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부쟁이와 송수권 시인
김 재 황
우리나라 들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쑥부쟁이. 모진 바람 속에서도 축축한 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는 이 쑥부쟁이야말로 고향에 남아서 고향을 사랑하는 대표적인 들꽃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순박한 모습으로 무더운 여름을 참고 견디며 꽃을 피워서, 저물어 가는 가을 들판을 넉넉히 감싸는 그 마음이 꽤나 시인을 닮은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시심(詩心)을 지니고 가을 들길을 걷는 나그네의 가장 좋은 벗으로 쑥부쟁이를 꼽지 않았던가.
나는 한여름에 피어나는 쑥부쟁이를 풀숲에서 만날 때마다 불현듯 고향이 그리워지고, 또 원색이 충만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는 송수권(宋秀權)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샤머니즘의 원색으로 꽉 짜인 고향 암수무당의 붉은 옷자락 푸른 옷자락들이 떼로 몰려서 큰 굿을 벌이는 한밤중의 굿거리 판 같은 곳, 하기야 어느 고향이든지 갖가지 들꽃들이 원색으로 피어나겠지만, 송수권 시인은 그 진한 그리움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며칠째 따스한 바람이 오고/ 어느 구석에선가 풀자락이 하나 흔들렸다/
달기풀꽃 제비꽃 등속이 꼭꼭 숨어 피고 점액질의 햇빛이 / 입을 대다 기절한 풀 그늘, 젖은 이슬을 털며/ 또 어느 구석에선가 풀자락이 하나 흔들렸다/
두 개의 풀자락이 서서히 흘러들었다. 이내 부드럽게 겹치더니/ 까맣게 솟아나는
뱀대가리 둘, 마주보고 서서/ 달디단 풀무의 불꽃, 불꽃같은 혀를 놀렸다/
풀들이 눕고 경련을 일으켰다. 풀들이 흔들리고 풀밭/ 전체가 흔들렸다. 어젯밤 꿈에 떠오르던 숙묵(宿墨)의 빛깔/ 낮게 낮게 오는 도랑물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작품 ‘풀밭 연주(2)’에서
쑥부쟁이는 국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조금은 습기를 지닌 자리를 찾는다. 슬픔을 간직한 곳, 그래서 그리움을 지닐 수밖에 없는 고향에 쑥부쟁이는 돋아난다. 그리고 땅속줄기를 사방으로 뻗어서 끈끈한 혈족의 유대를 강화한다. 처음에 나오는 싹은 원색의 붉은 빛이다. 자라면서 그 줄기는 초록 바탕에 자줏빛이 돌게 된다. 이 모두가 슬픔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성싶다. 잎은 어긋맞게 달리며 길쭉한 타원형으로 정감이 있다. 아래쪽에 달리는 잎은 잎자루와 굵은 톱니를 지녔고, 위쪽의 가지 끝에 나는 잎은 작고 가장가리가 매끄럽다.
송수권 시인은 1940년 3월 15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1297번지에서 태어났다. ‘고흥’이라면 남쪽 끝에 한 개의 섬처럼 바다를 향해서 불거져 나와 있는 고장이다.
“나는 어려서 우리 집 앞산에서 줄창 같은 뻐꾹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슬퍼졌지요. 할머니는 무심한 봄날에 문을 열어놓고 이 새의 이름을 꾸꿈새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꾸꿈꾸꿈 지집 죽고 자식 죽고’ 그래서 꾸꿈꾸꿈 운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쯤은 이 뻐꾸기 울음소리를 따라 동구밖 어디선가 풀무장이가 떠들어와 정자나무 밑에 흙구덕을 치고 하루 종일 불꽃을 날렸지요. 집집마다 쇠붙이가 걸어 나와 무덤을 이루면서 왈랑왈랑 쳐내는 불꽃 속에 한종일 쇠가 끓었어요. 쇠만 끓는 것이 아니었지요. 앞산 뒷산이 불꽃 속에 지고 선무당처럼 보리밭을 건너온 뻐꾸기 몇 마리도 그 불구덕 속에서 화닥거렸어요. 나는 여기에서 가장 건강한 자연미를 보았습니다.”
그렇다. 원색의 고향, 그것은 건강한 자연미를 지닌 고향을 말한다. 그 고향을 바라고 송수권 시인은 쑥부쟁이처럼 시심의 꽃을 피운다.
송수권 시인의 아버님은 고흥 향교의 전교(典校)까지 지낸 꼿꼿한 유교식 전형적 선비이셨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선비 집안의 살림살이를 길쌈 등의 고된 일로 꾸리셨고 끝내는 병을 얻어 7년 동안이나 앓다가 운명하셨다. 그는 그의 어머님이 막 시집왔던 그 시절의 모습을 천사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더운 여름 날, 사랑방에서 죽부인(竹夫人)을 껴안고 ‘시원타’ 하시던 할아버님의 모습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 할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대모(代母)가 오셨다. 그녀 또한 가난을 극복하고자 무척이도 베 길쌈을 많이 했음을, 그는 회상하곤 한다.
이러한 가족사(家族史)는 모두 쑥부쟁이의 잎사귀들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어느 것은 크지만 아픔이 있고, 또 어느 것은 작지만 정감이 있으며, 그 잎들 나름대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폭이 넓은 냇물의 징검다리를 건너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습니다. 그것 도 어머니 손을 잡고 까치발로 곤두박질을 하면서 나는 더 큰 황톳길을 만났고 내가 일어서야 하는 법도 배웠지요. 정확히 어머니와의 고통스런 이별은 열 살 때였어요. 지금도 그 입학하던 첫날처럼 그녀는 징검돌들의 끝에 서서 주저앉지 말고 건너와 보라고 소리소리 치십니다. 남빛 치맛자락에 참매미처럼 붙어서 그녀의 손 이끌림대로 징검돌을 밟을 때는 나는 하나의 꽃씨였어요. 그 꽃씨가 땅에 떨어져 하루나 이틀, 천지 사방에 찬란한 햇빛은 흘러넘치어 그 모자를 땅에 벗어놓고 세상을 한 바퀴 뚤래뚤래 둘러보는 그런 일이나 같은 것이었습니다.”
송수권 시인은, 봄날 황혼에 유독 시장기가 느껴지고 그래서 굴풋한 김에 술 한 잔이 생각나는 때면, 고향의 그 대숲머리에 잠기던 저녁연기를 그리워한다. 향수의 목마름을 느끼게 하는 저녁연기. 그에게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추억이 있었다.
“나는 읍내로 들어가는 20 리의 황톳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어요.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한 소녀를 사랑했지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가다 마주치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어요. 세 해 동안, 그 길을 걸으며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없지만, 지금도 내 가슴에 그녀의 수줍음 낀 눈, 코, 입 언저리의 웃으면 떠오르던 보조개 등도 남아 있습니다. 그 때는 길가의 잔 풀꽃들도 걸어 나와 그 황톳길을 밝게 비춰 주었고 말똥, 쇠똥도 깔깔거리며 나의 못남을 마음껏 비웃어 주었어요.”
그 후, 1975년 2월, ‘문학사상’지에 시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신인상에 당선됨으로써 그는 시인이 되었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 작품 ‘산문에 기대어’ 중에서
1966년, 송수권 시인은 동생을 생으로 잃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온 동생이 난데없이 고향 언덕 밑에서 자살을 하고 만 것이었다. 아침 이슬에 찔레꽃 같은 알약을 먹고서----. 이 시는 곧 동생의 죽음에 바쳐진 노래. ‘고향이 있는 한, 그의 죽음도 절대로 외롭지 않다.’라고, 송수권 시인은 믿고 있다.
“소월의 고향에만 접동새가 우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가람 가에도 그 접동새가 우는 ‘슬픈 밤’이 있고, 제운 밤 촛불이 말없이 찌르르 녹아버리는 그믐 달밤 같은 어두운 고향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고향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흐트러진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진정한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향의 삶을 빼놓고 저는 시에서 무엇을 달리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영혼, 고향을 결코 떠날 수 없는 마음. 그는 고향에 쑥부쟁이처럼 그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날 수가 없다.
쑥부쟁이는 7월부터 10월에 걸쳐서 꽃을 피운다. 원줄기 끝과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는 꽃이 순수함을 지녔다. 설상화(舌狀花)는 자줏빛이고, 가운데 통상화(筒狀花)는 노란빛이다. 슬픈 듯싶으면서도 기쁨을 머금고 있는 듯싶다. 산기슭과 들판의 양지바른 곳에서 활짝 웃으며 피어나는 쑥부쟁이. 그 자연 속의 자유스러움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면 볼수록, 그 심성이 송수권 시인을 너무 닮았다.
“나는 나의 시를 지역 문화 논리 위에 시적 공간을 세워 두려 합니다. 그것은 땅땅 귀쌈을 패 버리듯 치는 예배당 소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 산의 능선을 타고 가는 범종 소리며, 아파트 단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수직 연기가 아니라 대숲 마을의 낮고 낮게 흐르는 저녁연기들이며 보리밭들입니다. 울어도 깊이 걸려서 수천이나 수만 봉우리를 울리고 가는 지리산 속의 뻐꾹새와 같은 습성을 지닌 그 뻐꾹새이고자 합니다.
시는 결국 운문 구조의 본질이며 어쩔 수 없이 시로 돌아와야 하는 초월자적인 노래이어야 한다는 그 신념에 살고자 하며 또한 깨끗한 지역 공간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가 가고 다음 시대에 살아남은 시가 무엇이냐고 전제했을 때 저는 지성의 말놀음이나 의식의 비뚤림보다 이들의 깨끗한 서정시를 서슴없이 내세웁니다. 결코 일방통행적인 저널리즘에 물드는 일도 없이 이들이 있기 때문에 저 또한 지역의 삶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고향은 어떤 모습인가. 송수권 시인 역시 ‘대숲머리 저녁연기는커녕 까치집 하나 걸리지 않은 고향의 모습은 상갓집만 같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이제 모든 국토는 황톳길이 아니라 검은 길이 되어 버렸으며 그 길의 끄트머리에 고향은 무참히 내던져져 아스팔트길로 포장되었거나 아니면 수몰지구로 물속에 처박혀져 버렸음을 슬퍼한다.
그러니, 송수권 시인은 섬을 꿈꿀 수밖에 없다. 그가 시에서 꿈꾸고 있는 섬은, 언제 보아도 신비스런 전설 같은 것을 듬뿍 안고 있는 섬이다. 수목이 잘 덮여 있고, 샘물이 듬뿍 넘치는 그런 풍요로운 섬. 시멘트의 정글이 아니라 낡은 토담이 있고 대숲의 맑은 바람이 끝없이 불고 솔바람 소리도 은은한 섬, 그것은 그가 그대로 안주하고 싶어 하는 전통 속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어요. 이 지구상에는 몇 종류나 되 는 나비가 살고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몸 빛깔을 지닌 나비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아프리카 숲속에, 아니면 아마존강 유역에, 아니면 그 어디쯤엔가 하늘색 바탕의 나비가 살고 있다는데 그 나비일까? 그 나비에 관한 명칭은 무엇일까? 그 나비들은 푸른 강의 연안을 따라 질린 듯 투명한 공간에 원색의 춤을 빚고 있지 않을까? 이 지구상에 벌어진 나비들의 춤을 한 곳에 모아 보면 그것은 얼마만한 장엄함과 화려한 춤의 악보가 될 것인가? 한겨울 속에서도 나비를 연상하면 내 마음은 춥지 않고 금방 뜨거운 열정으로 끓어 넘치니 ‘나비’라는 이 말 속에는 주술적인 치유와 재생의 능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송수권 시인은 벼들어 가고 있는 고향을 차마 그대로 보고 있기가 무척이나 괴로웠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고향의 죽음을 안고 있는 그 겨울이 좋았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둑신한 겨울이 좋았습니다. 먹물처럼 가라앉은 산들. 그 위로는 쉴 새 없이 떠가는 구름장들. 잎이 진 팽나무들이 폴 끌레(Paul Klee)의 철필처럼 마을을 싸고 하늘에다 윙윙 울음을 쏟아놓는 그런 겨울이 좋았어요. 대낮에도 굴뚝마다 청솔가리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래서 항상 이 마을에선 화장터의 죽은 냄새가 조금씩 들판으로 피어 넘치는 듯했습니다.
그런 겨울날에 어디서 왔는지 수백 수천 마리도 넘는 갈가마귀 떼가 하늘을 뒤 덮고 바람을 일으키며 들판에 내려왔을 때는 와글와글 귀신같은 울음을 내리쏟으며 벌판을 이동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헌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까마귀 떼의 행진을 쳐다보았지요. 그건 장엄한 행진이었고 이 세상에서 본 그 어떤 검은 교향악보다 더한 흥분과 긴장이 온몸을 흘러내렸습니다. 그 흥분과 긴장 속에는 어두운 겨울 마을의 전설이 악마의 발톱을 갈며 다가선 듯싶은 착각마저 일게 했습니다.”
송수권 시인은 요즘 강력한 신(神)을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때 묻지 않은 신, 강력한 힘을 가진 신, 그러한 신을 창조하고 그 신에 귀의하고 싶어 한다. 그는 직장 때문에 광주로 나와서 산다. 하지만 그는 매일 억만 평의 하늘을 걸어서 출근을 한다. 그 영혼은 아직도 그 고향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넓은 의미로 본다면 광주 또한 고향이랄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무등산을 고향의 어깨인 양 든든하게 여기고 있다.
남도의 하늘과 돌과 바람 속에/ 의로움이 아닌 것에는/ 인간의 뿌리가 닿지 않는 곳에는/ 쉽게 타협하지 않으리/ 값싼 히로이즘에 물들지 않고/ 최후까지 남아야 할 것은 사랑이리/ 무등에 따뜻한 햇빛이 오고/ 신록이 녹음으로 바뀌어 가듯/ 우리 젊음도 그렇게 무성해야 하리/ 가을날엔 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이 되고/ 빛 고운 솔무덤을 이루어야 하리.
------작품 ‘남도 하늘과 들과 바람 속에’ 중에서
쑥부쟁이는 여전히 고향 들녘에서 피어난다. 마지막까지 고향을 지킬 심산으로. 쑥부쟁이를 닮은 송수권 시인도 고향을 사랑한다. 원색의 고향을 그리며 행복에 젖는다. 그는 지금 조석으로 보고 자랐던 ‘봉황산’을 빠져나와 고향 언저리 광주에 살고 있지만 봉황산에 봄이 오는 소리를 가슴에서 지우지 못한다. 추녀 끝의 고드름발이 녹아 흐르던 고향의 즐거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송수권 시인은, 이미 저 하늘나라의 별이 된 ‘나의 벗 이성선 시인’과 아주 가까운 시인이다. 벗의 벗이니, 나에게도 벗이 되리라. 그래서 가을 길을 걷다가 쑥부쟁이를 만나면 ‘안녕’하고 내가 먼저 인사하며 송수권 시인을 떠올리곤 한다.
(졸저 '들꽃과 시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