926년 대진국 15대 애제(哀帝)에 이르러 수도 상경을 점령하고 대진국을 멸망시켜 버렸다.

신라의 통일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무대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줄어들었고

대진국의 멸망으로 만주벌판과 시베리아가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후 우리민족은 대륙민족에서 본격적인 반도민족으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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