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는 옛날부터 내러오는 선비이야기에서 꼭 언급하는 고장이있다. 바로 우 함양 좌 안동이다. 서울에서 보면 옛날 이곳에 선비가 많이 살고 양반의 고장으로 평판이 많았기 때문일것이다. 안동에서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내암마을 학봉김성일 도산서원 퇴계이황 등의 유적지는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방문객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며 경주의 양동마을 또한 그럴것이다. 이말은 쉽게 말해 옛 전통을 찾아보기 점차 힘들어졌고 관광객이 다 아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성사촌마을 이야기는 다르다. 점차 입소문을 타고 외국인이 가고 쉽어하는 곳 전통을 간직한 곳으로 올해 전통 종가 숙박이나 체험예약이 거의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이며 외조부가 송은 김광수이며 하회마을에서 지금도 불천위제사를 모시고 있는 송은 김광수의 따님 김자소자강자 김소강 할머니가 바로 서애 류성룡을 낳으신 분이다.
서애공은 외조부송은 김광수에게서 어린시절 20때까지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서애공 류성룡의 따님이 한산이씨 해산공 이문영과 혼인을 하였고 차남이신 수은공 이홍조이 안동에 낙향하면서 의성사촌마을과 인연이 있어 즉 외가인 관계로 의성 빙계서원 등등에서 지내셨다.
사실 이곳을 떠 받치는 중심에는 만취당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저자가 가족들만 모이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저번 연합 뉴스 기사에서 잠시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숨은 힌트가 있다.
만취당 14세 종손 김희윤(67)씨는 "중학교 시절 사촌마을에 비가 많이 오면 개울 건넛마을에 살던 친구들은 하교할 수 없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집에서 재우곤 했다"며 "지금 생각하니 종부였던 어머니도 '나눔과 베풂'이란 선조들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위 기사의 내용 속에 숨겨진 이야기 가족이 아니면 모르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이곳은 피를 나누지 않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도 없고 옛 전통을 중시하는 옛날 혈통문화 속에서 더욱 그런 상징의 의미가 있는 그런 곳이다.
옛날 나의 조부와 부친이 살던 곳에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다. 이곳에는 20가구도 안되는 곳에 저자의 증숙부의 후손 재종조부가구와 저자의 가구에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다.
바로 안동김씨 문중의 중심에 있고 문중의 상징인 만취당종가였다.
나의 첫째 누이가 조금만 더 성숙하였으면 뽑혔겠지만 아쉽게도 증숙부님의 손주따님이신 저자의 재종고모가 간택되었다.
살아생전 저자는 너무어려서 본 기억이 희미하지만 나의 형들은 모두다 기억한다.
그래서 현재의 만취당 종손은 나의 형님들과 함께 지냈고 저자의 재종고모 저자의 큰형등은 터울없이 지냈지만 항렬은 시간이 지나면서 함부러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위의 현재 만취당 종손의 모친 어머님이 저자의 가장가까운 친척 고인이신 한산인 재종고모 이윤희이다. 옛날 교편을 잡아 후학을 양성하시고 만취당의 종부로써 지금의 만취당을 다시 일으키신 분이다.
지금은 종손이 옛날을 생각하며 올리신 어머님 이야기가 바로 위 기사이다.
이곳과 저자의 집안은 대략 4번의 통혼을 하였다.
미국에 있는 주원 형님이 궁금해 하는 생부이신 석정공 이수학 선조님의 외가 진주강씨와 저자의 5대조 대은공 이수영과 대은공의 사촌이신 상서공 이수필의 외가 진주강씨 등의 학문은 진주강씨의 영향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 이곳에서 나온것이다.
바로 천사 김종덕의 후학이자 제자인 학문이 높으신 대학자 신암공 이병하의 문하에서 소실적 모두 글을 배운 것이다.대은 유고에 대은공 상서공의 기록이 나오며 대은공은 성장후 정재류치명과 지헌 최효술의 제자였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자료까지 고맙습니다()
여러 소식글 감사합니다~^.^
유정 대모님 장원 일가님 잘지내시죠 시간에 쫓겨 제대로 된 전체 이야기 완성을 못했습니다 다음에 더 자세한 소식 전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월 9월 초정일 1박 2일로 향사를 지낸다
서울에서 먼길을 향사 참여는 선비정신의 기개가 아니면 못 할 듯 합니다.
사진 소식과 건강한 모습 뵈오니 반갑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