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 송탄 이야기(2부)
어린시절 내 기억에 제일 많이 떠오르는 것은 공중에서 전투기가 굉음을 내면서 비행하는 모습과 동네 친구들과 황구지천에서 물고기 잡고 놀다가 미군부대 철조망에서 개와 함께 근무하던 병사에게 다가가서 “할로 껌줘” 하고 껌을 얻어 먹었던 시간들 여름에 동네 형들과 함께 구장터에 가서 물놀이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마을에 들러서 우물 물을 실컨 먹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다시 올수 없는 나의 청소년시절을 평택문화원에서 작성한 (“평택의 사라져가는 마을” 아카이브) 고향이야기를 보면서 대들보 친구들과 함께 잃혀저 가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오산공군기지 비행장이 1951년에 건설 되었다. 당시는 1.4후퇴로 국군과 유엔군이 평택 중앙동과 서정동 일대까지 밀렸다가 다시 밀고 올라가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던 시기였다. 그러더니 1952년이 되면서 올 해 안으로 ‘강제 이주해야한다’, ‘다들 나가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 중에는 일가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머지주민들은 어떻게 이주해야할지 우왕좌왕했다. 정부에서는 1개 반(10호)에 네모진 하얀 텐트 한 동씩을 지급했고, 각목 12자짜리를 다섯 개씩 지급했다. 그러고는 약 15일 기간을 주고 ‘빨리 나가라, 안 나가면 불도저로 밀어버린다’며 협박했다.
보상비나 이주대책도 없이 쫓겨난 주민들은 가족의 안전과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적봉리나 장등리처럼 텐트를 치거나 집을 지을 산이나 땅도 없었다. 이주 초기 주민들은 주변의 다른 마을에 가서 방을 얻어 생활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없었던 것은 비행장 건설이 진행되는 1년 동안은 수용된 지역에서도 임시로 경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보유하고 있던 쌀로 이 농지들을 임차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는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에게 일자리 제공도 하지 않았다. 당시 비행장 건설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전국에서 수많은 노무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주민들을 우선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몇몇은 공사현장에 일자리를 얻어 다니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날품을 팔아 먹고 살았다.
비행장 건설은 진위천변의 모래를 퍼다가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었다. 활주로 주변에는 미군막사도 지어졌다. 미군기지 정문이 있었던 신장동 제역동마을 앞으로는 하꼬방들이 지어졌다.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상자와 각목으로 지은 뒤 루핑지붕을 한 하꼬방들의 모습은 흡사 난민촌을 연상케 했다. 김범렬씨는 비행장이 건설되고 전투기들이 뜨고 내리는 모습을 보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주민들은 미군기지 주둔으로 마을이 망했다고 인식했다. 땅도 기름지고 마을도 포실해서 미군기지만 아니었으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나중에 이승만 정권에서 채권으로 보상을 했지만 물가 대비 적은 금액이었고 형편이 어려워서 미리 싼값에 처분했기 때문에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김범렬씨처럼 아예 고향을 등진 사람들은 고향마을도 잃고 이웃 사람들과도 헤어져 떠도는 유랑민이 되어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았다. 남북의 분단, 미군기지의 주둔이 가져온 아픔이다.
신장1동은 오산공군기지 정문 앞 일대의 마을이다. 이 지역은 조선후기 진위현 일탄면이었다.
19세기 중엽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도 신장리(동)에 장시(場市)가 표기된 것을 보면 마을의 형성은 신장(또는 구거리장)과 관련 있을 것이다. 문헌상으로 신장동과 관련된 기록은 1911년 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는 「조선지지자료」다. 이곳에는 일탄면에 신장리와 제역동이 나오는데 이 마을들이 신장동의 근간이다. 신장동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신장리와 제역동을 통폐합하여 송탄면 신장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부터 제역동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경관이 변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신장1동의 자연마을은 구장터, 남산터, 목천(나무내), 제역동이 있다. 구장터는 19세기 후반 부터 장터가 있던 마을이다. 주민들은 구장터가 일탄면의 중심이었다고 말한다. 구장터에 장시(場市)가 열렸던 것은 뒤쪽으로 진위천 수로가 연결되었고, 진위현의 읍치(邑治) 봉남리에서 진위현 해창(海倉)으로 연결된 도로가 근처 숯고개를 지났으며, 진위천 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 가운데 하나였던 서탄면 항곶진으로 연결된 길이 신장리(동)에서 분기(分岐)했기 때문이다. 남산터와 목천은 독립된 마을이 아니었다가 일제강점기와 미군기지가 주둔하며 인구가 증가하여 분동되었다.
구장터는 해방 전후 전체 규모가 50호가 안 되었다. 그러다가 오산공군기지 건설로 폐동된 야리, 신야리 주민들이 일부 이주하면서 55~60호로 늘었다. 성씨는 밀양 박씨가 많았다. 박성만 노인회장(남, 1945년생)은 전체 50호에서 20호는 박씨였다고 말했다. 마을에는 박종희씨가 운영하던 방앗간(정미소)도 있었다. 박종희씨 방앗간은 규모가 커서 목천마을을 비롯해서 주변에서 쌀을 도정하러 왔다.
구장터는 지대가 낮아 식수가 부족했다. 지하수를 파면 건건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진위천 상류 봉남리 앞 미시보의 물을 끌어다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했다. 수로(水路)는 구장교 아래로 흘렀다. 그래서 매년 정월이면‘구장교’ 위에서 정제사(우물고사)를 지냈다. 우물고사를 지낼 때는 생기복덕을 따져 제주를 선출하고 소머리와 시루떡을 해 놓고 제를 올렸다. 구장교는 구장터 주민들이 외부로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야 서정역 앞으로도 가고 적봉리와 황구지리 방면으로도 나갈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농업지대였다. 적봉들을 중심으로 논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밭농사도 지었다. 1980, 90년대 이후로는 비닐하우스 재배도 성했다. 1952년 미군기지가 주둔한 뒤로는 미군기지에 다니는 사람도 나타났지만 두 사람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매달 월급을 받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에 매력을 느껴 점차 늘어났지만 많은 수가 다니지는 않았다. 구장터 마을주민들의 경제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군기지의 주둔이다. 미군기지 주둔으로 적봉들의 주 경작지가 수용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마을 토박이 박성만 회장(1945년생)도 농지가 수용되면서 마을이 가난해졌다고 말했다. 더구나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오랫동안 빈한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마을이 폐동된 것도 아니어서 송탄면사무소에서 지급했던 밀가루 같은 구호식량도 지급받지 못했다. 아이들 교육수준도 이 시기를 거치며 낮아졌다. 아이들은 신장동 일대를 지나며 꿀꿀이죽으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상급학교 진학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마을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님 농사를 도우며 나무하러 다니고 소꼴을 베러 다녔다.
(비행기 소음공해로 지산동으로 집단 이주)
구장터마을은 오산공군기지 비행기 착륙에 따른 소음공해로 2008년 지산동 동안마을로 집단이주했다. 오산공군기지는 태평양사령부 산하 제51전투비행여단이 주둔하고 있어 F15, F16, A10,C130 등 다양한 항공기가 운용되고 있다. 특히 구장터는 비행기의 착륙지점에 위치하여 각종 비행사고에 노출되었으며 비행기 소음으로 인한 각종 피해들이 속출했다. 2008년 7, 8월 동안 소음진동자동측정기로 측정한 결과표를 보면 비행기 착륙지점인 진위면 신리와 신장1동이 각각 87.9데시벨과 83.6 데시벨로 가장 높다. 당시 주민들의 반응을 보면 ‘총이라도 있었으면 총격을 가해 추락시키고 싶은 심정’이라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구장터 주민 박성만(남, 1945년생)씨도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는데 비행기 착륙으로 인한 소음과 바람으로 하우스 비닐이 날아가기도 했고 송아지를 유산하거나 기형 송아지를 낳는 사례도 발생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심각한 소음공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황구지리와 함께 평택시와 평택시의회에 이주대책을 요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주문제가 공론화되고 소음공해 측정을 다시 했는데 현장조사를 잘못해서 측정치가 너무 낮게 나와 보상금이 턱없이 적었다. 다시 항의해서 측정을 다시 하고 보상문제 재협상을 한 결과 주민들의 집단 이주와 보상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주민여론조사 결과 92%가 이주에 찬성했다. 일부 노인들만 살던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주단지로 주민들은 고덕면의 알파탄약고 자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제공되는 부지가 1호당 70, 80평에 불과하여 주민들이 텃밭을 일굴 땅도 없었다. 그래서 박성만씨 주도로 주민들 재동의를 받아 지산동으로 옮기기로 하고 평당 55만원씩 150평을 요구했다. 공여 면적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번에는 1년 동안 논의하는 과정에서 땅값이 올라 문제가 되었다. 결국 주민들은 평택시 및 지주들과 타협하여 평당 77만원에 1호 당 150평씩 불하받고 2008년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집단 이주했다.
3만9245m2면적에 조성된 이주단지에는 42세대가 입주했다. 조성 과정에서 주택건설은 개인적으로 했다. 주택은 작게는 99m2에서 크게는 264m2로 지어졌다. 노인회장 박성만씨는 팽성읍에 대토를 구입했다. 이주 후 주민들 중에 농사 짓는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다. 경작지를 상실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보상금을 자녀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집을 줄여 나간 사람도 있고, 전세를 놓고 나간 사람들도 있다.
신장동의 큰 변화는 6.25전쟁이 가져왔다. 1951년 미군이 신장리, 적봉리, 야리, 신야리 일대에 오산공군기지(Osan Air Base)를 조성하면서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오산공군기지(Osan Air Base) 건설은 1951년 11월경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전투지원단을 지원하는 공군부대 주둔지로 송탄면 신장리 일부와 서탄면 적봉리, 장등리, 야리, 신야리 일대를 지정했다. 미국 측의 요구에 따라 한국정부는 1523.11에이커(약1,864,551.76평)을 공여했다.
초기 기지의 명칭은 오산리 AB(Osan-Ni AB)로 명명했다.16) 1952년 3월에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여 두 달 반 만에 활주로공사를 마쳤으며 그 해 11월 전투폭격비행단과 비행단에 소속된 F-51전투비행중대를 비롯한 두 개 중대를 배치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로 주한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뒤에는 미 제5공군 본부를 주둔시켜 본격적인 기지운용에 들어갔다. 1954년 1월에는 항공전술본부가 재배치되면서 오산공군기지는 주한미공군의 주된 허브기지가 되었다.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 평택시·평택문화원, 2014
미군기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1952년부터 공여지에 포함된 마을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예컨대 원적봉 마을과 장등1리 긴등마을은 마을 뒤편 산등성이로 집단 이주했으며, 야리, 신야리, 금각1리(구 농소리) 주민들은 경작지와 가까운 신장1동 구장터(폐동)와 제역동, 서탄면 황구지리,금각2리, 금암리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통문이 설치된 적봉리와 서정동 사거리 일대, 현재 미군기지 정문이 있는 신장동 제역동(일명 지골)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6.25전쟁 직후 기지촌은 풍부한 일거리와 상업 활동에 편리한 지역이었고 먹거리도 풍부했다. 이에 따라 전쟁피난민과 빈농들, 돈과 먹거리, 일자리가 필요한 다양한 사람들이 미군기지촌으로 몰려들었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기지촌은 날로 확장되었다. 하천과 논밭 또는 참나무가 무성했던 산등성이에 불과했던 신장2동 송월동과 밀월동에도 주택과 상가,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교통대가 있었던 숯고개 아래 삼거리에도 일명 아침장(송북시장)과 상가, 금융기관, 터미널 등이 자리 잡았다. 미군기지 정문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사거리와 적봉리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는 군산 등에 정착했던 황해도 피난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일명 ‘황해도촌(신창동)’을 형성했고, 그 옆으로는 미군기지 노무자 등이 복창동을 형성했다. 고덕면 당현리와 적봉리, 복창동이 갈라지는 지점의 사거리에도 상가와 민가들이 뒤섞였다. 형성 초기의 기지촌은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종이상자, 나무로 된 과일상자와 같은 각종 물자들로 지은 속칭 ‘하꼬방’들이었다. 서정동 신창마을과 복창동 언덕배기에는 땅굴을 파고 나뭇가지와 흙으로 마감한 ‘뗏막’이러고 불렀던 막집들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다보니 기지촌의 인심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절도나 상해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또 잘못하여 화재라도 발생하면 순식간에 ‘하꼬방’ 들을 불태워버렸다. 하꼬방은 기지촌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제역동(제골, 지골) 일대 신장쇼핑몰 거리를 중심으로 점차 벽돌이나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뗏막과하꼬방도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벽돌집으로 개선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기지촌은 평택시의 다른 도시나 주변의 농촌지역과 구별된 독특한 생활방식과 문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기지촌이 확장되면서 미군기지 정문 앞의 제역동은 전통의 마을경관을 잃었다. 농업을 생업으로 살아왔던 주민들은 서둘러 주택구조를 바꿔 임대업 등으로 전환했고, 마을공동우물가에는 영천목욕탕과 여관이 들어섰다. 남산터는 마을은 유지되었지만 주변 경관은 바뀌었다. 목천과 구장터 마을은 전통의 경관과 마을이 유지되었고 농업 위주의 경제활동이 계속되었지만 적봉리 일대의 주 경작지가 미군기지에 수용되면서 경제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미군기지 취직에도 부정적인데다 활주로 시작지점에 마을이 위치하여 비행기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지촌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한가한 농촌지역에 불과했던 신장동과 신창동, 복창동, 사거리마을 등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탈바꿈했으며, 매년 수해로 큰 피해를 입혔던 중앙국제시장 일대는 1970년대 초 복개되어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다. 미군기지 주둔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1961년에는 34,470명이었던 송탄인구는 1964년에는 4만명을 넘겼으며, 1974년에는 55,363명으로 늘어났다.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도시기반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도로는 신장쇼핑몰을 가로질로 송북시장 앞 일명 교통대를 거쳐 숯고개(쑥고개)로 오르거나 좌회전하여 오산방면으로 나가는 길 외에는 없었다. 또 큰 길이 지나는 곳에는 철도건널목이 있어 위험했으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비포장이어서 비만 내리면 질퍽거렸다. 1971년 송탄읍에서는 증가하는 인구에 대비하고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철도횡단 파선교’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1971년 신장고가육교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예산상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3차 공사를 일부 마무리하여 개통했다. 송탄고가교가 건설되면서 외부에서 오산공군기지로의 접근이 원활해졌다.
여기까지 고향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동네가 이렇게 형성되고 변모하여 발전 되었구나 하며 마음이 뭉클하고 감회가 있었다.
(“평택의 사라져가는 마을” 아카이브에서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