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가요 이해와 감상]
고대 가요의 개요
1. 고대 가요의 정의
원시 종합 예술에서 분화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내용을 노래한 시가(詩歌)를 말한다. 우리 나라의 고대 가요는 언시적 서사 문학 가운데서 축도(祝禱), 기원(祈願)의 요소가 되는 부분이 분화되어 이루어졌다.
2. 고대 가요의 형성
원시 종합 예술에서 분화된 고대 가요는 집단적이고 서사적인 시가에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가로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은 한역(漢譯)되거나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훨씬 후대에 기록 문학으로 정착된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이나 연대는 알기가 어렵다.
향가(鄕歌) 문학이 고대 가요의 다채로운 형식과 달리 정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삼국 시대 중엽의 일 것으로 추측된다.
3. 고대 가요의 특징
1) 고대 가요는 집단의 활동이나 의식(儀式)과 관련된 측면이 많아 의식요, 노동요의 성격을 지니고 집단적인 가무의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시대가 지날수록 개인적 서정에 중점이 놓여지게 됨에 따라 점차 서정성 짙은 개인적 서정시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3) 고대 시가에는 설화가 삽입되어 전하는데, 이는 시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4) 당시에는 기록의 수단이 없었으므로 구전되다가 후대에 한자, 이두, 한글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형태가 많이 변용(變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우리 시가의 기본적 형식으로 두 토막씩 넉 줄 또는 네 토막씩 두 줄로 된 노래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4. 고대 가요의 문학사적 의의
1) 고대 가요는 우리 국문학 사상 최초의 서정 시가 형태로 기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2) 고대 가요는 집단적 서사시에서 개인적 서정시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3) 고대 가요의 주된 내용은 사회적 갈등, 노동, 종교적, 개인의 애정 문제 등 고대 사회가 지니고 있었을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5. 고대 가요 작품
1) 작품이 전하는 고대 가요 (* HWP DOWN을 통하여 확인 바람)
2) 삼국(三國)의 부전 가요 (* HWP DOWN을 통하여 확인 바람)
※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학 특성
고 구 려 백 제 신 라
환경 유목이 가능한 평원 농경평야 농경평야
문화 유목민(기마민족)특성 고구려에서 남하한 유목 농경 민족과 토착 농경 민족의 이중문화
예술 단순 복잡,화려 단순
언어 부여어 (알타이 북방어와 남방어의 남부 韓族語
공통 조어에 가까움) 이중 언어 생활
문학 서사문학 발달 서정적 가요문학 발달 서정적 가요문학
발달
동명왕,온달, 정읍사 (不傳:무등산 향가(균여전11수
미천왕설화+황조가 선운산,방등산,지리산) 삼국유사14수)
삼국(三國)의 부전(不傳) 가요(歌謠)
1. 高句麗의 不傳 歌謠
(1) 내원성(來遠城)
압록강변의 고을인 靜州 의 성 이름이다. '오랑캐가 멀리서 귀순해오는 성'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고구려 때에 북쪽 오랑캐들이 귀순해 오면 내원성에 머물러 정착하게 했으며 노래를 지어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때 이미 궁중악으로 채택되고, 이어 통일신라로 전해졌다. 무력 시위의 행렬 음악에 사용하여 오랑캐 정벌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귀순해 오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노래했으리라 추측된다.
원래는 군사들이 지어부른 민요였겠는데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는 데 소용되기 때문에 무력 시위의 행렬음악에 편입되지않았던가 상상해 본다. 그런데 오랑캐 정벌을 자랑하기보다 오랑캐가 귀순해 오는것을기념했으니,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생각을 나타냈다고 보아도 좋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2) 연양(延陽)
평안북도 영변의 옛 이름인 연산부(延山府)의 지명이다. 남에게 쓰여져 죽기를 무릅쓴다는 내용을 나무에 비유해 노래했다. 신세타령조의 노동요가 충성을 내용으로 했기에 나라에서 채택했다고 보아진다.
'나무가 불을 도우노라면, 그야 스스로를 해치는 화를 불러오지만,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나 다행으로 여기면서, 재가 되어 다 없어질망정 사양하지 않으리'라고 한 대목은 노래말의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다. 남에게 쓰이는 바 되었다는 것은 노비의 신세로 떨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원래는 그런 처지에서 신세타령을 하면서 부른 노동요일 것 같은 이 노래를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는 사설이 들어 있다고 평가했음인지 고구려 때 나라에서 채택했을 듯하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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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百濟의 不傳 歌謠
산이름의 제목이 많아 산으로 들어가거나 산에 올라가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경향을 보인다. 또한 여인이 지었다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여성에게 가중되는 고난의 모습을 엿보게도 하기도 하며, 모두 배경설화가 있는 점이 흥미있다.
(1) 무등산
산성을 쌓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축성 작업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애환을 담았을 노래 가사를 통치자들의 구미에 맞게 개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2) 지리산
구례현 사람의 딸이 미모가 뛰어나자 백제 왕이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인은 죽기를 다해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궁중악에서는 왕의 횡포보다는 여인의정절을 내세웠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와 동일한 사건인 도미의 아내를 겁탈하려던 개루왕의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아니었던가 추측하기도 한다.(이병기,백철, "국문학전사", 신구문화사, 1957 ; 조재훈, '지리산가소고', "백제문화"11, 공주사범대 백제문화연구소, 1978)
이 노래에 따르는 사연은 도미(都彌)라는 사람의 아내가 개루왕의 겁탈에 항거하다 가까스로 살아났다는 이야기와 자못 상통해 같은 사실에 대한 두가지 전승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3) 방등산
신라말 방등산 도적에게 잡혀간 여인이 자기를 구하러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라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남편을 그리워하는 노래였으리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본다.
이 노래는 후백제의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도적이라고 일컬는 무리는 후백제의 군사일 수 있다. 고려의 입장에서 후백제의 정권이야말로 도적 같은 짓이나 이런 노래가 생겼다고 하면 명분이 선다. ...도적떼가 성한 판에 남편인들 어쩔 도리가 없다. 오히려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면 어울린다. 백성의 민요를 채택하면서 사연이나 사설을 바꾸어 놓을 때 다소 무리가 생겼을 수 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4) 선운산
민요 본래 모습의 내용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고창군 사람이 부역을 나가도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산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며 부른 노래이다.
노래말을 남아 있지 않으나, 후대까지 길쌈을 하면서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데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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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新羅의 不傳 歌謠
(1) 목주(木州) [목주는 현재 청주에 속한 고을]
목주는 효녀가 지은 노래이다. 딸이 부친과 계모에게 효성한 것으로 소문났다. 그러나 부친이 계모의 참소에 혹하여 딸에게 나가라고 하였는데 딸은 차마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모 봉양을 더욱 근면하고 태만하지 않았으나 그럴수록 부모는 더욱 노하여 드디어 내쫓았다. 딸은 부득이 하직하고 떠나갔다. 딸이 어떤 산중에 이르러 석굴 속에 사는
노파를 만나서 그런 사정을 말한 후 그 곳에 있을 것을 청하니 노파가 그의 곤궁한 사정을 불쌍히 여기고 허락하였다. 처녀는 그를 자기 부모 섬기듯이 섬겼다. 그래서 노파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 부부는 한 마음으로 근면 절약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 후 딸은 친정 부모가 매우 가난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시집으로 모셔다가 지극히 잘 봉양하였으나 그 부모는 오히려 기브게 생각하지 않았다.
효녀가 이 노래를 지어 자기의 효성이 부족하다고 원망하였다.
(2) 명주(溟州)
강릉의 옛 지명이다.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설화의 모티브를 지니고 있는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는 고구려의 노래로 실려 있으나, 이 노래의 창작 연대와 국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고구려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는 것과 명주와 왕래가 잦았던 곳은 서라벌이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통일신라 때 생겨 궁중악으로 채택되고 고려로 전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김선풍, '명주가', "한국 시가의 민속학적 연구", 형설 출판사, 1977)
또한 허균의 '성소부부고', 增補文獻備考, 二十一都懷古詩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연히 신라 노래로 분류되어야 한다. (윤원식, 임치균, 조동일 등의 견해)
문학 교과서나 기타 참고서에서는 고구려 노래로 분류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간의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신라 노래로 분류하고자 한다.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가다가 명주에서 규수를 만난다. 사랑을 하게 되고 청혼할 것을 약속하고 서울로 가게 된다. 그러나 처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위기에 접한다. 물고기 뱃속에 편지가 들어가고, 그 편지를 받은 선비가 급히 와 <명주>라는 노래를 부른다. 처녀의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 선비와 결혼을 시킨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설화이다. 노래 또한 사랑의 노래일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서생이 지어 불렀다면서 민간에서 전승되던 사랑노래인 민요를 궁중악으로 채택했다면, 그런 것은 잔치 때 흥을 돋우자고 불렀을 법하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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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원시 종합 예술과 원시 고대가요
역사 이전의 우리 고대 문화와 문학을 거론할 때, 종종 부딛치는 문제의 하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 어떠하였던가라는 문제이다.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의 부족함으로 인해 건국신화나 전설 등에 의지하여 고대 사회의 원초적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경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적인 접근을 위해 우선 역사학계의 일반적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고대 문화를 그 기원이나 역사적인 전개에서 검토할 때 종종 잘못된 편견에 휩싸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이 있었던 바로 그 사실이 상고 시대나 선사 시대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었다고 간주하려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 시대에 가까운 연대가 되면 될수록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한층 밀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반면에 역사 이전시대로 올라가면 갈수록 중국 문화와의 교류는 멀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분명한 사실을 밑바탕에 깔아야 고고학으로 본 한중 관계의 의미가 한층 부각되어진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는 중국의 신석기 문화와 그 계통을 완전히 달리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有文토기 등과 중국의 彩陶와는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석기 시대의 양국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는 전국 시대에 오면서 우리나라와 한층 밀접해졌으며 그것은 명도전(明刀錢)의 청천강 이북의 분포로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보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지역에 머물고 있다.(김정배, 고고학상으로 본 한중 관계, <고대 한중 관계사의 연구>, 한국사 위원회, 삼지원, 1987)
선험적인 판단으로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역사 이전에도 빈번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견해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인정되어온 몇 가지 민족 성립에 대한 가능성을 간추려 보자.
그간 우리 학계에서 제기된 우리 민족의 형성 시기에 관한 다양한 입론들을 몇 종류로 나누어 보면, 첫째 우리 민족의 형성기를 B.C. 10세기 무렵이나 그 이전 시기에 濊, 貊, 韓族이 등장함과 함께라고 여기는 견해이다. 이 예, 맥, 한족의 출현에 대해선, 이를 외부로부터 새로운 주민 이동의 결과라고 보는 설과 이 땅의 신석기 시대의 주민이 농경화한 것이라는 설로 나누어진다. 대체로 예,맥,한족을 같은 계통의 족속으로 보고 이들의 출현 단계에서 사실상 민족의 실체는 형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는 현재 북한학계의 정설이며 남한 학계에서 많이들 수용되어왔던 설이다. 둘째는 통일 신라기를 민족 확립기로 보는 설이다. 셋째로 민족을 자본주의 경제를 물질적 토대로 하여 형성된 근대 사회의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노태돈,한국민족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한국고대사논총> 제 1 집, 한국고대사회연구회 편, 재단법인 가락국사적 개발연구원, 1992)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대한 비판 역시 강하다. 역사를 보는 안목 즉, 역사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하겠다.
주민2단계 교체설은 마치 고고학 연구에서의 문화전파 이론적 입장과도 같이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인간집단 하나하나 그 자체를 언어,문화,형질상에 있어서 고정불변의 실체인 집단적 단위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 각 단위는 반드시 다른 어떤 특정 단위에서 파생되기 마련이라는 시각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주민2단계 교체설은 민족 형성을 집단의 이주 혹은 집단과 집단의 혼혈에 의한 신집단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아직 고고학적 증거는 제시된 시간대에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다. 주민2단계 교체설의 근본적 한계는 바로 이렇게 민족의 형성을 실제로 있음직 하지 않은 하나의 돌발적 사건으로 파악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즉, 민족의 기원이란 형질적 집단의 이주나 대체를 비롯하여 각종 문화요소의 창출과 수용 및 동질적인 언어적, 역사적 경험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여준 일련의 복합적이고 복잡한 과정의 문제로 보아야만 하며, 이럴 경우에만 그 실체에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 말기의 한반도와 주변지역에는 각 집단의 적응 과정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문화적, 형질적으로 다양한 수많은 집단이 형성되었을텐데, 이들 사이의 접촉과 교류의 결과 이후 수천년 동안 언어적, 문화적, 형질적으로 지역성을 보여주는 보다 대규모의 집단들이 동북아시아 각지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한반도 주민 역시 그러한 집단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구석기 시대 이래 이러한 원초적 민족 집단의 형성 과정에서는 집단 성원의 유입과 이주도 물론 있었을 것이며, 이후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며 각 집단의 고유 영역의 확장 및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독자적 계급 구성과 권력 체계를 지닌 정치군사 공동체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들이 예를 들어, 고조선, 부여, 삼한 등과 같은 이름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을 때, 아마도 각 집단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집단의식 내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며 원초적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의심을 품을 수 있을 것이며, 이 무렵부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적 운명 공동체로서의 한민족의 원형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이선복,신석기.청동기 시대 주민 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한국고대사논총> 제 1 집, 한국고대사회연구회 편, 재단법인 가락국사적 개발연구원, 1992)
결국 우리 민족의 기원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가 학자마다의 역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체적인 모습은 역시 부족 공동체 성격의 군집의 형태에서 국가의 성립 과정을 통해 민족의식이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지니고 우리 상고 시대를 이해한다면, 단군신화와 같은 건국신화는 개별 부족의 신화가, 부족의 성장과 더불어, 국가 건국 신화의 모습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대사회의 문학의 유형은 어떠하였는가?
원시종합예술 또는 民謠舞踊(Ballad Dance)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우리 고대 사회의 문화와 문학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풍년이 들도록 하여 달라고 제사를 지내고 남녀가 서로 떼를 지어 노래부르고 춤추는데 있어서 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동양의 어느 나라 원시 사회에도 있었던 원시 신앙인 巫覡信仰과 관계가 있다. 무격 신앙(Shamanism)이란 귀신이라든지 하늘 또는 그외 자연물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따라서 그런 것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하는 것인데 그러한 행사를 할 때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이 춤추며 노래부르며 하는데서 문학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民謠舞踊(Ballad Dance)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우리 문학은 전술한 민요 무용과 무격 신앙이 합쳐진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원시인의 예술은 노래와 춤과 음악이 융합되어 있어서 모든 예술이 나뉘어지지 못한 원시형태로서의 민요 무용이었다. (구자균, 한국평민문학사, 민족문화사,1982)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대략 지금부터 약 40-60만년 전 '구석기 시대 전기'로 추정되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석기류와 짐승의 뼈화석이 검은 모루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2만 2천 년전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공주 석장리 집터에서 개, 곰, 멧돼지 등의 동물화석도 발견되었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수렵 채취 문화로 자연의 모습을 크게 바꾸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이 자기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모두 '사냥감'에 집중된 것들이었을 것이다. 사냥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춤을 추었을 것이고, 잡은 사냥감에 대한 기쁨과 다음 사냥에 대한 기원이 춤과 노래를 통해 표현되었을 것이다.
즉, 동굴 속의 사슴 벽화가 사슴의 수렵을 위한 주술적인 목적 아래 대상의 재현이나, 願望의 표현에 경도되었을 것이다.(윤원식)
그러나, 이들이 '몽고 인종'이라는 사실은 입증이 되었으나 과연 현재 한반도의 주구성원인 우리들의 직접 조상인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소한 7천년 전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농경사회가 중심이 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암벽화들이 사냥감과 사냥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면, 이 신석기 시대부터의 예술은 '사냥감'보다는 '농작물'을 대상으로 하기 시작했다. 풍요를 나타내는 여성의 모습인 '지모신(地母神)'과 농작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농사짓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가을 추수를 기다리며 농작물 수확이 풍성하기를 기원하였고, 파종과 추수를 위해서도 단합된 행동과 노래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 것들은 문헌에 나오는 예, 맥, 한, 고조선, 부여,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종족들의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문헌 속에는 다른 종족인 것처럼 명칭과 의복이 다르게 표현되었으나, 대체로 그 언어는 현재의 방언적 차이와 같은 정도의 이질성을 지닌 동일 계통의 언어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견해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존재했던 신석기 이후 청동기 문화를 지닌 예맥족을 하나의 커다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예맥족에서 부여, 고구려, 옥저, 예, 삼한 등이 분화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조동일)
이들에 대한 기록은 진수(陣壽)의 삼국지(三國志) 魏志 東夷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夫餘...... 以殷正月 祭天 國中大會 連日 飮食歌舞
名曰迎鼓 行道晝夜 無老幼皆歌 連日聲不絶
高句麗.......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聚歌戱......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濊......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謂舞天
馬韓......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弁辰......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이와 같은 제천 행사의 기록은 고구려 동맹(東盟), 예 무천(舞天), 마한 오월제(五月祭) 등의 기록의 대체적인 내용은 '음주가무(飮酒歌舞)'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공통점은,
① 영고, 동맹, 무천 등의 종교의식에서는 가무가 수반되었다.
② 농공의 시필기에도 가무를 수반한 의식이 행해졌다.
③ 의식과 관계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다.
④ 대부분의 가무는 집단적으로 행하여졌다.
⑤ 가무에는 독특한 악기와 음곡을 가진 사실이 인정된다.
(정병욱, 한국시가문학사(한국문화사대계V, 1967)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월에 씨를 뿌리고, 시월에 농사를 끝낸 다음 각기 한 차례씩 농사짓는 사람들이 서로 손발을 맞추면서 높이 뛰기도 하고, 낮게 뛰기도 하는 춤을 추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사냥이 잘 되기를 춤을 통해 기원했듯이 신석기 시대 인류는 농사짓는 모습과 그들의 도약을 통해 농작물이 잘 자라기를 기원했으리라고 보아진다.
결국 우리 고대 문학의 형태는 원시 종합 예술, 또는 민속 무용이라는 개념 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