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이 어느 큰 부자가 베푸는 공양에 초대 받아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런데 스님이 으리으리한 대문을 들어서려고 할 때 문지기들이 그 스님의 옷
차림이 너무 남루한 것을 보고 고급스러운 잔치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입장을 막았다.
결국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그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차
려진 음식들을 먹지 않고 옷에다 문지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영문을 묻
자 스님은 태연스럽게 반문했다.
"초대를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옷이니, 옷이 음식을 먹어야 할 것 아니
냐?"
현대인들은 옷의 고급스러움을 기준으로 연회장 입장을 허가하려는 저 문지
기들과 같다. 그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물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물질
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소비한다.
또 얼마나 고상한 인격을 지녔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사치스러운
옷, 집, 차, 명예 등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행복한 삶의 기준을 삼으려
고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신의 정신적인 삶이 아니라 물질
이다. 황금이 그들의 신이고 우상인 것이다.
형상의 물질로 나타나는 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현대인과
원시인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원시인인의 신앙 대상이 바람, 태양 등인
데 반해서 현대인의 신앙 대상은 허영의 욕구를 채워주는 물질이라는 점에
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라의 의상대사는 [법성게] 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티끌 속에도 온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고, 한 생각의 찰나 속에는 영원
이 포함되어 있다."
바닷물의 맛을 알기 위해서 오대양의 바닷물을 다 마실 필요는 없고, 지구
를 알기 위해서 모든 땅을 빠짐없이 돌아다녀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 그러나 '더 많이, 더 화려화게, 더 고급스럽게'라는 말들을 좌우명으
로 삼는 현대인들은 한 모금을 음미함으로써 모든 바닷물의 맛을 알려고 하
지 않고 어리석게도 바닷물을 다 마시려고 한다.
불교는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한다는 것을 나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소유와 소비를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
할 뿐이다. 과다소유나 과다소비가 아닌 무소유의 마음가짐으로 삶의 의미
를 찾고 만족을 얻어야 하겠다.
어느 큰 사찰의 회주인 어느 스님께서 지방 여러 곳을 돌아다니시다가 시간
이 흘러 절에 들어가게 되었다. 절에서 공양을 올렸는데 온갖 산해진미로
어우러진 너무나 훌륭한 상을 받게된 스님은 다른 반찬에 손 하나 대지 않
고 밥과 물만으로 공양을 끝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절의 공양간 살림이 어느 정도 폈다 해서 반찬이 절답지 않게 나오는 것
은 절이라고 할 수 없다. 절이 절 다워야 사람들도 그 맛에 절을 찾는 것이
다."
공양간에서는 회주 스님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민해서 상은 차렸지만 스님
의 그 일침을 어쩔 수가 없었으며, 지금도 그 절에서는 사시사철 반찬이 누
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된다고 한다. 또한 회주 스님의 집무실 조차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차량도 없이 몸 하나로 수행생활을 하신다고 한다.
절이 절다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소유의 정신이며, 상을 가지고 있지 않
다는 것이다.
상을 없애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자신의 입장만
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텅빈 마음으로 - 무소유의 정신 - 상대방과 조화를
이룰 수 잇도록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욕심없이 살아가기가 힘이 든 현실이지만, 지나친 욕심과 그로 인해 타인에
게 상처를 준다면 이것은 참다운 불자로서의 길이 아니다. 앞의 스님처럼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가진 못하더라도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
의 마음으로 상에 연연하지 않고 소욕지족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다.[봉은법회 제102호, 254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