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른 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면 수행을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른 법을 배워서 먼저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통해 수행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문/사/수'의 의미이다.
바른 법을 배우고, 익히고, 그 법을 행하는 것 말고 다른 수행은 없다.
2. 수행은 마음으로 하는 것인가? 몸으로 하는 것인가?
=> 마음으로 한다는 것은 바른 법을 토대로 생각하고 사유한다는 것이고,
몸으로 한다는 것은 호흡수관을 하든, 백팔배를 하든, 불경을 독송하든 그런 것들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면 현재 세간에 나와 있는 온갖 수행법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3. 혼자서 문득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 혼자서 깨닫든, 배워서 깨닫든 수행의 목적은 하나다.
괴로움 해결이다.
바른 법을 배우지도 않고 문득 깨달음을 꿈꾸는 것은 남들과 다른 초월적 능력을 꿈꾸는 것이고,
그것이 곧 수행이라는 이름하에 오히려 남들과 차별화된 자신을 얻으려는 어리석음이다.
물론 바른 법을 깨달은 이가 없다면 스스로라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내 주변에 깨달은 이가 없는지 열심히 살핀 후에 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4. 수행은 타인을 비판하지 않고 사회와 조화를 이룬다?
=> 수행은 세간의 탐, 진, 치에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리석음을 비난하고, 거기서 벗어나라고 끊임없이 질책한다.
바른 법을 모르는 이는 깨달은 이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그 무엇과도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깨달은 이가 아상이 없다는 것은 탐, 진, 치의 토대가 되는 자존감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세간의 탐, 진, 치를 싫어하며,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과 화합하지 않는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뿌리가 되는 자존감 조차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허망한 것일 뿐임을 알아버렸다.
5. 나같은 사람이 수행은 무슨 수행?
=> '나같은 사람은 이 정도만 해도 됐지, 깨달음은 무슨 깨달음!'
이러한 생각은 겸손이 아니고 어리석음이다.
바른 법을 배우고 익히게 되면 한정할 수 없는 지혜를 갖출 수 있는 나를
단지 그렇게 대우받고 그렇게 살면서 행해왔다는 이유만으로
지혜로움이란 무엇인지, 어리석음이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미래에도 '어리석은 나'로 살아갈 것을 스스로 한계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6. 바른 수행의 결실은 단지 괴로움 없음이다?
=> 바른 수행의 결실이 단지 괴로움 없음이고 평온이라면
세간의 피눈물나는 욕망과 시기, 질투에 한번도 부딪혀본 적 없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밝고 평온한 마음이 곧 깨달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진무구한 아이도 세파에 노출되면 그 밝고 평온한 마음은 깨어져 버리고,
세월이 지나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바른 수행의 결실은 단지 괴로움 없는 평온한 느낌이 아니다.
어떠한 괴로움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증득이다.
그 지혜는 언어와 사고체계로 공유되는 것이고,
어떠한 괴로움에 대해서도 그 원인과 조건을 제시하여 거기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