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3. 【경운재】(경주최씨)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랜드마크
글·송은석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앞서 우리는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봉안된 대구의 「문창공 영당」을 살펴본바가 있다. (☞http://cafe.daum.net/3169179/Dbvq/380) 「문창공 영당」이 자리한 그 주변 일대는 명실공히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중」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영당을 비롯하여, 파조 이하 직계 3대의 제단 2기(1·2世)와 묘소(3世) 1기 그리고 광정공파를 대표하는 재실 2개가 이 지역에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경주최씨 광정공파 1세`2세 제단
제단 옆 문창공 영당
대구도심에서 불과 20여분 거리 내에 이렇듯 한 종중을 대표하는 중요한 전통문화유적이 있건만,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하긴 앞만 보고 달려도 늘 불안하기만 한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여유가 있어 이렇듯 조상과 그 유적을 돌아보는 사치를 누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필자와 함께 대구지역의 재실들을 둘러보고 있는 독자들은 모르긴 해도 정말 팔자 편하고, 배짱 좋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대책 없는 호화사치를 누릴 수가 있겠는가?
이만 각설하고,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대표 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운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광정공파를 대표하는 재실, 경운재(景雲齋)
「문창공 영당」 맞은편에는 격식을 잘 갖춘 전통 한옥이 있다. 그 규모가 제법 웅장한데 이곳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경운재(景雲齋)」이다. 참고로 경부고속도로 도동분기점 부근을 지날 때, 도로 약간 너머 북쪽을 바라보면 검은색 골기와 지붕을 이고 있는 한옥건물이 살짝 보인다. 이 건물이 「문창공 영당」인데 그 앞쪽에 「경운재」가 있다.
「경운재」는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의 재실로 ‘광정공 최단(崔鄲)’, ‘참의공 최재전(崔在田)’을 추모하는 재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운재」 곁에 이들 두 선조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운재(景雲齋)」라는 재호를 곰곰이 살펴보노라면 기존의 의미 위에 또 다른 의미가 자꾸만 오버랩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바로 ‘운(雲)’ 자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실의 경우 그 이름이 ‘景Ο齋’ 로 되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추모하는 집’ 이란 의미이다. 이때 가운데 들어가는 글자가 그 재호(齋號·집의 이름)의 ‘핵심 keyword’가 된다. 예를 들어 ‘경현재(景賢齋)’라고 하면 ‘어질고 현명한 이를 추모하고 밝히는 집’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살펴보면 최단과 그의 아들인 최재전, 이 두 인물과 ‘雲’ 자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고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호의 키워드를 ‘雲’ 으로 설정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추측컨대 그 해답은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자·호’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의 자는 ‘해운(海雲)’이요, 호는 ‘고운(孤雲)’이라 소개하고 있다. 결국 경운재의 ‘雲’ 자는 여기에 기원한 것이다.
여하튼 경주최씨 광정공파 1세·2세 선조의 추모 재실을 표방한 「경운재」. 하지만 그 재호를 명명함에 있어서는 파조(派祖)를 넘어 그 시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에 대한 추모와 현창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던 것이다. 따라서 「경운재」는 협의의 의미에서는 ‘경주최씨 광정공파 파조를 기리는 추모 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광의의 의미에서는 ‘경주최씨 시조와 파조를 모두 기리고 추모하는 재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경운재기」·「경운재 상량문」·「경운재 낙성고유문」 등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참고로 「경운재 낙성고유문」 중 해당부분을 그대로 한 번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손이 번창하여 각파로 나누어져 그 중 광정공 일파가 달성에 세거하여 강북(江北) 해안(解顔)에서 서로 바라보는 곳에 문호(門戶)를 이루고 사니, 조선(祖先)을 추모하는 정이 간절한지라, 영당(影堂)을 세우고 영상(影像)을 봉안하여 매년 향사를 올림에 각처 자손들이 모여들어 참사(參祀)를 하고나니, 당실(堂室)이 협소하여 서로 읍양(揖讓)의 예를 행할 수 없으므로 여러 자손들이 합의하여 강당(講堂)을 짓기로 결정하고 영각(影閣) 옆에 터를 닦고 집(경모재)을 세우니...
「경운재」를 비롯해 「문창공영당」·「1·2세 제단」·「구회당(九會堂)」은 모두 동일한 영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향산의 남쪽에 넓은 공원을 조성하여 그 동편에 「구회당」·「영당」·「제단」, 서편에 「경운재」를 두었다.
정남향 건물인 「경운재」는 창학문(倡學門)이라 명명된 솟을삼문과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친회’ 문패가 붙어 있는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동소문의 지붕 용마루 위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작은 한 쌍의 오리상(像)이 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오리는 길(吉)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오리는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땅 위를 걸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물속과 물위에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부여된 상징이다. 따라서 경운재 동소문 위 오리상 역시 흉을 막고 길을 불러들인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조각상일 것이다.
경운재 정문인 창학문
경운재 동소문
(문위의 용마루를 자세히 보면 한쌍의 오리가 보인다)
창학문을 열고 경내로 들어가 정면을 바라보면, 정면에 강당인 「경운재」가 있고, 우측에 동재인 「의인재」, 좌측에 서재인 「거덕재」가 있다. 주 건물인 「경운재」는 그 규모가 굉장히 웅장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대청, 좌·우 1칸씩은 방으로 되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5칸 모두 전면으로 1칸의 전퇴를 두고 있다. 대청인 중당은 「숭례당(崇禮堂)」으로 편액 되어 있다.
경운재 강당 측면
경운재 강당
경운재 정면 여섯 기둥에는 모두 주련이 걸려 있다. 삼라만상은 반드시 그 시작이 있음을 노래한 시인데 다음과 같다.
곤륜동주오산벽(崑崙東走五山碧) 곤륜산이 동으로 뻗어 오산이 푸르고
성수북류일수황(星宿北流一水黃) 성수는 북으로 흘러 하나의 황하를 이루었네
함정조우세부세(含情朝雨細復細) 정을 머금은 아침 부슬비 내리고
농염호화개미개(弄艶好花開未開) 아름다운 꽃들은 피고 지고 저리 곱구나
모년귀와송정하(暮年歸臥松亭下) 노년에 돌아와 소나무 정자 아래 누우니
일말가야망리청(一抹伽倻望裏靑) 보이는 것은 가야산의 푸르름 뿐일세
강당 앞쪽의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건축양식이 서로 동일하다. 그런데 이 두 건물은 특이하게도 가운데 한 칸은 문을 반 칸 정 도 뒤로 물려 달아 문 앞쪽으로 반 칸 툇마루를 두고 있다. 참고로 동재는 「의인(依仁)」, 서재는 「거덕(據德)」이란 재호가 붙어 있다. 이는 모두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들로 각각 ‘인에 의거한다’, ‘덕을 지킨다’ 는 의미이다.
서재 거덕재
동재 의인재
「경운재」는 1995년에 낙성고유를 한 만큼 건물의 역사는 이제 겨우 2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운재」는 「구회당」·「문창공영당」·「제단」과 함께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성지(聖地)를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지역에 이처럼 광정공파 종중을 대표하는 유적들이 하나 둘 자리 잡게 된 연유는 3세조 최맹연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1·2세조 묘소는 실전) 이러한 연유로 이 지역에 1세·2세의 묘소를 대신하는 제단을 설치하고, 광정공파 종중차원에서 성역화사업을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광정공파 파조, 최단(崔鄲)
최치원을 시조로 하는 경주최씨는 그 계파가 크게 28개 파로 나뉜다고 한다. 이 중 여말선초의 시기 무신(武臣)으로 활략한 ‘최단(崔鄲)’이라는 인물을 파의 시조로 삼는 계파가 있으니, 바로 광정공파이다. 참고로 ‘광정(匡靖)’이라는 말은 최단의 시호이다.
광정공 최단은 시조 최치원의 11세손이다. 사료의 부족으로 그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문중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광정공사적」·「자헌대부병조판서시광정경주최공제단비명」 등을 참조해보면 대략적인 인물상은 확인이 가능하다.
그는 고려 말 무신으로서 「밀직부사」와 「안동대원수 겸 목사」를 역임했다. 1388년(우왕14)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동참했다. 이후 상주지역의 왜적 토벌과 대마도 왜구 토벌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1392년(태조1)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 되었고, 자헌대부 행 병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조정에는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불사이군 하였다고 전한다.
경주최씨 광정공파 1세조 최단은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장남인 ‘최재전(崔在田)’은 양산군수를 지내고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최재전의 장남 ‘최맹연(崔孟淵)’은 맹산현감을 역임했는데, 그가 바로 경주최씨 광정공파 대구입향조이다. 입향조 최맹연의 묘소는 이곳 경운재 뒤편 선영에 있다.
에필로그
오늘은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성지이자 랜드마크인 대구시 동구 도동의 「경운재」를 살펴보았다. 이 지역은 여러 측면에서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중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제단과 문창공 영당 전경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봉안된 「문창공영당」. 광정공파 1·2세의 제단과 재실인 「경운재」. 광정공파 입향조의 묘소와 과거 종중의 회합장소로 사용된 「구회당」 등이 이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 대구지역에는 약 19개의 경주최씨 종중의 재실이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다. 이들 대부분은 동구의 ‘도동·둔산동·봉무동·부동·용수동·지묘동·평광동’ 일원에 산재해 있다. 인연이 닿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들 재실들도 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
☞주요참고문헌: 경운재낙성고유첩
이상끝...
2015.2.4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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