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전의록(傳疑錄)은 "의문점은 후세에 전해도 좋지만 거짓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서는 안 된다 (疑固可傳 訛不可傳也)"는 잠언에 따라 진위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아 의문점이 남아있는 설들을 후세에 전하는 기록이다.
1980년 이후 간행되는 대다수 순흥안씨 1파 족보에는 정형화된 전의록(傳疑錄)이 실려 있다. 이것은 1957년 간행《순흥안씨서파공파보》에 처음 실린 전의록(傳疑錄)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그런데 1957년 이전 순흥보에도 전의록이 있고,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런 기록들이 점차 변해 현재의 전의록과 같은 형태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전의록이 나오기 이전 족보의 약간 다른 전의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18, 1925년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전의록(傳疑錄) : 안씨시조동래설이 없음.
1924년 순흥안씨첨추공파보 (順興安氏僉樞公派譜)의 전의록(傳疑錄) : 안씨시조동래설이 없음.
1924년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判官公 派譜) 전의록(傳疑錄) : 남포 안정진 보첩 인용
1927년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전의록(傳疑錄) : 위 1924년 판관공파 전의록과 동일
1931년 순흥안씨족보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 죽산안씨동원보 인용(고성이씨 없음)
1957년 《순흥안씨서파공파보》의 전의록(傳疑錄) : 죽산안씨동원보 인용(고성이씨가 처음으로 안씨와 연계됨)
오늘날 순흥안씨 1파 족보의 전의록은 3개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1항] : 순흥안씨가 광주안씨에서 분파했다는 광주안씨 족보 별록의 계보를 비판한 순흥 을유보(1765년) 범례의 기록으로 초기 전의록부터 같은 내용으로 유지됨.
순흥 을유보(1765년) 범례의 광주-순흥 분관 계보 비판 기록
광주안씨 무오보(1738) 별록(別錄)
[2항] : 광주-순흥 분파와 관련하여 순흥안씨 중에도 그러한 계보를 등사해온 경우가 있다는 순흥 경인보(1830)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경인보 원본은 인터넷에 올라 있지 않아 이미지를 구하지는 못했다. 처음의 전의록에는 경인보 내용을 축약된 형태로 인용하며 출처가 경인보인 것을 밝히지도 않았으나, 1931년 순흥안씨족보 전의록(傳疑錄)부터 현재와 같이 경인보의 해당 내용 전체를 인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3항] : 안씨 시조 동래설을 기록한 부분이다.
처음의 1924년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判官公 派譜) 전의록(傳疑錄)과 1927년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전의록(傳疑錄)에는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의 보첩을 인용한다고 하였다. 광주안씨 남포 문중에 안정진(安廷晉, 1732-?)이란 분이 있기는 하나, 족보의 후손 기록도 희미하고 졸년도 미상인데, 과연 이런 분이 남긴 보첩이 있을 지도 의문이고,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의 사람들이 200년 가까이 후대에 이 분이 남긴 보첩을 보았을지는 더욱 더 의심스럽다.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시조 동래설 기록의 내용은 광주안씨 서령공파 남포문중 절첩보의 것과 유사한 점이 있으므로 이런 류의 보첩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1931년 순흥안씨족보 전의록(傳疑錄)에는 죽산안씨동원보를 인용한다고 했는데, 1923년 죽산안씨 세보(竹山安氏 世譜)의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기록과 표현이 똑같지는 않으나 내용이 유사하므로 죽산안씨 동원보를 인용한 것처럼 말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와 동일한 기록은 이전 다른 문헌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여러 기록을 보고 순흥안씨 나름대로 정리한 표현으로 보이는데, 근거를 간행되지도 않은 개인 기록에 불과한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 보첩으로 하는 것 보다는 죽산안씨동원보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순흥안씨는 안씨시조동래설을 기록한 대표적인 문헌으로 죽산안씨동원보를 든 것이다.
문제는 1957년 《순흥안씨서파공파보》의 전의록(傳疑錄)에 역시 죽산안씨동원보를 인용한다고 하면서도 그 내용에는 1931년 족보 전의록의 내용에다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고성이씨 시조 이황(李璜)이 안씨들의 시조라는 이원(李瑗)의 동생으로 807년에 형제가 함께 동래하여, 광주의 반란을 집압한 공으로 이원 본인이 안씨 성을 사성 받았다"고 한 설까지 추가한 것이다. 실제의 죽산안씨동원보에는 어디에도 고성이씨 시조 이황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특이한 기록이 1957년 이후 순흥안씨 1파 족보의 전의록으로 정형화 되었고, 구죽산안씨들은 1999년 대동보에서 이것을 인용하며 자신들 시조 연원이라고 공식화하였다.
죽산안씨들은 순흥 1파 전의록과 같은 내용의 안씨동원보가 실린 옛기록이 따로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그 원형은 1931년 족보의 전의록이고, 여기에 고성이씨 건을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일 뿐이며, 실제로 이와 같은 내용의 죽산안씨동원보가 있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죽산안씨들은 자신들 기록의 역사에 대해서 마저도 잘 모르는가?
오늘날 순흥 전의록에 "竹山安氏同源譜云"이라 한 말은 1931년 전의록에서 그대로 따온 말에 불과하다. 1931년 전의록 내용에 고성이씨 건을 임의로 추가하여 실제의 죽산안씨동원보와 내용이 다르게 되었으므로. 오늘날 전의록에도 그대로 "竹山安氏同源譜云"이라 한 것은 실제와 맞지 않게 된 것이지, 이와 같은 내용의 더 오래된 안씨동원보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순흥안씨 2파는 1980년 순흥안씨 2파족보 (順興安氏二派族譜)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에서와 같이 고성이씨가 빠진 1931년 순흥보 소원전의록의 시조동래설 기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고성이씨가 포함된 순흥 1파의 전의록과는 다르다. 순흥안씨들 간에도 파에 따라서 전의록에 기록한 시조동래설의 내용이 다르다.]
순흥 전의록의 안씨시조 동래설 기록의 변화표
1924년 판관공파보 전의록 |
1931년 순흥보 소원전의록 |
1957년 서파공파 파보 전의록(傳疑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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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의록 |
현재 순흥 2파 소원전의록 |
현재 순흥 1파 전의록 |
藍浦安廷晉譜牒曰 李瑗 中原人 唐元和二年丁亥 東入 江原道 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 以平亂功 賜姓安氏 仍改名 邦俊封竹山 邦傑封廣州 邦俠封竹城 邦傑官大將軍云云 |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瑗(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 (新羅哀莊王七年) 丁亥 入我東 居松岳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 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 曰邦俊竹山君 曰邦傑廣州君 曰邦俠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新羅哀莊王七年) 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岳山下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兄弟 挺身安國 瓊安國 故賜姓安氏 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 曰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의 보첩에 이르기를 중국인 이원(李瑗)이 당(唐) 원화(元和) 2년 정해(丁亥, 807년)에 동으로 와서 강원도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살았는데, 아들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枝春), 차남은 엽춘(葉春) 막내가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864년) 때에 3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賜姓)받고, 이름을 고쳐 방준(俊封)은 죽산(竹山), 방걸(邦傑)은 광주(廣州), 방협(邦俠) 죽성(竹城)에 봉군되었다. 방걸(邦傑)의 관직은 대장군(大將軍) 이며.. 운운(云云) 하였다. |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원(李瑗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864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안씨(安氏)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경(李瓊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807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이때 광주 사람이 그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 형제는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형 경은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안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아우 황은 그대로 본성을 갖고 고성(固城)에 옮겨 봉해졌다. 안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864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이름을 고쳐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
정확한 연대:
정해년 애장왕 8년 (당 헌종 원화 2년, 807년)
갑신년 경문왕 4년 (당 의종 함통 5년, 864년)
1931년 전의록은 죽산안씨동원보 기록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거의 유사하므로 출처를 이런 말이 나오는 대표적 문헌인 죽산안씨동원보로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1957년 전의록은 죽산안씨동원보에 없는 내용을 많이 추가했으므로 출처를 달리해야 할 것이나, 1931년 전의록의 출처 기록을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1957년 전의록과 같은 내용의 더 오래된 죽산안씨동원보가 따로 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해도 찾아내서 확인시켜주어야할 의무는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죽산안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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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록 1항과 2항은 확실한 근거문헌이 있고, 이를 따라 그대로 기록한 것이니 기록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달라질 여지가 없다. 하지만 3항의 안씨 시조 동래설은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광주안씨 경술보(1790)의 변무(辨誣)에서 지적한대로 맹랑하고 확실한 근거 문헌이 없으므로 [孟浪無據] 이를 기록한 문헌마다 내용의 편차가 심하고,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한지 알수도 없다. 그러니 순흥 전의록에서도 처음 1924년에는 여러 문헌 중 남포 안정진 보첩을 인용했다가, 이는 인쇄된 문헌이 아니라 권위도 없어보이고 하니 1931년에는 출처를 죽산안씨동원보로 바꾸었다. 순흥 2파의 소원전의록은 이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순흥 1파 전의록은 1957년부터 여기에 고성이씨 시조 이황이 이원의 동생이라는 설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순흥안씨 전의록의 시조동래설 기록의 변천은 오늘날 죽산안씨 대동보의 안씨동원보 시조 기록이 족보를 낼 때마다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방불케 한다. 1976년판 대동보에서는 동래한 이원의 아들 3형제가 당나라에 출병하여 남방에 침입한 외적을 물리친 공으로 864년 안씨 사성을 받았다고 했다가, 1999년판 대동보에서는 순흥안씨 전의록을 끌어들여 이원이 동생인 고성이씨 시조 이황과 함께 동래하여 광주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이원 본인이 안씨 사성을 받고, 아들 3형제는 864년 신라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죽산군, 광주군 등으로 봉군받아 각 안씨 시조가 됐고, 이원, 이황은 당나라 종실 이국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신당서의 종실 세계표에 이국정 아들로 이원, 이황이 없으니 2011년에는 당나라 종실설을 파기한다고 선언하는등, 자신들도 무엇이 맞는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 하고 있다.
이 설 자체가 근거문헌이 없이 나돌아 다니던 것이다 보니 기록마다 내용도 중구난방이고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순흥안씨 역대 전의록(傳疑錄)과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전의록 중 남포 안정진 보첩을 인용한 것과 소원전의록에는 고성이씨 관련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1765년 순흥 을유보 범례의 광주안씨 족보 별록 기록 비판
1918, 1925년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전의록(傳疑錄) : 안씨시조동래설이 없음.
1924년 순흥안씨첨추공파보 (順興安氏僉樞公派譜)의 전의록(傳疑錄) : 안씨시조동래설이 없음.
1924년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判官公 派譜) 전의록(傳疑錄) : 남포 안정진 보첩 인용
1927년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전의록(傳疑錄) : 위 1924년 판관공 파보 전의록과 동일
1931년 순흥안씨족보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 죽산안씨동원보 인용(고성이씨 없음)
순흥안씨 1파 족보의 전의록
1957년 《순흥안씨서파공파보》의 전의록(傳疑錄) : 죽산안씨동원보 인용(고성이씨 처음 들어감)
1980년 순흥안씨 일파 죽산 탐진 족보(順興安氏一派 竹山 耽津 族譜)의 전의록(傳疑錄)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順興安氏參判公派族譜, 1988)의 전의록(傳疑錄)
「안씨의 기원설(起源說) 및 전의록(傳疑錄)」:『순흥안씨보감(順興安氏譜鑑)』(3판, 1989, 1992년)
순흥안씨 전의록(傳疑錄) : 순흥안씨 찬성공파보 (1993년)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順興安氏參判公派族譜, 1998)의 전의록(傳疑錄)
순흥안씨 2파 족보의 소원전의록
순흥안씨 2파 족보는 그냥 전의록이 아니라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으로 칭하며, 1파 족보의 전의록과 달리 경인보(1830) 인용 부분은 없고, 죽산안씨동원보 인용문도 고성이씨가 나오지 않는 것(1931년 순흥보 소원전의록 버전)으로 되어 있다. 1931년 족보의 소원전의록과 다른 점은 경인보 인용문이 없다는 것이다.
1980년 순흥안씨 2파족보 (順興安氏二派族譜)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 죽산안씨동원보 인용(고성이씨 없음)
1980년 순흥안씨 2파족보 (順興安氏二派族譜)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순흥2파 소원전의록(溯源傳疑錄) 및 갑신외란고(甲申外亂考) : 1999년 : 증보문헌비고를 인용하고, 1976 죽산대동보를 따라 갑신외란고도 추가함
순흥안씨 3파 족보의 전의록
전의록(傳疑錄) 믿지 말아라!- 순흥안씨 3파보감[신미보(辛未譜) 1991년 11월8일 발행]
이후 부터는 순흥안씨 제3파 대동보인 병자보(丙子譜 1996년 12월 발행)에는 구죽산 동원보는 삭제되고 광주안씨 전의록(傳疑錄)만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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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역사인물에 대한 신상정보를 종합적으로 연구 관리하고 있는 국가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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