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넷째 주일(교회창립기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4월 21일(주일)
로마서 6:1-14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감나무 씨가 흙에 심어지면 전혀 다른 형태의 감나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산다는 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 곧 새로운 존재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아요.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잖아요. 번데기가 된 애벌레는 스스로 소화 효소를 방출합니다. 이때 애벌레였던 몸이 녹아 액체가 되고 그 액체가 단백질을 바탕으로 재조립되고 나비가 됩니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나비는 애벌레 때의 기억을 가진다고 해요. 놀랍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생활신앙도 더 이상 죄에 지배받지 않아요. 죄에서 해방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생활신앙은 죄와의 관계에서는 죽어 있는 자들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는 사는 자들로 살게 되는 거지요(11절).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야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되고(4절) 또한 의로워지는 삶(7절)을 살 수 있는 거지요.
사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생활신앙은 그리스도의 몸을 입은 새로운 존재로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의 변화인 거지요.
이런 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땅에 심어진 씨처럼 죽어야 하지요. 여기서 죽음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수명이 다해 숨을 거두는 죽음이 아녜요. 이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죽는 거예요.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거지요. 그래야 우리는 진정 죽음의 권세 앞에서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 하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거예요.
죽음의 권세는 악과 불의한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죽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악과 불의한 세력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생활신앙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죽지 않고서는 살려지지 않는다”(고전 15:36) 하는 바울의 말이 오늘 본문과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어 있는 자들, 곧 죄인이 세례를 받고 변화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세례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죽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세례라는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롭게 사는 삶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지요.
여기서 세례(밥티조/βαπτίζω)란 물에 잠긴다는 뜻인데, 물에 잠기는 것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물에 잠기는 세례는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서 새 삶이 가능하게 되는 거예요.
세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받는 걸까요?
달리 말하면 누가 세례를 받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비는 죄인들이지요. 바울의 말대로 ‘죽어 있는 사람들’(네크로스/νεκρος)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죽어 있는 자들을 일으켜 살리기 위해서 베푸는 게 바로 세례로 본 거예요. 이 세례를 통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는 거지요.-(『부활되어야 할 부활』, 강일상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P.149)
하여 세례는 구체적인 변화가 동반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세례는 단지 입교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례로 옮긴 헬라어 밥티조(βαπτίζω)는 ‘씻다’는 뜻도 있어요. 세례는 죄를 씻는 거예요. 죄를 씻지 않고 세례를 주는 건 한낱 세례교인만 길러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세례의 전제조건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거예요.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고 했어요. 이건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강조한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 없이 세례만 받았으니 사람을 경쟁으로 줄 세우고, 죽지 않고 살 생각만 하니 기복신앙이 판치는 거지요. 삶의 변화가 있을 턱이 없겠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독 ‘세례’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삶의 변화를 준다(5절)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가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가는 변곡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알았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이지요.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사람들이 되라는 윤리적인 요청이에요.
하여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세례를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랄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죄에 대해서는 죽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러니 세례를 받고도 죽지 않았다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13)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기 부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누가 죄에 죽지 않았다고 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로마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 아래 있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죄가 죽음으로 우리를 다스렸다면 이제부터는 은혜가 의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위의 책, P.155)
그러니까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여러분이 세례를 받은 것은 죄에서 벗어나 의로워지기 위함이 아닌가(7절) 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거예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지시키는 거예요. 이 말은 마치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거 같아 괜히 가슴이 찔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럴 수 없다.”(2절)고 단호히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아직도 그 죄 안에 살아야 하겠느냐, 곧 죄 안에 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나타냅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2절)를 상기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이미 세례를 받았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죄와 단절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하는 겁니다.
하여 바울은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말하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 면에서 3절은 중요합니다. 3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에이스/εἰς)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기서 세례로 옮긴 밥티조(βαπτίζω)는 과거 수동태입니다. 말하자면 세례를 이미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이기도 하지요.
4절에서 바울은 세례받은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으니 이미 죄에 죽은 우리(2절)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새로움(4절)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자리라면 새 생명이 움터 나오는 자리이겠지요. 그러니까 삶의 변화는 그와 함께 묻히는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거예요.
오늘 바울이 말하려는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의 통과의례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미 세례를 받았어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 곧 옛사람은 이미 죽은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면 더 이상 죄 안에서 살 수 없겠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고 하니 고대 풍습인 순장을 연상케 합니다. 묻혔다는 뜻의 헬라어 쉰답토(συνθάπτω)는 ‘닮아가다’는 뜻도 있어요. 단지 함께 묻혔다는 의미만 말하는 게 아닐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는 말은 5절에 나오는 ‘연합한 자’로 번역한 헬라어 ‘쉼휘토스’(σύμΦυτος)와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단어는 형용사로 쉼휘오(συμΦύω)란 동사에서 나왔어요. 이 동사는 ‘함께’(쉰/συν)와 ‘자라다’(휘오/Φύω)의 합성어입니다. 바울은 마치 그림 그리듯이 이 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함께 자라는 자’라는 뜻입니다. 세례받은 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함께 자라는 공생관계로 본 듯해요.-(위의 책, P.159)
‘함께 묻혔다’와 ‘함께 자라다’는 말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콩과 식물 뿌리에 붙어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습니다. 뿌리혹박테리아와 콩과 식물은 영양분을 서로 주고받는 공생관계에요.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함께 자라갑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맥락은 5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세례란 함께 자라서 그리스와 같은 모습으로 닮아가는 거라 볼 수 있지요.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자라는 자들이 되었다면 우리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습으로도 함께 자라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예수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전제되고 예수의 부활과 같은 ‘부활’이 약속된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세례를 통해 죽어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자랄 수 있는 거지요. 그래요. 바울은 계속해서 세례를 통한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새로운 존재로서 살라는 윤리적 근거를 말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말했다면 6절부터는 세례를 통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세례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하여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자들이 되라는 윤리적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2절)가 과연 세례를 통해서 죽었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죽어서 과연 우리가 예수의 부활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살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의 몸이 죽어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는 거예요. 바울이 “우리가 알았다”(6절)고 하는 것은 ‘깨달았다’(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였을 때, 정작 죄인은 그가 아니라 우리였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옛사람)가 못 박혔어야 할 자리임을 깨닫는 거예요. 때 늦은 깨달음이라 해도 거기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참믿음이 시작되는 거예요. 행동하는 생활신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기 삶을 깨달았던 거예요.
다메섹 길 위에서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를 만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복음을 발견했어요. 진정 십자가에 못 박혔어야 할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임을 깨달은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그 죄인은 오히려 의로웠지요. 그런데 의롭다고 자부하던 바울, 아니 우리가 도리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그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과 죄인이 역전되는 현실,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바울은 깨달은 거예요. 바로 그게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바울을, 우리를 변화시키는 윤리적 근거가 된 거예요.
만일 세례를 받고도 여전히 죄의 종노릇 하는 삶을 산다면 죄의 몸이 죽었다(6절)고, 곧 소멸되었다(카탈레오/καταργέω)고 말할 수 없겠지요. 또한 옛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죄의 몸이 소멸해야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2절) 우리가 되어야지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어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2절)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 있는 자들(νεκρός/4절)은 죄인이고, 죽은 자들(아포드네스코/ἀποθνῄσκω;상징적으로 ‘죽다’는 뜻/2절)은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은 곧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요. 죄에 죽은 사람이라야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겠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게 되고, 의로워지는 삶(7절)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 죽은 자(아포다논/ἀποθανών)가 죄에서 벗어나 의로워져 왔기(데디카이오타이/δεδικαίωται:/완료 수동태)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7절)로 옮긴 아포다논(ἀποθανών)은 단수로 쓰였습니다.
왜 굳이 어려운 헬라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느냐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단수로 쓰인 ‘죽은 자’, 곧 아포다논은 사람에 따라 죽은 자도 있고 아직 죽지 않은 자도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위의 책, P.164)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로 번역한 디카이오(δικαίόω)가 현재완료 수동태(have/has been+과거분사/과거부터 현재까지 경험/완료/결과 표현. ~해왔다)로 쓰였다는 점도 주목해서 봐야 할 말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번역해 놓으니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면 디카이오를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까요?
사실, 믿는 자의 삶이 의로워져 가는 과정에 있음을 소홀히 여긴 거예요. 그러니 디카이오는 ‘의롭게 되었다’, 또는 ‘의로워져 왔다’고 번역하는 게 적절한 거예요.
죽은 자(세례받은 사람)는 죄에서 벗어나 비로소 의롭게 되었다는 겁니다. 세례받은 자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자들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생활신앙도 의로워져야 하겠지요.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삶이 되어야 하겠지요.
사실, 세례는 단지 신앙생활의 통과의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회개가 전제된 죽음의 통과의례인 거지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는 세례는 단지 종교적 의식에 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현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앞뒤 빼고 오로지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 삶은 항상 뒷전입니다. 복 받기만 추구해요. 성공 출세만 탐해요. 번영과 성장에만 집착해요. 개인의 구원만 강조해요.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관심 밖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지 않는데 어떻게 신앙이 성숙할 수 있을까요? 껍데기 신앙생활만 있을 뿐이지요. 생활신앙은 오간 데 없어요. 신앙과 삶의 괴리감이 심각할 지경입니다.-(위의 책, P.164)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야 의로워집니다. 의로워져야 구원에 이르지 않겠는지요. 이런 성찰과 각성 없이 성숙할 수도 없고, 의로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구원에도 미치지 못할 거예요.
그렇다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2절 이하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2~14절/개역개정)
12절 이하를 원문에 따라 풀어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수밖에 없는 몸 안에서, 그것(그 몸)의 욕심들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죽어 있는 자들에게서 벗어나 사는 것 같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곧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도구(무기)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가 여러분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14절/강일상 사역)
여기서 바울은 ‘몸의 사욕’(12절), 곧 몸의 욕심이 ‘죄’라고 말합니다. 그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죄에서 벗어나 의로워져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실, 고백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의 세례로 옛사람이 죽고 죄의 몸이 소멸할 거라 바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고백한 바울의 말이 우리 삶에 큰 울림이 됩니다.
날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지요.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과 삶이 더욱 성숙해져 가고, 그래야 더욱 의로워져 가고, 그래야 날마다 거룩해져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삶을 애쓰고 힘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구원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지요.
“나는 날마다 죽는다.” 하는 바울의 고백이 ‘현재에 충실하라’는 전도자의 소리로 들립니다. 전도자가 그랬지요. 함께 읽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날이 기쁠 수는 없습니다. 인생에 어두운 날도 많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명심하십시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얼마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지금의 젊은 순간을 기뻐하고 이 소중한 시간을 여러분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전 11:8~9절)-(『더바이블 전도서』, 송민원 지음, 감은사, P.300)
기도 / 삶의 순간에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연둣빛이 햇살에 나부낄 때 가슴이 뜁니다.
햇빛이 포근히 옷깃을 만질 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는 지점임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탐욕과 죄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