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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한울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3.1절 이전부터 불리어지던 우리의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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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북 매국노는 이 나라 국회의원의 배지를 달고서도
"애국가는 독재 정권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마치 국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했으니,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뱉어내는 종북 매국노들에게 묻는다.
독재정권은 고사하고 8.15 해방 훨씬 이전부터 불러 온 애국가 임에
너희들은 우리 대한민국 헌법의 정통성이 3.1 운동에 있음은 아느냐.
아니면 알고서도 우리 헌법에 명기된 3.1 운동의 정통성까지 부인하려느냐.
기미년 3월 1일 정오.
총 한 발 쏘지 않고, 칼 한 자루 들지 않고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우리 한민족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고했으니
그 날 들었던 깃발이 무엇이며,
그 날 불렀던 노래가 무엇인지 아느냐.
다른 나라에서는 독립운동을 할 때 먼저 총과 칼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달랐으니
3.1 운동 당시 우리가 든 것은 공격용 물리적인 무기가 아니라
태극기와 애국가 그리고 '대한민국 만세'가 전부였고 주무기였다.
기미년 이전부터 태극기는 우리 국기였고,
3.1절 이전부터 애국가는 우리 국가였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있었으므로 우리 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들으라.
지금 들리는 이 노래가 바로 우리 애국가의 원천이니
가사는 있으되 곡이 없어
슬프디 슬픈 스코틀랜드 민요에 우리 노랫말을 붙여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말 달리던 독립군이
왜놈의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맞서
목이 터져라 부르다 피 흘리며 죽어갔는데
그래... 아무리 북한을 추종한다지만
어찌 이 애국가마저 부인한다는 말인가.
8.15 해방 이전부터 이미 전 민족에게 광범위하게 불리어졌던 이 애국가가
어찌 해방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려느냐.
보라. 애국가가 해방 보다 훨씬 이전에 자연발생적으로 불리워졌다는 증거가
인터넷만 뒤져도 불과 몇 분만에 태산처럼 쏟아지는데
이게 어찌 특정 정권 때 만들어졌다고 국민 앞에 거짓말을 늘어 놓을 수 있느냐.
조국을 위하여 흘렸던 순국선열의 피와 얼이 스민 애국가가
어찌 유독 네 놈들 귀에만 들리지 않는다 말이냐.
그러나 어찌 한 줌 너희들의 무리가 우리 가슴의 얼을 지울 수 있겠느냐.
내 가슴에 태극기 있고
내 귀에 애국가 울려 퍼지는데....
2012.06.16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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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불러 모은 어린 유관순은 손수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앞에 놓고 애국가를 불렀고 친구들은 따라 배웠다. 이렇게 태극기와 애극가는 3.1 운동 전에 아우내 장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3.1 운동 전, 이미 유관순은 이렇게 미리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 유관순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 평양 첫 시위인 '숭덕학교' 3·1운동
'군중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은 물론 노인과 일반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군중은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꽉 메웠다.' 비무장인 그들의 무기는 국기와 국가였다. .................. 켄덜의 'The Truth about Korea'(한국독립운동의 진상)에는 현장 목격담
'군중은 공원 밖으로 행진해 나가기 시작했고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근 10년이나 부르지 못했던 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 서재필의 전기 '한수의 여정'(보진재·1979)
1만 군중이 설움과 희열에 뒤섞여 목메어 울며 부르는 애국가의 노래 소리는 동남산에 메아리쳐 마치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죄행을 성토하고 그의 말로를 선포하는 듯한 그런 비장한 장면을 방불케 하였다.' .................. 중국 용정촌의 3월13일 독립선언식
'애국가 사건으로 잡힌 로희성(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삼정목 구십삼 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 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 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더라.' .................. 1924년 5월25일자 동아일보
1923년 4월10일 임시정부 창립일을 기념해 옥중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해주 형무소 서흥 분서에 수감된 이들이 '기념식을 하는 것이 옳다' 하고 22명이 일제히 '대한애국가'를 높이 불렀다. 그러자 간수들이 이 중 셋을 폭행해 중상을 입혔고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다. .................. 해주 형무소 애국가 사건
1927년 5월과 6월 사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완도의 '소안학교 돌연 폐쇄'와 같은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됐다. 1919년 3월15일 촉발된 만세운동에 이어 1927년까지 지속된 운동이 '소안도 사건'이다. 당시 105인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양기탁의 영향을 받은 송내호가 주도했다. 이 항일운동에서는 대중적인 '학도가'류와는 다른 항일투쟁가가 불렸다. 전남대 나승만, 중앙대 노동은 교수가 채록한 증언에 의하면 '쪽지에 가사를 적어 바지가랭이에 숨겨 다니며' 불렀고, 일경에 발각되면 '예외 없이 가택 수색으로 이어져 결국 주재소로 잡혀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책자 같은 것을 즈그들 못찾을 데다 감춰놓고 이따가는 떠들어보고….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 중 '애국가 봉창―학교 폐쇄'에 의하면, 1925년 경남 합천군 가회면 함방리의 파평윤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귀음의숙(龜陰義塾)에서 갑·을·병 3반 총 150명의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봉창케 했다고 해서 학교를 폐쇄했다. .................. 애국가 봉창―학교 폐쇄
평양 경창리에 사는 이봉훈(55)은 10월20일, 가족들이 교회에 간 사이 양잿물을 먹고 자살했다. 그의 아들 이××가 교사로 봉직하던 평양 모 전문학교에서 퇴직을 당한 것에 대한 충격 탓이다. 제지 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남도청에서는 학교에 교섭하야 자격이 없다고 퇴직을 시키게 했다 한다.' 5~6개월을 어렵게 살게 되자 부친이 이를 비관, 음독자살한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사를 파면시켰고, 그 때문에 전입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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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증거와 사료史料가 너무나 많음에
더 이상 찾아 낸다는 것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예서 줄입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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