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문학 2호 작품 올립니다.
진 재수
고양이
사람 사는 집안에 사람만 사는 게 아니고 축생畜生도 함께 산다. 일찍이 농경사회에선 야생이던 짐승이 가축으로 사육되면서 외양간이나 우리 등에서 있었으나 근래에는 특이한 몇 종류의 금수어충禽獸魚蟲이 사람 가까이서 붙박여 기거를 같이 하며 산다.
예를들면 빛깔이나 생김새, 소리가 고운 새 짐승, 개 고양이 원숭이 등 길짐승, 금붕어 악어 도룡뇽 등 물짐승, 뱀 거미 지잠까지도 사람 손에서 사랑으로 대접받으며 지낸다. 이른바 애완동물이다.
우리 집 방안에도 딸과 손녀가 각각 그 주인인 고양이와 쥐(햄스터)가 재롱을 부리고 있다.
외할머니를 땅에 묻고 허리 꺾고 슬피 우는 어미를 위로하던 날, 저도 마음 달랠 길 없어 빗속에 차를 몰아 바닷가에 갔었다고, 출렁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어디선가 가냘픈 울음소리가 파도소리에 묻어 들렸다는군. 소리는 언덕아래 바위 서리 틈새 끼인 고양이새끼 한 마리 울음이었던 것.
어미도 어쩔 수 없어 그냥 두고 가버렸고····.
딸이 안아서 집에 왔을 때는 두 눈만 동그랗고, 기어들어가는 울음소리에, 비에 젖은 몸뚱이는 줌 안에 축 늘어져 살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그날로 동물병원에서 기생충 검사와 수의사 처방을 받고는 우리 집의 한 식구가 된 것이다.
나는 어릴 적, 고향마을 집 창고나 장독간 근처에서 떠돌던 도둑 고양이의 영악 한 짓들이 생각 나면서, 집안에 키우며 길들이는 것에 뜨악하였다.
그러나 저 짐승 ! 죽음 직전에서 무슨 연기緣起로 하여 딸아이의 눈에 띄어서는 내 집까지 왔는가. 생명이 지중하니 내칠 수도 없고, 자식이 귀애하는 것,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어,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이놈을 건사하는 데는 먹이고 재우고는 기본이고 목욕, 심심풀이 장난감 구입 등 뒤치다꺼리가 심리적 인내와 사랑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며칠 안 돼 말똥말똥 눈을 뜨더니 점점 토실토실 살이 붙어 모양을 갖추더니, 와! 이런 데가 다 있었나 싶은가, 온 집안이 제 놈 노는 운동장이 된다.
한 달포 지나서는 한 인물(?)이 더 나서 쫑긋한 삼각형 귀에 부엉이 눈알에 몽특한 코, 다문 입, 도톰한 뺨이 다 또렷하다. 마치 날개 편 나비 한 마리 입에 문 듯 한 낯짝이 흡사 작은 호랑이 생김새 같기도 하고, 구름줄무늬 옷은 또 표범 같기도 하다.
사료와 참치캔 등 영양식과 간식을 잘 먹고서는 윤이 자르르한 털과 몇 가닥 수염이 약간 위엄 있으면서 귀엽다.
달이 갈수록 늘씬한 허리에 날렵한 몸놀림의 묘기에 감탄한다.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하여 쌀나방이 날면 뛰어 올라 낚아 채고, 소리 없이 다가와 냄새 맡고,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운다. 거두어 온 그곳의 파도소리를 듣는가.어미를 그리워 하는가.
사람이 만물 중에 으뜸이라 하지만 미물이 사람보다 탁월한 감각과 기능을 가진 짐승도 많다. 개의 후각은 사람의 3천배, 좀벌레 수정충은 날카로운 이빨로 렌스를 갉아 낸다고 한다.
그러나 요놈이 식구들에게 재주와 즐거움만 주는 것이 아니다. 재災를 저지른다. 야성이 그대로 있어 예리한 발톱으로 소파의 천을 긁고 이빨로 물어뜯기도 한다. 앞발보다 긴 뒷발로 아무데나 용수철 튀듯 올라서는 좌충우돌 우다탕 난장판이 된다. 놈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엄마, 고양이 때리지 마. 고양이는 허리가 약하잖아” 한다.
영악한 요놈은 친소에 따라 애증표현이 저울에 단 듯하다. 제 좋아하는 사람에겐 몸을 부닐면서 장난도 걸어오고, 싫어하는 사람에겐 비실비실 에돌며 말끄러미 건너다보다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캔 줄까~” 하면 내게도 경계심 무방비로 발부리에 부딪히면서 앞서 간다. 자기 사료 이외는 잡식하지 않고 배설과 뒤처리도 깨끗하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현관 밖, 제 좋아하는 사람 발걸음 소리를 알아 내달아서는 발등에 제 얼굴을 부비고 이방 저방 달리면서 한바탕 환영시위를 한다.
집안 고양이는 쥐를 사냥하지 않는다. 먹이사슬인 장난감 쥐와 장난 치고 논다.
옛날 시골 고방 안에 갇혀서 볏 가마, 쌀채독을 지키던 민첩하고 약삭빠른 고양이가 아니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의 ‘쥐 잘 잡는 고양이’도, 음산하고 괴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검은 고양이’(에드가 엘런 포우 작)도 아닌, 사람들이 좋아서 취미로 키우며 완상하는 놈으로 사람과 동고동락하기에 이르렀다.
놈의 잠자리는 방안 따뜻하고 부드러운 요 이불이고, 딸의 손발 끝에서 맴돈다. 집안 식구들과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은가, 발랑 자빠져서 이리저리 뒹굴기도 하는, 고양이 팔자치곤 상팔자가 아닌가.
처음엔 가까이 두고 구경하며 즐길 마음이 아니었으나, 함께 지내고 거두는 동안 비록 짐승이긴 하나 놈과 사는 것도 사람과는 또 다른 정이 있다.
눈에 안 보이면 찾게 되고, 먹이를 챙겨주고 쓰다듬어 주고, 나도 이제는 놈을 좋아하기에 이르렀다.
애완동물들 가운에 고양이가 가장 오래, 한 20년을 산다고 하니 사별하지 않는 한 식구와 함께 살아갈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이들 동물 사랑이 지나쳐서 짐승을 형제자매 부모자식 간으로 호칭하며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을 본다.
“언니 갔다 올게, 잘 있어.”, “엄마 보고 싶었지!”, “그러면 닭 새끼 보고 삼촌이라 부를까예...” 집에 기르는 개, 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 송대 시인 임포林浦도 서호에 학鶴子을 자식 삼아 치면서 살았다고 하나 이는 풍아한 삶을 말함이다.
며칠 전 TV화면에 어느 시골 아낙이 개를 아기 업듯 등에 업고 마실 다니는 장면도 있었다.
“쫑”이라 불리는 우리 집 고양이. 태생은 바닷가, 떠돌이 어미의 새끼였으나 어려서부터 집에 들어와 가르쳐서 개 정도의 지능을 갖게 되었다. 이놈과의 소통은 눈으로 보고 꼬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거나 탁탁 치는 것으로 이뤄진다.
장유유서를 안다고 할까. 손녀와는 스스럼이 없고 나와 내자 앞에서는 몸놀림을 조심한다. 제 주인인 딸에게는 항상 애교가 넘친다.
이웃집을 배려하여 현관 밖을 나가거나 울음소리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짝짓기 소란을 대비하여 병원에서 시술을 했다. 먹이나 배설물 처리 등은 애묘 건강용품사에서 구입한 것으로 위생적이다.
축생하므로써 비위생적이거나 지나친 애정 표현으로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폐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짐승이나 물건을 지나치게 좋아하다가 그 근본 뜻을 잃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어리석음도 경계해야 한다.
사물에 적당한 판단을 가짐으로써 제 분수대로 가르는 분별심이 있어야 하겠다.
이력및 약력
경남 산청 출생. 진주 사범 졸. 중등교원 자격 검정 합격. 부산대 대학원 교육학 석사. 마여고 마고 진해고 교사 경남교원연수원 장학사 역임 울산 학성여고 교장 정년 퇴임. 황조 근정 훈장 수훈. 산문집:[돌다리] 펴냄. [수필문학] 천료등단, 수필문학추천작가회 남강문우회 경남수필문학회 회원
첫댓글 글이 참 실감이 갑니다.
꽃도 마음을 주어야 꽃이 되듯 하찮은 미물도 정을 주면 아름다운 인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따스한 사람냄새 풍겨나는 체험적 수작 잘 읽었네. 어쩌면 그렇게 세밀한 관찰에 생동감이 묻어나는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음인가?
나도 고양이를 길러 보았는데 정이 드니까 사람 못지않게 너무 좋았습니다 집에서는 업기도하고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